"꺾이지 않는 마음" 한국 축구가 남긴 최고의 메세지

이준목 2022. 12. 3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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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16강 신화 달성한 벤투호, 2002년 월드컵 키즈들

[이준목 기자]

2022년은 한국 축구에 어느 때보다 기념비적인 한 해로 기억될 전망이다. 20년 전인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축구가 4강 신화를 작성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던 순간처럼, 당시의 영광을 함께했거나 선배들의 축구를 보며 자라난 월드컵 키즈들은 오늘날 한국축구를 이끄는 새로운 주역이 되어 빛나는 역사들을 새롭게 썼다.

올해 한국축구 최고의 명장면은 역시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축구대표팀의 16강 진출이었다. 홈에서 열린 2002년 한일월드컵 4강과 2010 남아공월드컵에 이어 역대 3번째이자, 12년 만의 원정 16강이었다. 한국은 일본, 호주와 함께 카타르월드컵을 통하여 그동안 축구변방으로 취급받던 아시아의 반란을 주도했다. 특히 최근 두 번의 월드컵 준비과정에서 반복되었던 감독교체와 비관론 등 한국축구의 오랜 징크스들을 깨뜨렸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포르투갈 출신의 파울루 벤투 감독은, 역대 최초로 직전 월드컵 이후 지휘봉을 잡은 대표팀 감독이 지역예선과 본선을 모두 거치며 4년을 완주하고 16강까지 오르는 최초의 기록을 세우며 한국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썼다. 한국축구 역사상 최장수 감독(4년 4개월)이라는 기록도 수립했다. 재임기간 동안 고집과 불통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투박하던 한국축구에 빌드업 위주의 점유율 축구를 뚝심있게 밀어붙이며 한국도 세계무대에서 강팀들과 대등하게 맞서는 축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16강 진출 과정도 역대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이었다. 앞서 우루과이-가나와 1무 1패에 그치며 탈락 위기에 놓인 한국은 벤투 감독마저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가 퇴장당하며 최종전에서 벤치에 앉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강호 포르투갈을 상대로 선제골을 내주고도 김영권의 동점골-황희찬의 역전 결승골로 극적인 2-1 승리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가나가 우루과이에 0-2로 패배하고도 동귀어진 작전을 펼치는 행운까지 따라주며 한국은 '알라이얀의 기적'을 완성할 수 있었다.

16강전에서는비록 브라질의 벽을 넘지 못하고 완패했지만 팬들은 최선을 다해준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한국축구 최초의 월드컵 한 경기 멀티골을 신고한 조규성, 첫 어시스트의 주인공 이강인, 포르투갈전 결승골의 어로 황희찬 등은 '월드컵 스타'로 부상하며 한국축구 세대교체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여기에 주장이자 에이스 손흥민은 황희찬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한국 선수로는 월드컵 최다 공격 포인트(3골1도움)의 주인공이 됐다.

실력과 결과보다 더 큰 감동을 준 것은 선수들의 포기하지 않은 열정과 근성이었다. 마스크 투혼을 펼친 손흥민을 비롯하여 김민재, 황인범 등은 부상과 심리적인 부담 속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는 열정을 발휘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표팀의 선전은 다사다난한 사건사고와 경제위기, 사회적 갈등에 지쳐있던 국민들에게도 큰 위로를 선사했다. 겨울에 열린 월드컵에도 많은 팬들이 거리로 나와 뜨거운 응원전을 펼쳤고, 20년 전 그때처럼 국민들을 오랜만에 축구로 하나되는 기쁨과 열광을 공유할 수 있었다. 축구대표팀이 남긴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구호는 월드컵에서 한국축구의 투혼을 상징하는 최고의 유행어로 곳곳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이러한 한국축구의 경쟁력 향상을 주도한 것은 '월드클래스'로 성장한 선수들의 능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손흥민은 지난 5월 2021-2022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최종전 노리치시티와의 경기에서 멀티골을 터뜨리며 23골을 기록, 모하메드 살라(리버풀)와 함께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 유럽 빅리그(상위 5대 리그) 득점왕 등극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 축구 역사상 최초였다. 그동안 손흥민을 오랫동안 따라다니던 월드클래스와 한국축구 GOAT(역대 최고선수, 차범근-손흥민-박지성)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기도 했다.

손흥민과 함께 유럽 빅리그에서 맹활약한 또다른 선수는 김민재(나폴리)와 이강인(마요르카)이었다. 김민재는 유럽 진출 1년 만에 세계 최고의 리그 중 한 곳인 이탈리아 세리에A에 입성했고, 이적하자마자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자리매김하며 세리에A 이달의 선수상(9월)을 수상하며 놀라운 활약을 했다. 김민재의 활약에 힘이어 나폴리의 세리에A 1위를 달리고 있다. 이강인은 마요르카 2년 차에 전반기 2골 3도움을 올리며 부동의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유럽 3대 빅리그(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에 걸쳐 스타플레이어로 자리잡은 선수들을 잇달아 배출해냈다는 것은, 월드컵 16강과 함께 한국축구의 높아진 위상을 상징하며 축구팬들에게 자부심을 안겨줬다.

국내 축구계에서는 울산의 '7전8기' 도전끝에 이뤄낸 K리그 우승이 화제였다. 전통의 강호로 꼽혔지만 유독 리그 우승과 인연이 없었던 울산은 꾸준한 투자를 바탕으로 2005년 이후로 무려 17년 만에 K리그1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지긋지긋하던 준우승 징크스를 마침내 벗어났다. '한국축구의 전설' 홍명보 감독은 성인무대와 클럽팀 감독으로 첫 우승을 일궈내며 지도자로서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현대가 라이벌' 전북 현대의 5연패 장기 독주를 마침내 저지했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었다.

K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조규성은 월드컵에서도 맹활약을 이어가며 한국축구 차세대 스타로서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유럽무대에서 K리그로 복귀한 이승우는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며 화려하게 부활했고 특유의 재기발랄한 댄스 세리머니로 연일 화제를 일으켰다, 월드컵에서는 선수로 출전하지 못했지만 대신 해설위원으로 참가하여 입담을 과시하며 남다른 스타성을 입증했다.

이밖에도 오현규-양현준-엄원상 등 향후 한국축구를 이끌어나갈 신성들의 활약이 빛났다. 특히 오현규는 올시즌 리그에서만 13골을 터뜨리며 수원의 극적인 1부리그 진류를 이끌었고,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유일하게 대기 엔트리로 선수단과 동행하며 귀중한 경험을 쌓아 앞으로를 더 기대하게 됐다.

여자축구도 가능성을 보여줬다. 콜린 벨 감독이 이끄는 여자축구 대표팀은 올해 초 2022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으로 최고 성적을 기록했고, 3회 연속 월드컵 출전에도 성공했다. 여자축구 간판스타 지소연은 8년간의 유럽 생활을 정리하고 여자축구리그 발전과 팬들을 위해 수원FC위민행을 택했다.

2023년에도 한국축구의 시계는 쉴 틈이 없다. 가장 먼저 K리그는 2023년 2월에 새 시즌을 개막하는 가운데, 올해부터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가 춘추제에서 추춘제로 변경된 것이 변수다. ACL은 8월 플레이오프를 시작으로 9월부터 12월까지 조별리그를, 다음해 2월부터 4월까지 토너먼트를 각각 치러 우승팀을 가린다. ACL에 나서야 하는 K리그 팀(울산, 전북, 포항, 인천)들은 후반기에 어쩔 수 없이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그동안 ACL에서 강세를 보였던 K리그로서는 불리한 변화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관건이다.

대한축구협회는 카타르월드컵을 끝으로 벤투 감독과 결별하면서 내년 2월까지 새 감독을 선임하기로 했다. 새로운 감독이 이끄는 A대표팀은 내년 3월 첫 A매치를 시작으로 2026 북중미 월드컵을 향한 새로운 도전에 돌입한다.

김은중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20세 이하(U-20) 대표팀은 3월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리는 아시아축구연맹(AFC) U-20 아시안컵을 앞두고 있다. 이 대회에서 상위 4위 안에 들면 내년 5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2023년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출전권을 획득한다.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23세 이하 대표팀은 오는 9월 코로나로 1년 연기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3연패에 도전한다. 콜린 벨 감독이 이끄는 여자대표팀역시 항저우 대회를 비롯하여, 7월에는 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 본선 H조에서 콜롬비아(7월 25일)-모로코(7월 30일)-독일(8월 3일)을 상대로 2015년 캐나다대회 이후 8년 만의 16강 진출을 노리고 있다. 새해에는 한국축구가 또 어떤 극적인 드라마와 감동을 선사해줄지 팬들은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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