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건 장작 6개비뿐...커피믹스보다 더 놀라운 '그날의 기적'

오유진 2022. 12. 31.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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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생환 광부 박정하씨 신년 메시지


봉화 광부 박정하가 아트센터로 변신한 강원도 정선 옛 삼척탄좌 자리에 섰습니다. 광부 선배들의 모진 생명력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리고 제가 어두컴컴한 지하 190m에서 221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뭐였을까요. 모든 아빠는 오늘도 무사히 가족에게 돌아가려 합니다. 새로운 해를 보고픈 열망이 있습니다. 한 해가 저뭅니다만, 내일이면 새해가 뜹니다. 새해는 희망의 다른 말입니다. 최영재 기자
모든 게 다 떨어졌다. 지난 10월 26일 오후 5시 38분 경북 봉화의 아연 광산 제1수직갱도 지하 190m 지점이 무너졌다. 27년차 광부 박정하(62)씨는 입사 나흘째인 후배 광부와 함께 막장에 고립됐다. 커피믹스와 지하수로 연명하며 구조를 기다린 지 9일째. 남은 건 고작 두 시간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장작 6개비가 전부였다. 랜턴이 방전되는 순간 어둠과 함께 공포와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문득 ‘차라리 누가 총으로 쏴서 단번에 죽는다면 편할 텐데’라는 생각이 스쳤다. 차고 있던 손목시계도 보고 싶지 않아 반대 방향으로 돌려버리고, 죽음의 순간만 기다렸다. 그렇게 두 시간쯤 흘렀을까. 갑자기 “야. 우리 지금 안 죽고 살아 있잖아. 사람 목숨이 그렇게 쉽게 끊어지겠냐? 밑에서 올라오든, 옆에서 튀어나오든 불빛만 보이면 우리 사는 거야”라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또다른 두 시간이 흐른 뒤 설핏 발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줄기 빛.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끝에 맞이한 제2의 인생이었다.

“모든 것이 기적이었죠.”

지난 11월 4일 오후 11시 3분. 두 명의 광부는 부축을 받으며 두 발로 걸어서 갱도 밖으로 나왔다. 사고부터 구조까지 221시간. 구조대는 구조 전날까지도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추가 붕괴로 구조작업에 차질을 빚었다. 이런 와중에도 총 9개의 구멍을 뚫으며 필사적으로 매몰 광부를 찾아 나선 구조대와 동료 광부들이 올린 개가였다. 며칠 전 벌어진 이태원 참사로 침울해진 국민에게 작은 위로가 됐다.


작업장 환경·채굴 방식 50년 전 그대로, 이젠 확 변해야죠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박정하씨는 광부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 힘들지 않냐고 묻자 “이것이 나의 책무”라고 말했다. 최영재 기자

지난 28일 강원도 정선 폐광근로자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박씨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더니 새로운 빛을 마주하게 됐다”며 “제가 겪은 희망이 다가오는 새해 국민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Q : 생환 후 어떻게 지내고 있나.
A : “매일 같이 인터뷰에 응하고, 쉬는 날에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육체적인 부분은 거의 회복이 됐는데,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거든요. 낮에는 멀쩡하다가도 해가 지면 불안감이 찾아와요. 자려고 누우면 환청이 들리기도 해요. 갱 내부와 외부를 이어주는 인터폰 벨 소리가 자주 맴도는데, 사고 당시에는 전기가 끊겨서 듣지 못했거든요. 그 소리가 얼마나 듣고 싶었으면 환청으로 들릴까 싶어요. 깊은 잠에 들지 못해 오전 3시면 어김없이 눈이 떠지고, 어둠이 무서워 방마다 돌아다니며 불을 켜곤 합니다.”

Q : 사고 현장에서는 무슨 생각을 했나.
A : “극한의 상황을 겪은 건 정말 큰 고통이고, 두려움이었지만 사고를 계기로 모든 것에 대한 소중함을 새삼스레 깨닫게 됐습니다. 특히 가족에 대한 소중함이 더 깊어졌어요. 아내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어 온 힘을 다해 죽음의 공포와 싸웠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사는 그 자체가 기쁩니다. 앞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잘 간직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Q : 언론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A : “주치의는 치료를 위해 인터뷰도 자제하라고 합니다. 사고 당시를 자꾸 떠올리다 보니 치료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면서요. 하지만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 정부와 관련 기관, 광산 업주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일하고 있는 동료 광부들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어떤 처우 개선이 필요한지 국민은 잘 모르시잖아요. 제가 겪은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살아 돌아온 저의 책무이기도 합니다.”

Q : 광부로서의 삶을 돌아보면.
A : “삶이 힘들고, 꽉 막힌 것 같을 때 흔히들 ‘막장 인생’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그 ‘막장’이 바로 광부들이 일하는 곳입니다. 갱 안에 들어가면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어요. ‘위험’ 그 자체입니다. 광산 사고는 경상이라는 게 거의 없거든요. 대부분 중상 아니면 사망으로 이어지는데, 3D 업종 중에서도 3D죠. 처음 광부 일을 시작하던 1982년에는 말단 공무원 월급의 2~3배를 받으며 일했어요. 국가에서도 광부를 ‘산업 전사’, ‘산업 역군’이라 칭하며 자긍심을 북돋워 줬지만, 이제는 그런 게 전혀 없잖아요. 작업장 환경도, 채굴·채광하는 방식도 40년,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업체가 광산에 투자할 리도 없고, 광부들은 고령화되고 있으니 점점 더 열악해질 뿐입니다. 동료들에게 늘 ‘서두르면 다치니, 무조건 순서대로 작업해야 한다’는 당부를 자주 해왔는데, 아니나다를까 이번 사고도 안전조치 미흡으로 발생했어요. 작업장 환경이 변화하지 않는 한 계속 이런 사고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Q : 그런 상황에서도 생환한 것에 모두가 기적이라고들 말하는데.
A : “돌아보건대, 평소 뭐든 철저하게 준비하는 성격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사고가 발생했던 날은 새로운 막장에 투입된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는데, 첫날부터 현장을 보고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가져다 두기 시작했어요. 사고 이틀 전에는 1m 80㎝짜리 나무판 20여장 가져다 뒀고요. 우연처럼 느껴지지만, 우연을 가장한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구조된 이후 ‘박정하, 네가 진짜 준비성 하나는 최고다’라며 스스로를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본지 독자에게 전하는 박정하씨의 친필 메시지.

Q : 구조 이후 화제가 됐던 ‘커피믹스’도 그중 하나였다.
A : “사고 당일, 입갱하기 전 동료에게 커피믹스 170여 개쯤 들어있던 박스를 통째로 들고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봉지를 가져오더니 낱개로 담더라고요. 제가 ‘그냥 통째로 들고 오라니까?’라고 했는데 ‘내일 또 가지고 가면 되죠’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30여 개의 커피믹스를 챙겨갔어요. 3일 정도 먹으니까 다 떨어졌긴 하지만, 생존에 정말 큰 도움이 됐죠.”

Q : 농담까지 나누며 버텨냈는데.
A : “함께 고립된 동료는 입사 4일 차 신입 광부였어요.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겁먹고 펑펑 울기 시작했죠. 작동도 안 되는 인터폰 1번을 꾹 누르고 ‘여기 3편인데 오리 백숙 좀 하나 끓여놔 봐. 냉장고 안에 전복 있으면 하나 넣어서 끓여놔. 몇 시에 오느냐고? 아 그건 몰라. 일단 끊어’라며 혼자 상황극을 했어요. 그랬더니 동료가 ‘전화가 돼요?’하는 거예요. 사실 웃음도 안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이겨내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Q : 새해 ‘희망 전도사’로서 국민에게 응원의 한마디를 전한다면.
A : “마지막 구조되던 날에는 모든 게 다 떨어졌었어요. 난들 왜 불안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희망이 찾아오더라고요. 2022년도 어김없이 참 힘든 한 해였습니다. 늘 희망차고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지만, 내년에도 아마 이 힘든 것을 똑같이 겪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욱 웃음을 잃지 마시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가신다면 저처럼 새로운 빛, 희망을 다시 마주할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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