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건 장작 6개비뿐...커피믹스보다 더 놀라운 '그날의 기적'
기적의 생환 광부 박정하씨 신년 메시지
“모든 것이 기적이었죠.”
지난 11월 4일 오후 11시 3분. 두 명의 광부는 부축을 받으며 두 발로 걸어서 갱도 밖으로 나왔다. 사고부터 구조까지 221시간. 구조대는 구조 전날까지도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추가 붕괴로 구조작업에 차질을 빚었다. 이런 와중에도 총 9개의 구멍을 뚫으며 필사적으로 매몰 광부를 찾아 나선 구조대와 동료 광부들이 올린 개가였다. 며칠 전 벌어진 이태원 참사로 침울해진 국민에게 작은 위로가 됐다.
작업장 환경·채굴 방식 50년 전 그대로, 이젠 확 변해야죠
지난 28일 강원도 정선 폐광근로자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박씨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더니 새로운 빛을 마주하게 됐다”며 “제가 겪은 희망이 다가오는 새해 국민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Q : 생환 후 어떻게 지내고 있나.
A : “매일 같이 인터뷰에 응하고, 쉬는 날에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육체적인 부분은 거의 회복이 됐는데,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거든요. 낮에는 멀쩡하다가도 해가 지면 불안감이 찾아와요. 자려고 누우면 환청이 들리기도 해요. 갱 내부와 외부를 이어주는 인터폰 벨 소리가 자주 맴도는데, 사고 당시에는 전기가 끊겨서 듣지 못했거든요. 그 소리가 얼마나 듣고 싶었으면 환청으로 들릴까 싶어요. 깊은 잠에 들지 못해 오전 3시면 어김없이 눈이 떠지고, 어둠이 무서워 방마다 돌아다니며 불을 켜곤 합니다.”
Q : 사고 현장에서는 무슨 생각을 했나.
A : “극한의 상황을 겪은 건 정말 큰 고통이고, 두려움이었지만 사고를 계기로 모든 것에 대한 소중함을 새삼스레 깨닫게 됐습니다. 특히 가족에 대한 소중함이 더 깊어졌어요. 아내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어 온 힘을 다해 죽음의 공포와 싸웠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사는 그 자체가 기쁩니다. 앞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잘 간직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Q : 언론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A : “주치의는 치료를 위해 인터뷰도 자제하라고 합니다. 사고 당시를 자꾸 떠올리다 보니 치료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면서요. 하지만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 정부와 관련 기관, 광산 업주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일하고 있는 동료 광부들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어떤 처우 개선이 필요한지 국민은 잘 모르시잖아요. 제가 겪은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살아 돌아온 저의 책무이기도 합니다.”
Q : 광부로서의 삶을 돌아보면.
A : “삶이 힘들고, 꽉 막힌 것 같을 때 흔히들 ‘막장 인생’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그 ‘막장’이 바로 광부들이 일하는 곳입니다. 갱 안에 들어가면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어요. ‘위험’ 그 자체입니다. 광산 사고는 경상이라는 게 거의 없거든요. 대부분 중상 아니면 사망으로 이어지는데, 3D 업종 중에서도 3D죠. 처음 광부 일을 시작하던 1982년에는 말단 공무원 월급의 2~3배를 받으며 일했어요. 국가에서도 광부를 ‘산업 전사’, ‘산업 역군’이라 칭하며 자긍심을 북돋워 줬지만, 이제는 그런 게 전혀 없잖아요. 작업장 환경도, 채굴·채광하는 방식도 40년,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업체가 광산에 투자할 리도 없고, 광부들은 고령화되고 있으니 점점 더 열악해질 뿐입니다. 동료들에게 늘 ‘서두르면 다치니, 무조건 순서대로 작업해야 한다’는 당부를 자주 해왔는데, 아니나다를까 이번 사고도 안전조치 미흡으로 발생했어요. 작업장 환경이 변화하지 않는 한 계속 이런 사고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Q : 그런 상황에서도 생환한 것에 모두가 기적이라고들 말하는데.
A : “돌아보건대, 평소 뭐든 철저하게 준비하는 성격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사고가 발생했던 날은 새로운 막장에 투입된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는데, 첫날부터 현장을 보고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가져다 두기 시작했어요. 사고 이틀 전에는 1m 80㎝짜리 나무판 20여장 가져다 뒀고요. 우연처럼 느껴지지만, 우연을 가장한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구조된 이후 ‘박정하, 네가 진짜 준비성 하나는 최고다’라며 스스로를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Q : 구조 이후 화제가 됐던 ‘커피믹스’도 그중 하나였다.
A : “사고 당일, 입갱하기 전 동료에게 커피믹스 170여 개쯤 들어있던 박스를 통째로 들고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봉지를 가져오더니 낱개로 담더라고요. 제가 ‘그냥 통째로 들고 오라니까?’라고 했는데 ‘내일 또 가지고 가면 되죠’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30여 개의 커피믹스를 챙겨갔어요. 3일 정도 먹으니까 다 떨어졌긴 하지만, 생존에 정말 큰 도움이 됐죠.”
Q : 농담까지 나누며 버텨냈는데.
A : “함께 고립된 동료는 입사 4일 차 신입 광부였어요.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겁먹고 펑펑 울기 시작했죠. 작동도 안 되는 인터폰 1번을 꾹 누르고 ‘여기 3편인데 오리 백숙 좀 하나 끓여놔 봐. 냉장고 안에 전복 있으면 하나 넣어서 끓여놔. 몇 시에 오느냐고? 아 그건 몰라. 일단 끊어’라며 혼자 상황극을 했어요. 그랬더니 동료가 ‘전화가 돼요?’하는 거예요. 사실 웃음도 안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이겨내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Q : 새해 ‘희망 전도사’로서 국민에게 응원의 한마디를 전한다면.
A : “마지막 구조되던 날에는 모든 게 다 떨어졌었어요. 난들 왜 불안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희망이 찾아오더라고요. 2022년도 어김없이 참 힘든 한 해였습니다. 늘 희망차고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지만, 내년에도 아마 이 힘든 것을 똑같이 겪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욱 웃음을 잃지 마시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가신다면 저처럼 새로운 빛, 희망을 다시 마주할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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