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영화가 일관됐던 영화운동 1세대, 한국의 켄 로치
[성하훈 기자]
▲ <오! 꿈의 나라> 촬영 현장. 왼쪽부터 김동빈 감독(좌측), 스티브 역 Kurt Reinken 배우, 홍기선 감독 |
ⓒ 장산곶매 제공 |
한국 영화운동 역사에서 홍기선(감독)과 서울대 얄라셩은 그 출발점이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후 영화는 단순한 문화적 소비가 아닌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도구이자 사회 변혁운동의 수단으로의 역할이 강조됐고, 그 맨 앞에 홍기선이 있었다.
그래서 홍기선을 말할 때는 항상 영화운동 1세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1979년 서울대 공대 재학시절 같은 공대생이었던 김동빈(감독), 문원립(동국대 교수)과 함께 시작한 영화연구회 얄라성 이후, 일관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에게 영화는 잘못된 권력에 맞서고 사회를 변화시킬 무기이기도 했다.
홍기선은 1957년 강원도 원성(현 원주)에서 아버지 홍현우와 어머니 이성필 사이의 5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면서기를 했고 이후 학교 서무과장, 수리 조합장을 하다 서울로 이사 온 뒤 족보 대필 등을 했다고 한다.
홍기선의 조카인 안동규(제작자. 영화세상 대표)는 "조부 때는 부농으로 독립운동 자금도 지원해 지역의 학교에 공덕비가 세워졌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홍기선은 안동규 어머니의 사촌동생이었다.
원주에서 자란 홍기선은 원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양양 현남의 현남중학교 입학했다. 이듬해인 1971년에는 철원의 신철원 중학교로 전학했다. 이사가 잦았는데,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맏형의 부임지를 따라다니며 살았기 때문이었다. 홍기선은 큰 형과 20년 이상 터울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친구가 많이 없었기에 한국 문학 전집 등 많은 소설을 읽으며 습작을 시작했고, 중학교 시절 백일장에서 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특별히 좋아했던 것은 소설가 손창섭 작품이었다.
1973년 서울 경복고등학교에 입시에 실패한 홍기선은 1년 동안 진학에 관한 특별한 계획 없이 형들의 고학 생활과 마찬가지로 명동에서 신문 배달 생활을 하며 틈틈이 도서관과 극장을 들락거렸다. 이 시기 기억에 남는 영화로 <젊은이의 양지> <볼사리노> <미망인> 등을 꼽았다.
1977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원자력공학과에 입학한 홍기선은 1979년 서울대 학보인 '대학신문'에 나온 광고를 보고 서울대 출신 이봉원 감독이 주선한 얄라성 모임에 참여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모임의 활력이 떨어지며 흐지부지되려던 상황에서 김동빈, 문원립 등과 함께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다녔고, 여기서 강한섭(작고, 서울예대 교수) 전양준(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등과 만나게 된다.
안동규(제작자. 영화세상 대표)는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독일문화원을 같이 오고 갔다"며 "삼촌이 종종 집에 왔고, 공동관심사가 영화에 대한 것뿐이었다"고 말했다. 안동규는 1985년 경희대 영화 서클 '그림자놀이' 만들어 초기 대학 영화운동을 주도했기에 홍기선과 같은 영화운동 1세대였다.
하지만 안동규는 영화에만 집중하는 삼촌이 다소 못마땅했다고 한다. "서울대 원자력공학과는 졸업하면 보통 이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자리인데, 자기 전공 살려서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했다"는 것이다.
물론 안동규는 충무로에서 일찍 활동을 시작했기에 홍기선의 영화제작과 <오! 꿈의 나라>가 일본에서 상영될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가까운 친척으로서 집안 사정을 잘 알았기에 삼촌의 삶을 마냥 긍정하기는 어려운 위치였다.
홍기선은 문화원을 오가던 시기 장길수 감독의 단편 <환상의 벽> 제작에도 참여했다. 장길수 감독은 "독일문화원의 도움을 받아 <환상의 벽>을 촬영했는데, 엔딩 크레디트에는 올라있지 않으나 당시 시나리오를 쓴 게 홍기선이었다"고 말했다.
영화운동 뛰어들게 한 '서울의 봄'
1980년 공릉동에 있던 서울대 공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얄라성'은 서울대 정식 서클(동아리)로 등록할 수 있게 됐다. 홍기선은 초대 회장을 맡았고, 여러 단편 영화들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때 만든 영화가 홍기선에게 새롭고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5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격동의 시대를 뛰어넘은 반란의 기록들-1970, 80년대 한국독립영화사>에서 당시의 영화작업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 2005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격동의 시대를 뛰어넘은 반란의 기록들-1970, 80년대 한국독립영화사>에서 1980년대 대학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는 홍기선 감독 |
ⓒ 한국영상자료원 |
홍기선은 <한국의 영화감독 13인>(이효인 저. 1994년) 인터뷰에서 영화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할 때 프랑스문화원에 자주 다녔어요. 그때 영화를 자주 보면서 익숙해졌죠. 그리고 '얄라성'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취미를 붙였고 군 제대 무렵 결정을 했습니다. 또 당시의 대학 분위기가 전공 관련 학업에만 치중하도록 허락되지 않았고 그래서 점차 영화에 매력을 느껴 선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영화에 흥미를 느끼던 홍기선이 본격적으로 영화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1980년 5월 '서울의 봄' 상황이 작용했다.
홍기선의 부인 이정희(시나리오 작가)는 "홍기선 감독이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서울역 앞까지 진출했을 때 8mm 카메라로 그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면서 "당시 현장에서 상황을 다 지켜보고 기록한 입장에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서울영화집단에 참여하고, 사회 비판적 영상을 만든 것이 사회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무기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정희에 따르면 1980년 서울의 봄을 생생하게 기록한 필름은 유실됐다고 한다. "홍 감독이 언젠가 경찰서 다녀오니 '영화관련 공간이 다 털렸고, 그 필름도 없어졌다'고 했다"며 "그 얘기만 나오면 '지금이라도 찾으면 좋겠다'면서 고 할 만큼 아쉬워했다"고 말했다.
1980년 군에 입대한 홍기선은 1982년 군 제대 후 얄라성 졸업생들이 만든 '서울영화집단'에 가입했고, '얄라성' 활동을 병행했다. 1983년 4학년에 복학한 뒤 후배들과 단편영화 <출구> 등을 작업했다. 서울영화집단에서는 공동 집필로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를 발간했다. 졸업 후에는 서울영화집단 활동에 집중했다.
얄라성에서 줄곧 함께했던 김동빈(감독)에 따르면 1981년 초기 얄라성 회원들이 취직·유학·군입대 등으로 학교를 떠난 후 영화라는 구심을 갖고 싶었기에 서울영화집단을 만들었다. 초기는 박광수(감독) 송능한(감독)이 중심이었다가 박광수가 유학을 떠난 이후 홍기선이 지탱했다. 서울영화집단 사무실에서 숙식할 만큼 홍기선 자체가 서울영화집단이었다.
김동빈은 "홍기선 감독은 서울영화집단에 남아 단편영화 작업을 했다"며 "당시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홍 감독이 가끔 작업비가 부족하면 찾아오고는 했다"고 회상했다.
서울영화집단에서 활동했던 배인정(노동자뉴스제작단 대표)은 "홍기선 형은 자기 영화 만드는 것에만 관심 있었지 조직을 꾸리고 이끄는 데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며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책을 낸 것 외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홍기선의 서울영화집단은 당시 재야 문화운동단체인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 소속돼 있었는데, 이를 통해 광주지역 문화예술인들과 연결되면서 교류하게 된다. 이는 광주 영화운동에 영향을 끼쳤고, 박관현 열사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정희(시나리오 작가)는 "홍 감독이 광주의 박효선(작고. 전 극단 토박이 대표)과 알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1985년 겨울 홍기선이 홀로 지키던 서울영화집단에 이효인이 합류하면서 변화가 생긴다. 복학한 이효인이 안동규와 곽재용이 만든 경희대 영화서클 '그림자놀이'에 가입했고, 안동규에게 부탁해 안내를 받아 홍기선을 만나면서 서울영화집단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이정하(전 영화평론가)와 변재란(서울여성영화제 조직위원장. 순천향대 교수) 등이 참여했고, 이전 서울영화집단 회원 등이 재결합하면서 1986년 10월 서울영상집단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곧바로 '파랑새 사건'으로 인해 홍기선과 이효인이 체포되면서 서울영상집단 활동은 사실상 끝나게 된다. 당시 공안당국은 고문을 가하며 압박했음에도 찾던 혐의가 나오지 않자 다른 죄를 덮어씌운다. 홍기선과 이효인은 영화법 위반으로 기소돼 1987년 3월 선고유예를 받고 석방된다. 이를 계기로 대학 영화운동 단체인 '대학영화연합'이 결성된다.
이정희는 "홍기선은 영화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당시 영화법으로 처벌 받는 경우가 드물다 보니 감옥에 수감된 다른 죄수들이 '대체 영화법이 뭐예요?'라고 물으며 특별하게 대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 <오! 꿈의 나라>에 출연했던 홍기선 감독 |
ⓒ 장산곶매 제공 |
1987년 6월항쟁 이후 홍기선은 1988년 장산곶매에 합류해 광주민중항쟁 영화제작에 들어갔다. 장산곶매는 당시 영화운동에 뛰어들어 단편영화를 만들던 젊은 영화인들이 성균관대에서 열렸던 베를린영화제 초청 단편영화 상영회를 기회로 모인 자리에서 장편영화를 제작해 보자고 의기투합하며 만들어졌다.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제작 단체의 이름이 필요했는데, 여러 제안 중 선정된 '장산곶매'는 홍기선이 낸 것이었다.
'장산곶매'는 개인적인 결합 형태였으나 구심점 역할을 했던 홍기선이 대표를 맡게 된다. <파업전야>를 연출한 장동홍(감독)은 "홍기선이 특유의 성정과 리더십으로 후배들을 모았다"며 "후배들의 영화를 봐주고 조언해주는 등 도움을 줬고, 공수창과 함께 직접 <오! 꿈의 나라>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했다.
장산곶매에서 만난 이후 홍기선 감독 작품의 촬영을 전담했던 오정옥(촬영감독)은 홍기선에 대해 "영화를 자기 삶으로 살았던 분이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장산곶매 활동에 대해 "장편영화 제작을 위해 모인 집단창작 개념이었고, 영화제작 과정에서 연출 등을 별도로 구분했으나 콘티도 갈이 짜고 취재도 같이했을 만큼 실제로는 공동창작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 "16mm 영화를 만들 인적 자원이 많지 않았고 시대 영화를 만들려면 우리끼리 만들 수밖에 없었기에 그나마 조금의 경험이 필요한 사람들이 중요했다"고 덧붙였다.
장산곶매에서 활동하면서 홍기선은 회의를 싫어했다고 한다. 오정옥은 "당시 <오! 꿈의 나라> 제작과정에서 매일 회의를 했는데, 홍기선의 지론은 영화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며, "다른 집단에서도 회의가 많아 대부분 조직이 골치 아팠다고 들었는데, 홍기선은 영화 만드는 데 에너지를 써야 하는데 사상적이고 철학적인 학습과 회의에 몰두하는 것을 마땅치 않아 했다"고 말했다.
홍기선은 <오! 꿈의 나라> 상영 과정에서 예술극장 한마당 대표였던 유인택(전 예술의 전당 대표)과 함께 영화법 위반으로 고발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후 검열제도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지는 발판 역할을 했고, 검열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 <오! 꿈의 나라> 촬영 현장. 장동홍 감독(가운데) |
ⓒ 장산곶매 제공 |
1980년대 말 영화운동이 만든 광주민중항쟁 영화 <오! 꿈의 나라>는 탄압 속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장산곶매는 차기작인 <파업전야> 제작에 들어갔다. 하지만 홍기선은 장산곶매를 떠난다. 충무로에 가서 계속 영화운동을 하겠다는 뜻이었으나, 후배들에 대한 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정희는 "홍기선 감독은 자신이 빠지는 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며 "예술적 재능이 있는 장동홍 감독이 연출을 맡는 게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다른 후배들도 있다 보니 직접 하라고 이야기를 못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오정옥은 "홍기선 감독이 장산곶매가 자기주장 강한 사람들 중심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는 면도 있었다"면서 "당시 공동 연출시스템에서 장동홍(감독)이 책임연출을 맡았던 것은 1980년 군사독재 시대에 부족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우리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회상했다.
오정옥은 또한 "<선택> 영화 콘티 짜는 과정에서 홍기선이 '장산곶매는 프로덕션 개념의 조직으로 영화를 계속 만드는 단체로 성장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아쉬움을 토로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장동홍(감독)은 "가장 좋아했고,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 있는 형이 홍기선 감독인데, 속마음은 몰랐고, 충무로로 가겠다는 형에게 가지 말고 같이 작업하자고 했었기에 서운함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후배들을 위해 용퇴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조금 더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고 더 큰 꿈을 펴 보이고 싶은 심정이었던 같다"면서 "장산곶매의 산파역으로 틀을 만들어 놓고 충무로로 간 것이기에 돌이켜보면 잘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전 때의 홍기선 감독 |
ⓒ 전주영화제 제공 |
홍기선은 장산곶매를 떠난 후 첫 장편영화인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제작에 들어갔다. 1990년 만난 이정희와는 영화제작을 함께한 후 1992년 결혼하게 된다. 이정희는 대학 졸업 후 1988년 극단 현장의 창단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민족영화연구소와 같이 쓰게 된 1990년 염창동 극단 현장 사무실 입주 행사 때 손님으로 왔던 홍기선이 사귀자고 해 만나게 된 것이었다고 한다.
충무로에서 홍기선은 철저한 사실주의를 추구했던 감독이었다. 한국의 '켄 로치'로 불리기도 했다. 오정옥은 "홍 감독은 중간에 사람들을 위로 올리는 역할을 했다면서 리더보다는 <선택>의 김선명 선생과 같이 중간에 있는 사람들을 영화적으로 그려 내길 원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홍기선이 리얼리즘을 중요시했다"며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제작 당시 새우잡이로 끌고 가는 섬에서 영화를 촬영할 때 실제로 배에서 고기를 잡았다"고 회상했다.
또한 "새우잡이 배에서 촬영할 때도 사실적으로 그려 내려고 무던히 애썼는데 충무로 스태프들과 갈등으로 우리 주변의 후배 동생들이 참여해 완성하는 데 일조했다"며 그때 촬영 중에 홍 감독님이 "아휴 이제 살 것 같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오정옥은 "그때 들은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홍기선 감독이 영화언어와 정신적인 것, 그리고 돈에서 갈등이 있지 않았나 짐작이 든다"고 말했다.
이정희는 "<선택>에서 장기수 김선명(김중기 배우)이 감옥 안에서 배가 고파 쥐를 잡아먹는 장면이 나온다"며 "스태프들은 형식적으로 촬영하자고 주장했으나 홍기선은 제대로 찍어야 한다면서 쇠고기를 쥐 모양으로 만들어 직접 먹게 했을 만큼 리얼리즘을 실천했던 감독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배우들을 최대한 편하게 대해줬고, 연기자들에 대해 트집을 안 잡고 칭찬하는 것은 배려심이었다"며 "사전 리허설을 많이 했기에 촬영할 때 소리지를 일이 없었던 데다 시간약속을 잘 지켰다"고 말했다.
▲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한 장면 |
ⓒ 영필름 |
홍기선의 첫 작품이었던 35mm 장편영화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는 높은 성과를 거둔다. 프랑스 낭트영화제와 이탈리아 산레모영화제에 초청을 받았고, 1993년 영화평론가협회상 시상식에서 각본상과 신인감독상을, 백상예술대상에서는 각본상을 이정희와 함께 수상했다.
하지만 첫 작품의 주목에도 불구하고 다음 작품인 <선택>이 나오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씨네21>(2001년 3월 21일)은 "첫 작품이 평단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홍기선은 흥행영화를 기획하는 영화사와 타협하는 감독이 아니었다"며 "몇 차례 연출제의를 받았지만 자기 색깔을 고집했다"고 전했다.
1997년에 시나리오를 쓴 <선택>은 감옥에서 보낸 45년 세월을 시대순으로 보여준다. 군사분계선에서 정찰임무를 수행하다 체포돼 특무대의 고문을 받는 순간부터 진행되는 이 영화는 현대사의 비극에 어떤 포장도 입히지 않는다.
홍기선은 "어떻게 한 인간이 45년을 감옥에서 버틸 수 있었을까"하는 호기심에서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직접 김선명 씨를 만나 취재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연로한 탓에 2시간쯤 얘기하면 피곤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과거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기선은 "나 같으면 쉽게 한 장 써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견뎌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념이나 신념만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자기와의 약속이며 같이 감옥에 있던 동지에 대한 사랑이며 강압적 상황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를 영웅화하는 게 아니라 세계 어디도 그렇지 않은데 우리만 아직 이념의 사슬에 매어 있는 상황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모두가 돌려서 얘기하는 영화만 하잖나."
삶과 영화가 일치
▲ <이태원 살인사건>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는 홍기선 감독 |
ⓒ 선필름 |
▲ 홍기선 감독(가운데), 오정옥 촬영감독(왼쪽), 낭희섭 독립영화협의회 대표(오른쪽) |
ⓒ 오정옥 제공 |
홍기선의 작품들은 늘 사회문제와 민중들의 삶에 주목했다.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세 번째 작품 <이태원 살인사건>(2009)은 미국인 범죄자를 처벌하지 못한 문제를 일깨우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결국에는 진범이 한국으로 송환돼 처벌받게 한다. 인권영화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마지막 영화였던 < 1급기밀 >까지 사회적 문제에 영화로 부딪히는 것이 홍기선의 특징이었다.
장동홍은 "홍기선 감독이 심성이 여리고 인간관계도 좋았고, 따뜻한 분이었다"며 "그러나 영화만큼은 단호했다"고 평가했다. "비전향 장기수 이야기 <선택>을 타협 없이 밀어붙인 것에서 볼 수 있듯 사적인 관계에서는 부드러운데 영화만큼은 독하게 밀고 갔고, 그게 훌륭한 점이다"라고 말했다.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은 "선배가 아닌 형으로 남아있는 인물이 몇 안 되는데, 독립영화의 자산으로 영원히 남아있는 것이 홍기선 형이다"라며 "영화운동에서 홍기선 형을 존경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며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홍기선은 연출 외에 시나리오 작업이나 비평에도 능력을 발휘했다. 얄라성과 서울영화집단에서 함께했던 선배 김홍준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홍기선이 평론을 잘 썼다"고 회고했다. 1980년 전양준 강한섭 등과 함께 비평지 <프레임>을 발행했고, <영화 촬영술>이라는 번역서도 출간할 정도로 제작과 비평, 기술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오정옥은 "홍기선의 영화적 화두는 시대정신뿐만 아니라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도 있었다"면서 "그 삶이 행복하고 윤택한 생활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영화 인생으로는 자기 언어와 화두를 내려놓지 않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화감독이다"라고 강조했다.
홍기선은 <한국의 영화감독 13인>(이효인 저. 1994)에 실려 있는 인터뷰에서 '인간 사회가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영화는 할 일이 있는지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 <1급기밀> 촬영 현장에서의 홍기선 감독 |
ⓒ 미인픽쳐스 |
한국 영화운동의 발판을 놓았던 홍기선 감독은 < 1급기밀 > 촬영을 마친 직후인 2016년 12월 15일 타계한다. < 1급기밀 >은 유작이 됐다.
서울영상집단에서 홍기선과 활동했고, 수감 때 옥바라지를 했던 변재란은 "홍기선 감독은 우리에게 정말 특별한 사람이고, 그는 굽히지 않고 정말 끈질기게 자기 길을 걸어왔다. 그 길이 어땠는지는 필모그래피가 말해준다"며 "선배라는 이유로 '형은 대단한 사람이야', '우리에게 참 특별한 사람이야' 이런 말 한마디 못한 것이 그저 가슴이 아프고 마음을 저민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이정희는 "홍기선 감독의 삶이 남의 인생을 많이 바꿔 놓은 특징이 있고, 없는 길을 만들어서 간 사람이었다"며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이효인을 아꼈고, 이정하가 절필을 선언했을 때는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고 말했다.
삶과 영화가 일관됐던 고 홍기선 감독은 시대의 진정한 리얼리스트이자 거인으로 한국 영화운동의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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