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에서 영국 패션 대모로…‘창조적 괴짜’ 비비안 웨스트우드 별세

김선미 2022. 12. 30.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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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29일(현지시간) 8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AFP=연합뉴스


펑크 문화의 선구자, 반항의 아이콘, 끊임없이 저항하는 괴짜, 늙지 않는 창조자….
반세기 동안 수많은 수식어가 따랐지만 이름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했던 패션계 거장. 영국 출신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세계적인 명품으로 만든 그는 생의 끝자락에선 기후 위기와 사회 정의를 외쳤다.

29일(현지시간) BBC 등 외신은 웨스트우드가 영국 런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웨스트우드 측은 “그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일을 계속했다”고 전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패션쇼 후 모델과 런웨이에 선 모습. AP=연합뉴스


웨스트우드는 정식으로 패션 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어릴 적부터 옷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그는 1941년 재봉사·제화공으로 일했던 부모 아래서 태어났다. 57년 런던으로 이사하며 예술학교에 다녔는데, 이때 디자인에 눈을 떠 시장에서 산 중고 옷을 뜯어보며 재단법 등을 스스로 익혔다고 한다. 20대엔 자신의 웨딩드레스를 직접 디자인해 입었다.

가디언지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오른쪽)과 맬컴 맥라렌의 패션 역사를 조명했다. [가디언 캡쳐]


이혼 후 초등학교 교사로 살던 그는 30세가 되던 해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는다. 남자친구이자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인 맬컴 맥라렌과 ‘렛 잇 록(Let it rock)’이란 옷 가게를 열면서다. 거칠게 찢어진 바지, 금속 소재의 장식과 체인, 곳곳에 배치된 옷핀과 지퍼 등 도발적인 디자인으로 입소문을 탔다. 수많은 밴드 가수가 가게 단골이 됐고, 그의 디자인은 훗날 ‘펑크 룩’으로 불리며 시대적 반항을 상징하는 문화로 진화해 70년대를 관통했다. 가디언은 “그의 부티크는 펑크의 발상지이자 핵심 요소가 됐다”고 평했다.

81년 웨스트우드는 런던 패션위크에서 제삼 세계와 약탈을 주제로 한 ‘해적 콜렉션’을 공개하며 하이엔드 패션업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나날이 높아지는 명성에도 그는 규범을 뒤집는 날카로운 패션을 고수했다. 87년엔 코르셋을 옷 밖으로 드러내 여성 억압을 타파하자는 패션을 선보였고, 90년대엔 남녀가 함께 입는 ‘유니섹스’ 스타일에 주력했다. 그 공로를 인정 받아 90~91년 ‘올해의 영국 패션 디자이너’로 선정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조르지오 아르마니, 칼 라거펠트, 이브 생로랑 등과 함께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거물로 성장한 순간이었다”고 평했다.

2006년 웨스트우드가 훈장을 받은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스트리트 웨어(길거리 패션)로 시작한 그의 패션은 오뜨꾸튀르를 넘어 세계 패션산업의 선두주자가 됐다. 옷·액세서리·패션 잡화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그는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장(OBEㆍ92년), 2등급 작위급 훈장(DBEㆍ2006년)을 받았다. 2008년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사라 제시카 파커)부터 올해 빌보드 톱 가수 올리비아 로드리고(19)까지 수많은 연예인이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드레스를 입었다.

2020년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언 어산지의 미국 송환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모습. AFP=연합뉴스


2000년대 중반, 웨스트우드는 기후위기 등 사회·정치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15년 그가 셰일가스 개발을 추진한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총리의 관저에 탱크를 몰고 가 시위를 벌인 일화는 유명하다. 채식주의자였던 그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모피 소매 판매를 금지해달라며 영국 정부에 로비하기도 하고,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의 미국 송환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는 사망 직전까지 자신의 웹사이트에 기후 위기, 사회 정의에 대한 글을 올렸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오른쪽)과 남편 안드레아스 크론살러. 웨스트우드는 25세 연하인 크론살러와 30년 간 결혼생활을 했다. AFP=연합뉴스


웨스트우드는 오스트리아 빈의 미술 학교에서 만난 25살 연하 안드레아스 크론살러와 두 번째 결혼을 한 뒤 30년 동안 함께 살았다. 남편이자 디자이너 동료였던 크론살러는 “웨스트우드와 나는 항상 끝까지 함께 일했고, 앞으로도 마음으로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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