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도끼만행' 이틀 뒤 열린 남북회담서 '버럭'
정치 분야 제외…1970년대 적십자 회담록
통일부 "공개사업 정책화…내년에도 지속"
[아시아경제 장희준 기자] 1976년 8월20일. 한여름 날씨에도 판문점에 마주 앉은 남북 대표단 사이에는 차가운 긴장감이 흘렀다. 바로 이곳, 판문점 내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북한군이 도끼로 미군 장교 2명을 무참히 살해한 '도끼만행' 사건이 벌어진 지 불과 이틀 뒤였기 때문이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남측 대표였다. 그는 "귀측 경비장교의 살인명령에 의해 판문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쾅! 남측 대표의 말에 북측 대표는 주먹으로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이내 "집어치우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최고사령관 동지를 헐뜯는 반역적인 발언"이라고 분노했다.
평화를 위해 모인 적십자회담 자리에서도 남과 북은 격렬히 대치했다. 특히 남북의 공동 과제인 '이산가족'을 놓고서도 양측은 철저히 엇갈렸다. 북한은 40년 전에도 지금처럼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요구사항을 들이밀며 남(南) 탓을 하곤 했다. 통일부가 30일 공개한 '남북회담 사료'에 담긴 이야기다.
이번 사료는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진행된 남북 적십자회담 분야 문서, 총 3028쪽 분량이다. 그간 외부로 공개되지 않던 남북회담 사료가 일반 국민에게 공개된 건 지난 5월 시범 공개에 이어 두 번째다. 앞서 공개된 문서는 1970년대 초반 남북회담의 일부 내용이 담겼다.
이번 사료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이산가족' 문제를 놓고 선명하게 엇갈린 남과 북의 입장이다.
회담 초기 남북은 첫 번째 의제로 이산가족을 꼽았다.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마땅히 우선해야 할 문제이면서 양측이 접근하기에도 가장 쉬운 사안이라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사료에서 나타나는 남과 북의 입장을 보면, 1972년 8월부터 1977년 12월까지 5년에 걸쳐 39차례에 달하는 회담을 진행할수록 입장차가 더욱 짙어진다.
먼저 의제 1항 '주소 및 생사확인 사업'부터 남과 북은 충돌한다. 남측은 양측의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 적십자가 사업 수행을 주관하고 국제적십자에서 통용되는 공통 서식으로 '문건을 교환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반면, 북한은 '직접 왕래하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우리 측은 직접 왕래하는 방식에 적극적인 북한의 속내를 의심했다. 결국 '통일전선전술'의 차원으로 판단하고 거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과 북의 인원들이 오가는 상황에서 북한의 정치적 선전으로 혼란과 동요를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산가족 설정 범위'를 놓고서도 남과 북은 다른 곳을 바라봤다. 남측은 '상호관계와 혈연관계'를 확인해야 한다는 입장을 냈지만, 북한은 오로지 '본인의 호소'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한술 더 떠 북한은 의제 1항 사업을 실시할 때 "법률적·사회적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는 등 다소 정치적인 주장까지 내놨다. 이렇게 남북이 현격히 벌어진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면서 적십자 본회담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北, 40년 전에도 제멋대로
아울러 이번 사료에는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과 1974년 8·15 대통령 저격 사건(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1974년 남침용 땅굴 발견 사건, 1976년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등 국내외 주요 사건들을 놓고 남북이 공방을 벌인 내용도 담겼다.
당시 북한이 보인 태도는 낯설지 않다. 입맛에 따라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인도적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 적십자회담에서 한미연합훈련을 비난하고 이를 핑계 삼아 회담을 일방적으로 연기하는 등 지금처럼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북한은 또 제24차 실무회의에선 "남조선의 수많은 감옥 속에는 민주인사 김대중, 시인 김지하를 비롯한 수천, 수만에 달하는 무고한 시민들이 갖은 악형과 고문을 받으면서 철창 속에서 고생하고 있다"며 난데없이 남한의 인권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교착 상태에 빠진 본회담을 재개하는 본래의 목표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8년 3월20일로 예정된 제26차 실무회의를 하루 앞두고선 대외매체인 '평양방송'을 통해 한미연합훈련을 마구 비난했고, 이를 이유로 일방적인 실무회의 연기를 통보하기도 했다. 최근 한미연합훈련과 미 전략자산 전개를 핑계로 미사일 도발을 일삼는 북한의 행태가 40여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통일부 "사료 공개 본격화…대북정책 투명성"
정부는 앞으로도 이 같은 남북회담 사료 공개를 제도화·본격화할 방침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번 사료 공개는 통일부 훈령에 따라 회담 공개사업을 정책화하고 제도적으로 지속해 나간다는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도 국민의 알권리와 대북정책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남북회담 문서 공개를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지난 5월에 이어 이번에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과 관련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대북 접촉 등 정치 분야 내용은 비공개 처리됐다. 앞선 공개 당시 통일부는 해당 내용을 검토한 뒤 공개할 예정이라고 했었지만, 예비심사 등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비공개 결정이 난 것으로 전해졌다.
통일부 당국자는 "해당 분야는 검토와 추가 협의를 거쳐서 공개 범위를 좀 더 분명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어 일단 제외했다"며 "공개 시기를 특정하긴 어렵지만, 내년에 관련 절차가 마무리되면 바로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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