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방출까지? 드라마로 포장된 '골때녀'의 잔인함
[이준목 기자]
▲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의 한 장면 |
ⓒ SBS |
아나운서들로 구성된 'FC아나콘다'가 사상 첫 방출팀이라는 불명예 기록의 희생양이 됐다. 28일 방송된 SBS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73회에서는 'FC아나콘다'와 '원더우먼'의 챌린지리그 방출 대전이 그려졌다.
두 팀은 이날 최종전에서 리그 잔류와 방출을 놓고 벼랑 끝 승부를 펼쳤다. 불나방(2승1패, 골득실 +6)과 개벤져스(2승 1패, 골득실 –2)가 먼저 경기 일정을 모두 마친 가운데, 아나콘다가 1승 1패 골득실 0으로 3위, 원더우먼은 2패, 골득실 –4로 최하위를 기록 중이었다. 챌린지리그 최하위팀은 방출되어 '다음 시즌 출전정지'라는 페널티를 받게 되는 상황.
원더우먼은 마지막 경기에서 아나콘다를 무조건 2골 차 이상으로 이겨야만 리그에 남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반면 아나콘다는 지난 경기에서 개벤져스를 2-0으로 꺾고 창단 13개월 만에 감격의 첫 승을 거두며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아나콘다도 원더우먼전 결과에 따라 슈퍼리그 자동승격(7점차 이상 승리)에서 승강전 진출(승리), 방출(2점차 패배)까지 다양한 경우의 수가 모두 열려있어서 안심할 수 없었다.
독기를 품고 나온 원더우먼은 전반 시작 불과 1분 만에 코너킥 찬스에서 김희정의 패스를 이어받은 키썸의 중거리슛이 터지며 먼저 선제골을 뽑아냈다. 반격에 나선 아나콘다는 후반 1분 중원에서 치열한 볼경합이 이어지던 와중에 노윤주가 하프라인에 날린 장거리 슈팅이 원바운드를 거쳐 원더우먼 골키퍼 요니P를 뚫고 골망을 가르는 원더골로 동점을 만들어냈다. 원더우먼은 다시 2골을 더 뽑아내야 하는 위기에 처했다.
파상공세에 나선 원더우먼은 후반 5분 역습 상황에서 김가영의 일대일 돌파에 이은 마무리 골로 다시 2-1로 앞서나가며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그리고 종료 1분을 남겨놓고 홍자의 킥인으로 시작된 공격에서 에이미가 리턴을 연결해준 공을 쇄도한 홍자가 다시 이어받아 페널티박스 정면에서 오른발 슈팅을 시도했다.
▲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의 한 장면 |
ⓒ SBS |
다급해진 아나콘다는 만회골을 넣기 위하여 공세로 나섰지만 세트피스 찬스에서 노윤주가 날린 회심의 슈팅이 간발의 차이로 골포스트를 강타하고 튀어나왔다. 마지막 공격찬스에서 주장 윤태진의 프리킥마저 골망을 벗어나며 종료휘슬이 울렸다. 벼랑 끝 위기에서 탈출한 원더우먼은 3위로 극적인 챌린지 잔류에 성공했고, 아나콘다는 최하위로 방출이 확정됐다.
기적을 써낸 원더우먼은 하석주 감독과 선수들이 얼싸안고 함께 눈시울을 붉히며 극적인 승리를 자축했다. 하석주 감독은 "이런 승부는 처음 봤다"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아나콘다는 믿기 힘든 패배와 방출이라는 결과를 받아 들고 충격에 빠졌다. 조재진 아나콘다 감독은 "이게 축구다. 결과는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결과의 책임은 감독이 지는 것"이라며 담담하게 선수들을 다독였다. 윤태진은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적도 많았고 실제로 그만두겠다고 한 적도 있다. 다들 잘 버텨줘서 고맙다. 잘했다.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주시은은 "이렇게 우리처럼 희로애락을 극단적으로 경험한 팀이 또 있을까 싶다. 1승도 해봤고 나름의 족적과 발자취를 남기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고, 맏언니 오정연은 "저희 아나콘다는 정체성이 뚜렷한 팀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성장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방출이라는 경험도 저희가 1승을 했을 때처럼 더 큰 기쁨으로 돌아올 수 있는 날을 기대하겠다"며 재기를 다짐했다. 올해 마지막 방송을 마친 <골때녀>는 새해인 다음 주 액셔니스타와 구척장신의 슈퍼리그 준결승전을 예고했다.
지난 2021년 파일럿으로 방송을 시작한 <골때녀>는 정규 편성을 거쳐 2년째 SBS의 간판 예능으로 자리 잡았다. 경기 편집과 조작 논란이라는 악재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팀스포츠 예능'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시청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 17일 방송된 < SBS 연예대상 >에서는 단일 프로그램으로는 최다인 9관왕을 휩쓸기도 했다.
▲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의 한 장면 |
ⓒ SBS |
예능도 리얼리티와 감동을 강조하는 최근의 추세를 감안할 때 스포츠를 진지하게 접근하겠다는 취지는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극적인 연출을 위해 출연자들을 압박하고 가혹한 환경으로 몰아넣으려는 구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출연자들은 어디까지나 전문 스포츠 선수가 아닌, 연예인이자 일반인이다. 승부차기와 승강제도 모자라 방출이라는 잔인한 규정을 잇달아 신설해, 매 경기 승부에 대한 부담감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구조를 감동적인 연출로 포장하려는 것은 부작용이 너무 많다. 승부에 대한 부담이 커지다 보면 선수들이 축구의 즐거움을 느끼기보다는 결과에 대한 압박에 쫓기게 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신체 접촉이 많은 축구라는 종목의 특성상, 경기가 격렬하고 치열해지면서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부상의 위험도 높아진다.
<골때녀>는 시즌을 거듭하면서 이미 많은 출연자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심지어 수술대까지 오른 출연자들도 있었다. 이번 시즌만 해도 국대패밀리의 전미라는 경기 중 부상을 당하며 들것에 실려나갔고, 아나콘다 주시은은 최종전에서 피로골절이 악화되어 벤치로 물러나야 했다.
28일 방송분에서도 방출전에 몰입한 선수들이 무리해서 몸을 날리는 허슬플레이를 펼치느라, 곳곳에서 충돌하는 아찔한 장면들이 연출됐다. 방송 2년을 넘기며 규모는 커졌지만 정작 팀별 가용자원을 늘린다든가, 자유로운 선수 이동이 가능하게 하는 등 출연자의 부담을 줄여주고 '경기의 질'을 더 향상시키려는 노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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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기마다 출연자들이 결과에 일비일희하여 눈물을 쏟아내거나 부담감을 호소하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됐다. 그리고 <골때녀>는 출연자들이 받는 스트레스나 부상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아름다운 전쟁', '극장 승부', '부상 투혼' 등으로 포장하며 자극적인 경쟁을 더욱 부추기는 데만 급급한 모양새다.
시청자들 역시 반복되는 그림과 과열되는 경쟁구도에 차츰 피로감을 드러내고 있다. 한때 두 자릿수 시청률을 넘보던 <골때녀>는 최근 하락세가 뚜렷하다. 지난 28일 방송분은 사상 첫 방출전이라는 흥미진진한 구도에도 불구하고 5.7%의 시청률(닐슨코리아 전국 기준)을 기록하며 지난주의 6.4% 보다 더 하락했다.
본래 여성들의 팀 스포츠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진지함을 매력포인트 삼아 성장했던 <골때녀>는 갈수록 도를 지나친 승부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출연자들을 한계에 몰아넣는 위험한 프로그램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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