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70>] 긴급체포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70화 긴급체포
박미옥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상경하여 김석규가 긴급 체포된 중앙지검으로 달려갔다. 임봉식의 승용차에 방선희와 함께 타고 온 것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검찰청사 정문 앞에는 곤봉과 방패를 든 경찰병력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고 야당 국회의원과 당직자, 시민사회단체 대표와 회원들이 길을 열어달라며 항의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그들 속에 섞여있는 이철백을 찾아갔다. 이철백은 계속된 항의에 지치고 목쉰 상태였다.
“면회도 허용하지 않아요.”
이철백이 아스팔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풀이 죽은 채 말했다. 방선희가 얼른 다가가 이철백을 일으켜 세웠다.
“긴급체포 사유는 뭐래요?”
“유언비어 유포라네요.”
“뭐가 유언비어라는데요?”
“석규의 책 내용과 어제 토론에서 발언한 내용을 이것저것 갖다 붙였어요.”
박미옥이 생기 잃은 목청으로 질문하자 이철백 역시 힘없이 대꾸했다.
“면회도 안 시켜주는 이유는 뭔데?”
임봉식이 짐짓 큰 소리로 물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무조건 안 된대. 국회의원이고 뭐고 다 필요 없대.”
“그럼 가족도?”
“미옥 씨 올라온다는 연락 받고 면회 신청했더니 역시 안 된대.”
“이 새끼들 진짜 심하네!”
임봉식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동지 여러분!”
경찰병력의 바리케이드 앞에서 마흔 쯤 되어 보이는 장년의 남성이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아스팔트에 쪼그리고 앉은 사람, 먼 산을 보며 담배 피는 사람, 삼삼오오 대화하는 사람들이 남성을 주목했다.
“조금 있으면 시청광장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립니다. 동지 여러분, 각자 차편을 이용해 시청광장으로 이동하시기 전에 김석규 동지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구호 제창이 있겠습니다. 금주투쟁 정당하다, 김석규를 석방하라!”
“금주투쟁 정당하다, 김석규를 석방하라!”
남성이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내지르며 소리치자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구호를 제창했다. 남성이 다시 구호를 선창했다.
“불법체포 자행하는 공안검찰 각성하라!”
“불법체포 자행하는 공안검찰 각성하라!”
사람들의 제창에 고무되어 박미옥도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시청광장엔 대형무대에서 비춰지는 조명등으로 대낮을 방불했다. 무대에선 운동가요를 부르는 노래패와 율동을 하는 몸짓패가 집회 참가자들의 전의를 북돋우고 있었다. 박미옥 일행은 광장 한쪽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김석규의 농성천막을 둘러보고는 당직자의 안내를 받아 무대 앞쪽으로 걸어갔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박미옥은 대학 때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억을 더듬어 함께 불렀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마그마처럼 꿈틀거리며 솟아올랐다. 이윽고 민중의례가 끝나고 야당 대표가 단상에 올랐다.
“이게 국가입니까? 국민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술 좀 마시지 말자고 했다가 긴급 체포된 동지가 있습니다. 술 좀 덜 마시자, 적게 마시자, 마시지 말자. 이런 말 가족이라면, 친한 친구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니, 해야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 한다고 잡아갔습니다. 김석규 동지가 오늘 아침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옳은 소리했다고 잡아가뒀습니다. 이게 민주국가입니까? 지금이 이승만 땝니까, 박정희 땝니까, 전두환 땝니까. 금주 좀 하자는 당연한 소리가 뭐 잘못됐습니까!”
야당 대표의 포효에 집회 참가자들이 “아니오!”라고 크게 외쳤다.
“사람들이 술을 덜 마시니까 경기가 안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경기 좀 안 좋으면 어떻습니까. 술 안 마셔서 국민들 건강해졌으면 된 거 아닙니까?”
“옳소!”
“경기 안 좋아지니까 금주운동을 주도한 김석규 동지를 체포했는데, 그럼 국민들더러 건강이고 뭐고 생각하지 말고 술을 많이 마시라는 겁니까? 이게 국민을 위한다는 국가 맞습니까!”
“아니오!”
“이 놈의 정권,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3일전에 김석규 동지를 잡아간 것은 과연 뭐 때문이겠습니까. 우리 동지들의 결집이 느슨해질 거라고 저들은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동지들, 추석 연휴라고 해서 투쟁을 게을리 할 수 있습니까?”
“아니오!”
“금주투쟁을 위해, 김석규 동지의 석방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수 있죠?”
“투쟁!”
야당 대표의 우렁찬 독려에 집회 참가자들이 투쟁 구호로 화답했고 서너 차례의 ‘투쟁’ 구호 인사가 오고간 후 야당 대표가 단상을 내려왔다. 그리고 재야인사들과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의 투쟁사가 조금 지루할 정도로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집회 참가자들의 행진이 남아있었다. 애초 청와대까지 행진하는 것으로 신고했으나 경찰에서 안전을 이유로 거부했기 때문에 부득불 광화문까지 진출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앞서 단상에서 발언한 인사들이 현수막을 든 채 행진 대열의 선두에 섰다.
시청광장을 벗어나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아스팔트 도로를 가득 메워서 행진을 시작한 집회 인파는 코리아나 호텔 부근에서부터 경찰 차벽에 가로막혔다. 집회 참가자들은 평화적인 행진조차 허용하지 않는 경찰의 행태에 강하게 항의했다. 경찰은 참가자들의 정당한 항의에도 꿈쩍하지 않다가 일부 사람들의 과격한 행동을 빌미로 물대포와 최루액을 난사했다. 대열의 중간쯤에 있던 집회 참가자들은 대부분 경찰의 강경 대응에 혼비백산하여 흩어졌고 대열의 앞쪽을 차지하고 있던 지도부와 핵심들만이 경찰과 대치했다.
대열의 후미에 위치한 박미옥과 방선희는 아직 시청광장에 머물러 있었다. 두 사람은 경찰의 첫 번째 공격 때 대열에서 빠져 나와 프레스센터 쪽 인도로 올라서는 사람들을 보며 간담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까지 그들이 행진하던 차도엔 폭탄을 맞은 것처럼 현수막, 피켓, 전단지 등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대열의 중간이 썰물처럼 쓸려 나간 것과는 반대로 대열의 선두는 경찰과 대치하면서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상황이 예사롭지 않게 전개되자 박미옥과 방선희는 대열의 앞쪽으로 간 임봉식과 이철백이 걱정되어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마 경찰과 대치중인 대열에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인도를 따라 대열의 앞쪽으로 다가갔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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