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아이콘’ 영국 패션 거장 비비안 웨스트우드 별세

이가현 2022. 12. 3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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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패션 거장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29일(현지시간) 별세했다.

웨스트우드는 1941년 4월 8일 영국 중부 더비셔주 글로솝에서 '비비안 이사벨 스와이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웨스트우드와 맥라렌은 1970년대 런던에 '렛 잇 록(Let it rock)'이라는 매장을 열고 주류 문화에 저항적인 패션을 선보이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웨스트우드의 대변인에 따르면 유족들이 설립한 비영리법인 '비비안 재단'이 내년 정식 출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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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웨스트우드. AFP연합뉴스


영국의 패션 거장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29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81세. 그는 ‘펑크의 여왕’으로 불리며 거친 저항 문화의 아이콘으로 패션계를 주도했다.

로이터통신·CNN 등 외신에 따르면 웨스트우드는 이날 런던 남부에 있는 자택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며 웨스트우드 측의 공식 성명을 인용 보도했다.

그는 ‘펑크의 여성 제사장’, ‘극단의 여왕’으로 불리며 마지막까지 패션 산업의 경계를 허물며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CNN은 평가했다.

웨스트우드는 1941년 4월 8일 영국 중부 더비셔주 글로솝에서 ‘비비안 이사벨 스와이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면직공장과 제화공장에서 일한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옷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10대가 되어서는 부모를 따라 북런던으로 이주해 예술학교에 입학해 보석 제작과 은세공을 배웠다. 이후 성인이 돼서는 교사로 일하며 첫 번째 남편 데릭 웨스트우드를 만나 직접 만든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아들 하나를 두고 첫 남편과 이혼한 웨스트우드는 홀로 아이를 키우며 런던 포토벨로에서 보석류를 팔아 생계를 책임졌다. 그러던 중 1965년 후일에 펑크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가 되는 미술학도 맬컴 맥라렌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웨스트우드의 인생은 새로운 변곡점을 맞게 된다.

웨스트우드와 맥라렌은 1970년대 런던에 ‘렛 잇 록(Let it rock)'이라는 매장을 열고 주류 문화에 저항적인 패션을 선보이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부분 부분 찢어지거나 금속체인, 지퍼, 닭 뼈 따위가 달린 옷을 선보였고, 특히 영국 여왕의 입술에 큰 옷핀이 달린 이미지가 프린트된 티셔츠는 널리 알려졌다.

웨스트우드는 전기에서 “나와 맬컴 이전에는 펑크가 없었다”며 “펑크에 대해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완전한 폭발’이었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웨스트우드는 사회·정치적인 의견을 거침없이 밝혔고, 이를 행동으로 실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핵 군축과 반전을 옹호했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타격을 주는 여러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패션쇼에 서는 모델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담은 팻말을 들게 하기도 했다.

웨스트우드의 대변인에 따르면 유족들이 설립한 비영리법인 ‘비비안 재단’이 내년 정식 출범한다. 이 재단은 “비비안의 삶과 디자인, 행동주의 유산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지속할 것”이라고 대변인은 밝혔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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