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이산가족 논의서 "국보법 폐지" 요구…땅굴 등에도 '적반하장' 억지

강태화 2022. 12. 30.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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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1970년대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문제를 논의하는 적십자회담에서까지 국가보안법ㆍ반공법 등 한국 국내법의 폐지를 노골적으로 요구했던 사실이 재확인됐다.

남북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제안하는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위 사진)와 남북적십자 쌍방 파견원의 첫인사. 연합뉴스


통일부가 30일 공개한 남북대화 사료집에 따르면 남북은 1972년 8월부터 73년 7월까지 11개월간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7차례에 걸쳐 남북적십자 본회담을 진행했다.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최초로 쌍방지역에서 개최됐던 1ㆍ2차 회담까지는 7ㆍ4 남북공동성명 정신, 동포애, 적십자의 인도주의 원칙 등을 철저히 구현한다고 합의하는 등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다 평양에서의 3차 본회담(72년 10월 24일)부터 불협화음이 노출됐다. 국제적십자사의 원칙에 따른 주소지ㆍ생사확인 등을 제안한 한국에 대해 북한이 돌연 “남한의 법률적ㆍ사회적 환경 개선”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6차 회담(73년 5월 9일)에선 아예 “반공법ㆍ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며 노골적 내정간섭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남북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제안하는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위 사진)와 남북적십자 쌍방 파견원의 첫인사. 연합뉴스

당시 북측 단장이던 김태희 조선적십자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은 “사상, 이념, 제도를 달리하는 사람들과 접촉하고 연계를 가지거나 남북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처벌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현행 법규들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한국측 대표였던 이범석 당시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는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사상적 성격을 지닌 논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적십자 기본원칙에 정반대의 흐름”이라고 지적했지만, 본회의는 7차 회의(73년 7월 11일)에서 국보법ㆍ반공법 폐지를 공동성명으로 채택하자는 북한의 억지 주장에 막혀 결국 중단됐다.

북한의 일방적 본회의 중단 선언 이후 정부는 77년 12월까지 본회의 재개를 위한 7차례의 판문점 적십자 대표회의와 25차례의 실무회의를 이어갔지만, 북한은 여전히 국보법 폐지 등을 본회의 재개의 조건으로 내걸면서 논의는 진전되지 않았다. 그러다 78년 3월 예정됐던 26차 실무회의 바로 전날 통상적인 한ㆍ미훈련을 비난하며 회의 연기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면서 실무논의까지 중단시켰다.

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발생한 도끼만행 사건. 북한군에 쫓긴 이 미군 장교는 결국 도끼에 맞아 현장에서 피살됐다.


특히 실무회담 과정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 미수 사건(74년 8월 15일), 남침용 땅굴 사건(75년ㆍ1978년), 도끼만행사건(76년 8월 18일) 등 북한의 극단적 도발이 잇따랐다. 그런데 북한은 그 때마다 오히려 막말을 퍼부으며 적반하장식 태도로 일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남측은 박 전 대통령 암살 미수의 범인으로 지목된 재일동포 문세광이 친북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자금을 받는 등 북한의 배후를 문제삼았다. 그러자 북측은 “이 사건들은 남측 파쇼 분자들이, 매국노들이 일으킨 고의적 무장도발”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이 남침을 위해 건설한 콘크리트 터널.


땅굴 도발에 대해선 남측이 “북한의 호전분자, 맹동분자들은 이 같은 땅굴들을 무엇에다 쓰려고 파는 것이냐”고 지적하자 북한은 “닥치시오. 회담을 하겠으면 그따위 발언은 닥치시오”라며 “거, 좋은 기술이외다. 어째 청와대 밑에 있는 땅굴에 대해서는 말 안하오. 우리가 팠소? 뻔뻔하다”고 했다.

도끼만행 사건에 대해서도 북측 대표는 책상을 치며 “집어치우라”고 고성을 지른 후 “우리 최고사령관 동지의 명령을 헐뜯는 민족반역적인 발언에 대해 엄중히 규탄한다”, “망언을 고의적으로 늘어놓았다”는 등의 표현을 써가며 반발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제2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 마지막 날 북측 가족들이 금강산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먼저 떠나며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결국 이산가족 상봉은 85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성사됐다. 그마저도 1회성 상봉에 그쳤고, 본격적인 상봉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6ㆍ15 남북정상회담 이후부터 이뤄졌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때 지속됐던 이산가족상봉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또다시 중단됐다가,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에 재개되는 등 정치상황과 맞물려 중단과 재개를 거듭했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에 합의하며 그해 8월 21차 상봉에 응했지만, 2019년 2월 이른바 ‘하노이 노딜’로 북핵협상이 멈춰서자 이산가족상봉까지 중단된 상태다.

2018년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 2회차 첫 날인 8월 24일 오후 금강산 면회소에서 열린 단체상봉에서 남측 강두리(오른쪽) 씨가 북에서 온 언니 강호례 씨와 얼싸안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정부는 ‘담대한 구상’을 제안하며 방역ㆍ수해ㆍ이산가족 협력 등 다각적 협력을 공개 요청했지만, 북한은 아예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 8월엔 마지막 21차 상봉이 이뤄졌던 금강산 관광지구 내 이산가족면회소를 철거한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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