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자의 도리를 일깨우는 구례 오미마을

이돈삼 2022. 12. 30.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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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더 훈훈하고 빛나는 여행지

[이돈삼 기자]

 구례 운조루의 행랑채 전경. 집 밖에서 본 모습이다.
ⓒ 이돈삼
 
온정과 나눔, 배려가 필요한 겨울에 더욱 빛나는 마을이 있다. 우리에게 가진 자의 도리를 일깨우는 본보기가 된 곳이다. 옛집 운조루(雲鳥樓)가 있는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마을이다. 운조루의 안채를 다 뜯어내고 다시 짓는 공사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연말연시에 꼭 가봐야 할 곳이다.

"그동안 조금씩 기운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대로 뒀다가는 붕괴 위험까지 있다고 해서, 해체하고 다시 짓고 있습니다. 기존의 건축재료도 최대한 다시 써서, 옛 모습을 살리기로 했어요. 복원 공사는 7∼8월까지 끝낸다고 합니다."

곽영숙씨의 말이다. 곽 씨는 운조루의 주인인 문화류씨 곤산군파 귀만와 종가의 10대 종부다. 지금은 운조루 옆 한옥마을에서 살고 있다. '운조루 막둥이네 집'이 그곳이다. 곽씨는 구례문화관광해설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운조루의 안채 자리. 기존의 건축물을 다 뜯어냈다.
ⓒ 이돈삼
  
 운조루의 안채 전경. 건축물을 해체하기 전의 모습이다.
ⓒ 이돈삼
 
운조루는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가 1776년에 지었다. 7년 남짓 걸린 큰 공사였다. 류이주는 남한산성 보수와 함흥성 축조 등 대규모 건축에 참여한 벼슬아치 출신이었다. 운조루는 본디 99칸이었다. 잡귀를 막는다고, 대문에 호랑이와 말의 뼈를 걸었다.

집 앞에 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섬도 만들었다. 1800년대에 그려진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를 통해 운조루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오미동가도는 운조루유물전시관에 전시돼 있다.

운조루는 지금 60여 칸 남아 있다. 크게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으로 이뤄져 있다. 안채는 여성들의 생활공간이다. 대문을 들어서서 만나는 사랑채는 남성들의 몫이다. 집의 품격을 높여준다.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운조루 막둥이네 집. 10대 종부인 곽영숙 씨 부부가 살면서 민박손님을 받고 있다.
ⓒ 이돈삼
  
 타인능해(他人能解)가 새겨진 운조루의 쌀독. 운조루 유물전시관에서 만난다.
ⓒ 이돈삼
 
운조루는 옛집의 아름다움 못지않게 나눔과 베풂, 요즘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의 본보기가 됐다. 그 상징이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새겨진 뒤주, 쌀독이다. 옛날에 뒤주는 집안 깊숙한 곳에 뒀다.

하지만 운조루의 뒤주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뒀다.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뒤주다. 뒤주에다 '他人能解'라고 썼다. 다른 사람도 열 수 있고, 누구라도 쌀을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뜻이다.

류이주는 뒤주에 해마다 30가마 넘는 쌀을 채웠다. 한해 수확량의 2할이나 됐다. 주인이 쌀을 퍼주지도 않았다. 쌀을 가져가는 사람의 자존심까지 배려했다. 마을사람들도 운조루 뒤주의 쌀을 믿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양보했다.

운조루의 대문에 문턱도 없다. 옛집은 일반적으로 문턱이 높다. 문을 낮게 만들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도록 한 집도 있다. 그러나 운조루는 누구라도 쉽게 드나들도록 문턱을 만들지 않았다.

운조루에는 높은 굴뚝도 없다. 대신, 건물 아래로 연기가 빠지도록 했다. 연기가 굴뚝으로 빠지지 않는 탓에 집안 사람들이 고생하겠지만, 양반집에서 밥을 짓는다고 연기를 피우지 않기 위해서다. 가난한 이웃을 위한 배려였다.
  
 운조루의 중사랑채와 큰사랑채. 남성들의 공간으로 옛집의 권위와 품격을 보여준다.
ⓒ 이돈삼
  
 오미리 삼림욕장. 마을을 찾는 방문객들의 힐링과 치유의 공간이다.
ⓒ 이돈삼
 
류이주 등 선조들의 마음 씀씀이는 후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도 마을과 이웃에 크고 작은 기부를 하며 살았다. 동학농민전쟁 때에도 집안이 온전했던 이유다.

일제강점기엔 토지조사 사업으로 대부분의 토지를 빼앗겼다. 집안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때엔 운조루가 빨치산의 거점으로 쓰이기도 했다. 종손이 좌익으로 몰려 군경에 끌려갔다. 이념과 계급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창과 칼을 들이대던 소용돌이에서 희생양이 됐다. 집이 보존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유물전시관에서 운조루 집안 사람들의 마음새를 엿볼 수 있다. '他人能解'가 새겨진 뒤주도 여기에서 만난다.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온 문화 류씨의 역사와 삶도 전시돼 있다.

오미마을에 옛집 곡전재(穀田齊)도 있다. 타원 형태의 담장이 유난히 높다. 높이가 2.5m에 이른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때엔 주민들의 피난처로 쓰였다. 높은 담장 덕분이다. 곡전재는 하룻밤 묵으며 고택을 체험할 수 있는 집이다. 아무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이 언제라도 열려 있다.
  
 담장이 유난히 높은 곡전재. 그러나 아무라도 드나들 수 있도록 늘 대문이 열려 있다.
ⓒ 이돈삼
  
 곡전재 풍경. 여행객이 하룻밤 묵으며 고택을 체험할 수 있다.
ⓒ 이돈삼
 
오미마을은 류이주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한다. 마을 이름이 오미동(五美洞)이었다. 월명산, 지리산, 오봉산, 계족산, 섬진강 등 다섯 가지가 아름답다고 이름 붙었다.

마을의 안산인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으로 둘러싸인 산이 다섯 별자리가 되어 길하고, 물과 샘이 풍부하고, 풍토가 윤택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1789년 류제양이 쓴 <오미동려사(五美洞閭史)>에 오미마을의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 나와 있다.

오미마을은 명당 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형이 배산임수 그대로다. 지리산과 형제봉이 마을을 감싸고, 넓은 들판 너머로 섬진강이 흐른다. '한국의 풍수'에는 오미동에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구몰니(金龜沒泥) 오보교취(五寶交聚)가 있는데,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적혀 있다.

금환락지는 미녀가 금가락지를 빼놓은 곳, 금구몰니는 영물인 금거북이 묻힌 땅, 오보교취는 다섯 가지 보물이 쌓인 곳을 가리킨다. 오미마을은 금가락지가 떨어진 곳이라고 금환동(金環洞)으로도 불렸다.

금환락지의 유래도 전한다. 토지면과 마산면 사이 형제봉에 신선과 선녀가 내려와 놀던 신선대가 있었다. 한 선녀가 금가락지를 땅으로 떨어뜨렸는데, 찾지 못했다. 그 가락지가 떨어진 자리라는 것이다.
  
 운조루의 담장 옆으로 난 마을길. 소나무 우거진 뒷산으로 가는 길이다.
ⓒ 이돈삼
  
 오미마을 앞으로 펼쳐지는 넓은 들. 토지가 비옥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 이돈삼
 
오미마을은 뒤편으로 지리산 노고단이 둘러싸고, 앞으로는 계천들이 만든 평야가 드넓다. 들 너머로 섬진강이 서쪽에서 동으로 흐른다. 토지가 비옥했다. 주민들의 인심도 넉넉했다.

오미마을에는 지금 40가구 100여 명이 살고 있다. 녹색농촌체험마을, 농협 팜스테이마을, 한옥행복마을로 지정돼 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로와 지리산 둘레길 3코스(오미-방광, 12.3㎞)가 마을 앞을 지난다. 운조루 뒷산은 산림욕장으로 쓰인다. 힐링과 치유의 공간으로 좋다고 도시민들의 귀촌 1순위로 꼽히고 있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절대 부유층과 빈곤층이 늘고 있다. 운조루와 오미마을 사람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요즘이다. 운조루도 스스로 구름을 나는 새가 되어 하늘로 날기를 빈다.
  
 오미 한옥마을 풍경. 운조루 옆에 단지를 이루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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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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