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황제' 펠레, 암 투병끝 별세…"편히 잠드세요" 딸 임종 지켰다
'축구황제' 펠레(브라질)가 대장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29일(현지시간) 브라질 상파울루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82세.
펠레의 딸 케릴 나시멘투는 30일(한국시간) 소셜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편히 잠드세요"라는 애도 메시지와 함께 아버지 펠레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펠레는 지난해 9월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종양 제거 수술 후 화학 치료를 받으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그러다 심부전증과 전신 부종 그리고 정신 착란 등 합병증이 찾아왔다. 결국 지난달 29일부터 브라질 상파울루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병원에 재입원했다. 코로나19에 따른 호흡기 증상도 치료도 병행했다. 이 무렵 항암 치료를 포기하고 완화 치료로 전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완화 치료는 심각한 말기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를 위한 고통 완화 단계다.
하지만 펠레의 가족은 지난 4일 "코로나19로 호흡기 상태가 악화해 입원한 것으로 위독한 상황은 아니다"라며 펠레의 건강 악화설을 부인했다. 병원 측도 "펠레는 의식이 있는 안정적인 상태로 새로운 합병증은 없다"고 발표했다. 이달 중순 펠레의 건강 상태가 호전 소식이 전해졌다. 영국 데일리 메일은 지난 12일 "(펠레의 담당) 의료진에 따르면 펠레의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고 전하면서 축구 팬들은 한숨 돌렸다.
안도도 잠시, 의료진은 지난 21일 갑작스럽게 성명을 내고 "펠레의 암이 더 진행된 것으로 파악된다. 심장, 신장 기능 장애와 관련해 더 많은 치료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펠레의 가족들이 병원으로 모였다. 펠레의 아들인 이드송 숄비 나시멘투는 지난 24일 펠레를 찾았다. 그는 소셜미디어(SNS)에 아버지 펠레의 손을 잡은 사진을 올렸다. 펠레의 딸 켈리 나시멘투는 앞서 자매인 플라비아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와 함께 아버지의 병실을 지키는 사진을 공개했다. 펠레를 끌어안은 켈리는 "우리는 믿음으로 이 싸움을 계속한다. 함께 하룻밤을 더"라며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가족의 응원에도 펠레는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끝내 눈을 감았다.
축구의 대명사, 유일한 월드컵 3회 우승 레전드
펠레는 축구 그 자체였다. 세계적인 스타이자, 대명사로 통했다. 특급 공격수 펠레는 브라질을 세 차례나 월드컵 정상으로 이끌었다. 만 17세의 나이로 출전한 1958 스웨덴월드컵에서 6골을 폭발하며 고국에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프랑스와의 준결승에서 해트트릭을 작성했고,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도 두 골을 터뜨렸다. 1962 칠레월드컵과 1970 멕시코월드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세계 축구사에서 세 차례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선수는 펠레가 유일하다. SNS 팔로워만 1000만 명이 넘을 만큼 세월이 흘러도 큰 사랑을 받은 스타였다. 펠레의 본명은 에드손 아란테스 두 나시멘투다. 펠레는 어린 시절 별명이다. 나시멘투라는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워 생긴 애칭이다.
패스의 가치를 중시한 무결점 골잡이
키 1m73㎝, 몸무게 73㎏의 펠레는 무결점 골잡이로 통했다. 빠른 드리블과 뛰어난 골 결정력은 물론 정확한 패스 능력까지 겸비했다. 골잡이가 패스를 잘한다는 건 의미가 크다. 축구에선 동료를 돕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라운드에서 축구 이상의 가치를 중시한 인물로 평가됐다. 큰 키는 아니었지만, 제공권도 뛰어났다. 타고난 점프력으로 날카로운 헤딩골을 자주 터뜨렸다.
펠레는 현역 시절 21년간 1363경기에 출전해 1281골을 터뜨렸다. 국가대표팀에서도 91경기에서 77골을 넣었다. 브라질 역대 최다골 공동 1위(네이마르) 기록이다. 월드컵은 네 차례 출전해 14경기에서 12골을 터뜨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펠레를 축구를 넘어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로 뽑았다. 당시 2위에 선정된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미국)은 "펠레라면 기꺼이 농구 황제보다 위대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축구 룰 바꾼 '오버헤드킥의 시초'
펠레는 오버헤드킥의 원조다. 1968년 브라질과 벨기에의 친선경기 중 펠레는 왼쪽에서 날아온 공을 골대를 등진 채 뛰어올라 오른발 오버헤드킥으로 벨기에 골망을 흔들었다. 이전까지 거의 볼 수 없었던 오버헤드킥을 사실상 세계에 처음 알린 순간이다. 오버헤드킥은 현대 축구에서 보기 드문 최고 수준의 슈팅 기술이다. 펠레 덕분에 축구의 룰도 바뀌었다. 1966 잉글랜드월드컵에 나선 펠레는 상대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브라질은 1958년과 1962년 연달아 우승한 팀이었고, 펠레가 핵심 선수였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축구 규칙엔 교체가 없었다. 부상을 당해도 선수는 고통을 참고 경기를 계속 뛰거나, 그라운드를 떠나 쉬어야 했다. 선수가 빠진다고 충원을 할 순 없었다. 선수가 모자란 팀은 수적 열세 속에서 경기를 마무리해야 했다. 현대 축구에선 불가능한 일명 '에이스 제거' 작전도 가동될 수 있었다. 이 대회에서 펠레는 상대의 숱한 '살인 태클'의 희생양이 됐다. 결국 1970년 월드컵부터 레드카드와 교체 제도가 도입됐다.
에이스 상징 '등번호 10번'의 원조
펠레는 에이스의 상징인 '등번호 10번'의 원조다. 축구 경기에서 등번호를 다는 건 1924년 미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당시 등번호는 포지션별로 부여되는 자동 표식이었다. 1번이 골키퍼, 2~5번이 수비수, 6~8번은 미드필더, 9~11번이 공격수에게 부여되는 게 관례였다. 등번호는 월드컵에서는 1954 스위스 대회에서 처음 도입됐는데, 이 대회를 앞두고 FIFA는 각국 협회에서 선수 등번호를 임의로 정하도록 제도를 바꿨다. 그런데 브라질축구협회는 이 절차를 잊었다. 결국 당시 등번호 배정을 담당했던 우루과이 출신 국제축구연맹(FIFA) 직원이 펠레에게 10번을 줬다.
펠레는 등번호 10번을 달고 브라질에 세 차례 월드컵 우승을 안겼다. 이때부터 '10번'은 최고의 선수를 의미하게 됐다. 1986 멕시코월드컵에서 원맨쇼를 펼치며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끈 디에고 마라도나, 1998 프랑스월드컵에서 아트사커 시대의 막을 올렸던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 역시 10번의 화려한 계보를 이었다.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도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 네이마르(브라질), 루카 모드리치(크로아티아) 등 수퍼스타들이 펠레가 달았던 10번을 달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병상에서도 네이마르·브라질 응원
펠레는 마지막 순간까지 병상에 누워 브라질 축구와 후배들을 응원했다. 펠레는 2022 카타르월드컵 초반인 지난달 트위터에 "병원에서 TV로 경기를 보며 (브라질) 대표팀을 응원하고 있다. 우승 트로피를 가져오라"고 썼다. 펠레는 이번 대회 개막 전 SNS에 "내가 지나치게 자신감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브라질이 다시 우승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FIFA 랭킹 1위 브라질 대표팀도 대선배인 펠레에게 우승을 선물하겠다는 각오로 똘똘 뭉쳤다. 브라질의 에이스 네이마르는 카타르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을 4-1로 꺾은 뒤, 커다란 현수막을 펼쳤다. 현수막에는 펠레(Pelé)의 이름과 사진이 담겨 있었다. 브라질 관중들은 경기 중 펠레의 사진과 '쾌차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대형 현수막을 흔들었다. 개최국 카타르 수도 오하의 300m 높이의 고층 호텔 '토치 타워'에 펠레의 사진과 함께 쾌유를 비는 메시지가 전시됐다. 안타깝게도 브라질은 8강에서 크로아티아에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승패는 맞히지 못한 '축구황제'
펠레는 월드컵 등 주요 국제대회마다 팬들에게 큰 웃음도 선물했다. 축구를 가장 잘했다고 해서 누가 이길지 맞히는 것까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팬들은 이를 두고 '펠레의 저주'라고 불렀다. 펠레는 1974년 월드컵부터 우승후보를 서너 팀씩 꼽았지만, 그가 점찍은 팀은 번번이 탈락했다는 징크스다. 펠레는 1966 잉글랜드월드컵을 앞두고 브라질의 우승을 예상했지만,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2014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도 펠레는 브라질의 우승을 예상했다. 그는 행여 부정탈까봐 조추첨식까지 불참했다. 하지만 브라질은 4강에서 독일에 1-7로 참패를 당했다.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 당시 펠레는 문어에 물먹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독일 서부 오버하우젠의 수족관에 사는 '파울(Paul)'이란 이름의 문어는 남아공에서 독일이 출전한 여섯 경기 승패를 맞히는 '족집게 예언'을 선보였다. 그러자 "펠레보다 낫다"고 놀렸다. 펠레는 남아공 대회를 앞두고 브라질과 스페인을 우승후보로 꼽았으나, 조별예선에서 약세를 보인 스페인을 슬그머니 빼고 "독일, 아르헨티나가 브라질과 우승을 다툴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하지만 그가 언급한 세 팀은 모두 탈락했다. 스페인만 살아남아 우승까지 했다. 펠레는 "사람들은 내가 틀린 것만 기억한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카타르월드컵에서도 브라질이 8강에서 조기 탈락하면서 '펠레의 저주'가 또 한번 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펠레는 "네이마르가 이끄는 브라질이 우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팬들은 "카타르에서 펠레의 소원대로 브라질이 우승해 징크스도 풀렸으면 했다"며 아쉬워했다.
맨발로 공 차던 소년, 세계를 호령하다
펠레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무명의 축구선수였다. 생활고에 시달린 어머니는 그가 축구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아버지를 닮은 펠레는 축구에 빠졌다. 그는 공을 살 돈이 없어서 양말을 뭉쳐 만든 공을 찼다. 운동화 대신 맨발로 흙바닥 그라운드를 누볐다. 펠레는 아버지에게 기본기를 배웠는데, 탁월한 재능 덕분에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1955년 만 15세에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팀 산투스에 입단했고, 이듬해 37골을 넣어 데뷔 첫해 득점왕에 올랐다.
1957년 17세에 국가대표가 된 후 1958년 스웨덴월드컵에서 6골을 넣으며 우승을 이끌었다. 펠레는 1962년 칠레, 1966년 잉글랜드, 1970년 멕시코 대회까지 4번의 월드컵에 참가해 14경기에서 12골을 터뜨렸고, 세 차례 우승했다. 하지만 그도 최고의 선수들이 경쟁하는 유럽에서 뛴 적은 없다. 1958년 월드컵 후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등 유럽 명문 팀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브라질 정부는 1961년 펠레를 ‘국보’로 지정해 국외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산투스 구단이 펠레를 유럽 구단에 보내서 얻는 수익보다 상품화해 얻는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는 주장도 있다. 펠레는 은퇴 직전인 35세에 미국 프로축구 뉴욕 코스모스 팀에 간 게 유일한 해외경험이다.
그라운드 밖에선 '평화 전도사'
펠레는 경기장 밖에서 '평화 대사'로 활약했다. 1969년 펠레는 소속팀 산투스를 따라 내전 중인 나이지리아를 방문해 나이지리아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뛰었다. 당시 펠레를 보기 위해 수많은 나이지리아인이 경기장을 찾는 바람에 내전도 잠시 중단됐다. 펠레는 미국 CNN과 인터뷰에서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축구를 열렬히 사랑했고, 우리가 뛰는 것을 보기 위해 전쟁을 멈췄다"면서 "무척 자랑스러운 일화"라고 말했다. 펠레는 지난 6월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을 멈춰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과 2017년 모스크바에서 만난 사연을 소개하며 "그때 웃으며 오래 악수하던 바로 그 당신의 손에 이 상황을 중단시킬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펠레는 브라질 독재정권 시절에는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했다. 영국 BBC는 "브라질의 폭력적인 군사독재 정권(1964~85년)은 펠레를 이용해 자신들의 오명을 세탁했다"면서 "1970년 월드컵을 앞두고 국제적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대표팀 스태프를 군인들로 구성해 우승하도록 압박했다"고 전했다. 이후 1985년 브라질이 민주화를 이루고 직접선거가 치러지자 펠레의 대선 출마설이 돌기도 했다. 그도 "출마만 하면 당선은 문제없다"고 말했다. 펠레는 대통령 대신 1995년 체육부 장관이 됐다. 축구계 부패 권력과 싸우고, 선수 권익을 보호하는데 공을 들였다. 또 유엔 환경 관련 친선대사, 유네스코 친선대사 등도 맡았다.
세계적인 유명세 덕분에 펠레의 손에 닿은 물건은 대부분 고가에 팔렸다. 그가 소장하던 월드컵 우승 트로피인 줄리메컵은 2016년 39만5000만 파운드(당시 약 6억6000만원)에 팔렸다. 당시 영국 스카이스포츠는 런던에서 열린 펠레의 개인 소장품 경매에서 스위스의 시계 제조업체 위블로가 줄리메컵을 구매하기 위해 최고가격을 적어냈다고 보도했다. 펠레의 줄리메컵은 1970년 월드컵 당시 개최국인 멕시코 정부가 펠레를 위해 별도로 제작한 것이다. 실제 줄리메컵은 이 대회에서 통산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한 브라질 축구협회가 소장했지만, 1983년 도난 당했다.
펠레가 1958 스웨덴월드컵 우승 당시 받은 메달은 20만 파운드(당시 3억3600만원)에, 1962 칠레월드컵 우승 메달은 14만800 파운드(당시 2억3600만원)에 팔렸다. 펠레가 영화 속에서 착용했던 축구화는 8000 파운드(1340만원)에 판매됐다. 펠레가 1970년 월드컵 결승 때 입었던 유니폼은 2002년 경매에서 15만7750 파운드(당시 약 2억5000만원)에 팔렸다.
부유했지만, 복잡했던 사생활
펠레는 축구선수 시절엔 막대한 부를 쌓지 못했다. 유럽 빅리그에서 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선수 생활을 하며 번 돈은 총 600만 달러(약 8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은퇴 후엔 상황이 달라졌다. 유명인사 자산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이트로 셀리브리티넷워스(Celebritynetworth)에 따르면 펠레는 은퇴 후 광고, 영화 출연, 각종 홍보대사, 축구 관련 사업 등으로 자산을 1억 달러(약 1320억원)로 불렸다. 물론 현재 축구계를 주름잡는 수퍼스타 메시와 호날두가 4억~6억 달러(5000억~8000억원)를 벌어들인 것에 비하면 적다.
성공적인 선수 생활과 달리, 사생활은 복잡했다. 펠레는 공식적으로 3번 결혼했다. 자녀는 7명이다. 이들 외에도 혼외 자식이 많다. 영국 더 선에 따르면 펠레의 실제 자녀는 몇 명인지 세기 어렵다. 펠레는 2016년 일본계 브라질인 마르시아 시벨리 아오키(56)와 결혼했는데, 이후로는 가정에 충실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지막도 축구 이야기
펠레가 팬들에게 남긴 마지막 글도 축구였다. 그는 카타르월드컵 우승 직후 SNS에 "오늘 축구는 언제나 그렇듯이 매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며 "메시는 처음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의 축구 인생에 걸맞은 결과"라며 후배들을 격려혔다. 메시는 그동안 월드컵 우승이 없다가 이날 카타르 월드컵 결승에서 프랑스와 연장접전 끝에 승부차기에서 4-2로 따돌리고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그는 또 "나의 친구 음바페는 결승에서 네 골(승부차기 득점 포함)을 넣었다"며 "이런 엄청난 우리 종목의 미래를 보는 것은 대단한 선물"이라고 격려했다. 음바페는 1966년 제프 허스트(잉글랜드) 이후 56년 만에 월드컵 결승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한 선수가 됐다. 펠레는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축하하고, 디에고 마라도나도 미소 짓고 있을 것"이라고 아르헨티나 팬들에게 인사했다.
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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