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이상했던 '미끄럼틀 구경'…"무인기, 10년 비밀작전이었다"
지난 26일 서울 하늘을 헤집고 다닌 북한의 무인기로 '안보 공백' 논란이 거세졌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북한의 무인기 도발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고 평가한다. 오히려 김정은이 집권한 뒤 10년 넘게 장기 계획을 세우고 비밀리에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김정은의 첫 공식 일정은 무인기 독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집권 초기였던 2012년 1월 당시 군부 핵심인사들과 함께 서부지구 항공구락부를 방문했다.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2011년 12월 17일)한지 갓 한 달을 넘긴 시점으로, 사실상 김정은의 첫 군사훈련 참관 일정이었다.
당시 김정은이 참관했던 훈련이 프로펠러형 무인기 조정 경기였다. 집권 후 첫 군사훈련 참관지로 무인기 부대를 택했을만큼 무인기에 공을 들였다는 의미다.
당시 조선중앙TV가 공개한 영상에는 프로펠러가 달린 약 2m 길이의 무인항공기 동체가 또렷이 담겨 있다. 색상이나 외형에서 일부 차이가 있을 뿐 구조나 운용원리는 최근 북한군이 남측으로 보낸 무인기와 같다.
김정은은 1년여 뒤인 2013년 3월에도 '초정밀 자폭형 무인타격기' 훈련을 참관했다. 특히 그 자리에서 김정은은 "남반부 작전지대의 적(敵) 대상물 좌표들을 빠짐없이 장악해 무인타격 수단들에 입력시켜 놓으라"고 지시했다.
참관을 마친 뒤에는 "타격기들의 비행항로와 시간을 적 대상물이 도사리고 있는 남반부 상공까지의 거리를 타산해 정하고, 목표 타격 능력을 검열해봤다"며 "적들의 그 어떤 대상물도 초정밀 타격할 수 있다는 게 확증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미 10여년 전에 무인기를 활용한 주요 시설 타격 계획은 물론 실현 가능성까지 검증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북한은 지난해 1월 8차 당대회에서 '국방력 강화 5개년 계획'을 채택하며 무력과 관련한 5대 핵심과제를 공개했다. 정부는 5대 과제에 포함된 핵과 미사일 등 핵전력에 대해서는 강한 우려를 표한 반면, 핵전력과 나란히 과제에 포함됐던 '무인정찰기 개발' 항목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게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당초 "남조선 자작극" 발뺌
북한은 그동안 10년 넘게 준비한 '무인기 프로젝트'를 철저히 은폐해왔다. 북한군이 보낸 무인기는 국내에서 2014년부터 발견됐다. 명백한 북한의 무인기였음에도 북한은 당시 "남조선의 자작극"이라고 발뺌했다.
심지어 북한의 대외용 선전매체는 2015년 11월 사실상의 무인기 타격 실험을 '무선조종(RC) 모형항공기' 경기라며 인기 스포츠 종목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조선신보의 당시 보도는 "'전국 도(道) 대항 체육대회'에서 항공체육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으며 가까운 앞날에 좋은 결실을 보게 될 것"이란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민간 취미활동의 일환으로 보이려 무인기를 무선조종 모형항공기로 소개한 것은 무인기가 가진 정찰능력과 공격성을 가리기 위한 전형적인 기만 전술"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무인기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고 있다는 단서는 의외의 장소에서 노출됐다.
김정은은 2014년 6월 북한군이 만든 놀이시설인 급강하 물미끄럼대(워터슬라이드) 생산 공장을 방문했다. 군이 놀이시설용 미끄럼틀을 만든다는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당시 김정은의 행보에 대해 정보 당국은 "무인기 등을 개발하기 위한 소재 공장을 놀이시설 생산공장으로 위장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 북한 매체들이 공개한 사진에는 당시 대남·해외공작을 총괄하던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위치해 있었다. 군인 신분이던 김영철이 인민복을 입은 채 공장에서 김정은을 수행하며 위장술을 펼친 셈이다.
권용수 전 국방대 교수는 "워터슬라이드에 사용되는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 수지는 자동차·선박·군용품 등에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소재이기 때문에 북한이 당시 무인기 소재로 활용했을 수 있다"며 "다만 북한이 2017년에 일반적으로 무인기에 사용되는 탄소복합재료를 개발했다고 주장한 만큼 현재는 이런 신소재를 적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정은은 2017년 8월 국방과학원 산하 화학재료연구소를 방문해 최첨단 재료인 '3D탄소/탄소-탄화규소' 복합재료를 연구·개발했다고 밝힌 바 있다.
평창 드론 벤치마킹했나
북한은 김여정이 직접 참관했던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공식행사에서 남측이 선보인 드론 기술을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북한은 올림픽이 끝난 뒤인 그해 9월 정권 수립 80주년(9월 9일)을 맞아 집단체조 공연을 새롭게 선보였다. 공연에서는 LED 드론을 동원해 '빛나는 조국'이란 문구를 공중에 구현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당시 선보였던 올림픽 오륜기와 평창 겨울올림픽 마스코트 수호랑을 연출한 드론 공연과 상당히 유사하는 평가도 나왔다.
북한은 이후에도 열병식을 비롯한 주요 기념행사에 드론을 동원하는 모습을 빈번히 노출했다. 지난해 1월 8차 당대회를 기념해 진행한 야간 열병식에서 '오각별'과 지난 4월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기념 열병식에선 '노동당 심볼'을 무인기로 공중에 구현하며 드론 관련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랐음을 과시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몰래 기술력을 축적해온 북한이 무인기를 실제로 투입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꼽는다. 우크라이나 군이 민간 무인기 전문가를 모아 '아에로로즈비드카(공중정찰)'라는 항공정찰부대 만들어 정찰뿐 아니라 공격 작전까지 성공시키면서, 무인기의 실전에서의 위력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에 북한이 대형 무인기를 개발하는 정황도 포착되고 있다. 미국 방위산업 전문매체는 최근 위성사진 분석을 통해 평안북도 구성시방현 공군기지에서 중국산 무인공격기인 차이훙(CH)-4와 흡사한 장거리 체공형 무인기를 포착했다고 밝혔다.
또 상업용 드론을 군사용으로 전용한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인도 언론에 따르면 파키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인도의 잠무-카슈미르 지역 경찰은 지난 5월 자석이 포함된 폭발물을 탑재한 멀티로터형 상용 드론을 격추했는데, 인도 경찰 당국은 격추한 드론이 북한제라고 발표한 바 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무인기는 공격 및 정찰용으로 모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자신들이 부족한 항공·위성 전력을 저비용으로 상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무인기는 "선대의 유업"
김정은이 집권 초기부터 무인기에 큰 관심을 쏟은 것은 무인기 개발이 1970년대부터 시작된 '선대의 유업'에 가깝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수년 전 기밀이 해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1970년대 북한 당국이 일본에서 무인기를 도입하려 했던 정황이 담겨 있다. 1980년대 후반엔 중국산 D-4(ASN-104) 무인기를 최초로 실제 입수했고, 이를 토대로 1990년대 초반부터는 '방현-Ⅰ'과 '방현-Ⅱ' 무인기를 자체 개발 및 생산했다.
북한은 최근까지 중국, 러시아, 이란, 시리아에서 관련 기술 획득해 무인기 개발을 지속해 왔다. 군 당국은 북한이 현재 300∼400대에서 최대 1000대의 무인기를 운용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 북한의 무인기 도발로 무인기 전투가 잠재 위협이나 일종의 '깜짝쇼'가 아닌 실제 위협이 됐음이 증명됐다. 선대부터 내려오는 대남 침투전략의 연장선에 있는 중대한 위협이라는 얘기다.
북한은 한국에 새로운 위협을 안기는 소기의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까지도 무인기 도발 관련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북한 매체에 따르면 김정은은 28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확대회의 사흘째 보고에서도 경제 등에 대한 언급만 했을뿐 무인기 관련 언급은 없었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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