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가는 K-제조업’ 해법은? 고용 ‘유연안정성’ 높여 제조 생태계 혁신
국내 기업은 해외로 빠져나가고, 해외로 나간 기업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전문가들은 한국 제조업의 ‘공동화’ 속도가 이전보다 빨라질 것으로 전망한다. 해외 진출 목적이 ‘비용 절감’에서 ‘생존’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은 자국 내 생산 제품이 아니라면 구매할 수 없다는 정책을 펼친다.
전문가들은 최근 벌어지는 한국 제조업의 공동화를 단순 산업 문제보다 ‘안보·사회’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부 투자 늘리고 법인세 대폭 완화
한국 제조업 공동화 논란은 과거부터 이어졌다. 최근 달라진 점이라면 ‘첨단 산업’이 떠나간다는 것이다. 첨단 산업은 향후 고용, 수출 등 나라 성장을 좌우할 미래 먹거리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현 상황을 ‘경제 안보’ 위기라고 말한다. 오정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핵심 산업 이탈은 경제 안보 차원에서 중요한 이슈”라며 “일자리가 없어지면 국민들은 해외로 떠나고, 이는 국력 감소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방위 협력 차원에서도 첨단 산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첨단 산업 역량이 있느냐 없느냐가 국가 방위와 직결될 수 있다”며 대만 사례를 언급했다. 김 교수는 “중국이 반도체 산업 역량을 가져가는 것을 미국이 용인할 수 없기에, 미국과 대만이 가깝게 지내며 일본 등과 방위 협력까지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첨단 산업 이탈 방지, 해외 첨단 산업 유치를 위한 정부의 적극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미 주변 국가들은 정부가 주도하는 첨단 산업 투자를 시작했다. 특히 반도체 부문에서 각국의 노력이 감지된다. 이미 2021년과 2022년 반도체 부족으로 자동차, IT 등 산업 전반에서 경제가 마비되는 현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대만 경쟁에서 패해 반도체 약소국으로 전락했던 일본조차 정부 주도로 반도체 투자에 나섰다. 한국 반도체 공장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사이, 일본은 주요 글로벌 반도체업체 공장을 잇따라 유치하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에 따르면 일본은 2022년 5월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제정, 반도체를 중요 물자에 포함했다. 코트라는 ‘일본 메모리 반도체 시장동향’ 리포트에서 “일본과 미국이 연계하는 차세대 연구거점 정비에 3500억엔, 첨단 제품 생산거점 지원에 4500억엔, 제조 공정 필수 소재 확보에 3700억엔 등 총 1조3000억엔(약 12조6500억원)을 투입, 경제 안보 중요성이 부각된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 정부가 예산으로 확보한 돈은 ‘보조금’ 명목으로 기업에 지급된다. 반도체 기업의 설비 투자금액 40%를 보조금으로 지원하는 방식이다. 일본 정부의 유인책은 속속 성과를 내고 있다.
세계 D램 시장 3위 기업 마이크론은 약 8조원 규모의 D램 공장을 일본 히로시마현에 구축, 2024년 완공할 계획이다. 세계 파운드리 시장 1위 기업 TSMC도 일본 구마모토현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2022년 4월 착공에 들어가 2023년 준공을 앞뒀다. TSMC는 일본에 두 번째 반도체 생산 공장 건설도 검토 중이다.
일본과 달리 한국은 왜 글로벌 기업들의 공장 유치 소식이 들리지 않을까.
전문가들은 여야 간 정치권 갈등에 경제 안보가 잡아먹혔다고 분석한다. 법인세 이슈가 대표 사례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2018년 법인세율 인상 이후 외국 기업의 국내 투자는 감소하고, 우리 기업의 해외 이탈은 가속화됐다”고 주장했다.
기재부에 따르면 2018년 외국인 제조업 국내 직접 투자 액수는 100억5000만달러(약 13조1400억원). 하지만 2021년은 절반 수준인 50억달러(약 6조4200억원)에 그쳤다.
기재부가 구체적 수치까지 제시했음에도 야당은 ‘초부자 감세’라며 법인세 인하를 반대했다. 결국 여야는 과세표준 구간별 1%포인트 인하 선에서 합의했다.
일각에서는 탈중국을 검토하는 글로벌 소재·부품·장비업체 유치를 두고 한국과 일본의 경쟁이 예상되는데, 법인세 소폭 인하는 아쉬운 결정이라고 평가한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최근 중국 내 소부장업체들은 코로나19 봉쇄, 미중 패권 경쟁 심화로 중국을 떠나고 있다. 오준석 숙명여대 교수팀은 한국 유치를 위해 파격적인 투자 유치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또 있다. 첨단 산업 이탈을 방지할 법안들도 여야 갈등에 줄줄이 표류 중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 육성 방안을 담은 ‘K칩스법’은 4개월째 국회 문턱에 가로막혀 있다. 특히 K칩스법 핵심인 ‘세제 혜택 범위’는 여당과 야당의 갈등으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진행되지 않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D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정부가 모든 역량을 첨단 산업 지키기에 투자해도 부족한 상황인데, 여야 갈등도 중재 못해 법안이 표류하는 지경”이라며 “국가의 성장률을 결정하는 근간은 투자다. 여야 갈등이 계속된다면 경제 안보에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지방 이전 유인할 제조업 생태계 갖춰야
우리 정부도 꾸준히 ‘리쇼어링’을 외쳐왔다. 정부는 2013년 ‘해외 진출 기업의 국내 복귀 지원에 관한 법률’을 시작으로 두 차례 법을 개정, 국내 복귀 기업 지원을 강화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기업은 2021년 기준 26개에 그친다. 전문가들은 국내 복귀 환경이 마련되지 않았고, 유인책도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정부와 기업 간 ‘미스매치’가 심각하다고 분석한다.
가장 큰 미스매치는 복귀 지역이다. 정부는 기업들의 지방 복귀를 원하지만, 기업들은 수도권 복귀를 원한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나온 정책으로 리쇼어링을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비현실적”이라며 “사회적 문제와도 엮여 있어, 이를 풀지 않으면 성과는 계속 미미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2022년 9월 해외 진출 기업 306개사를 대상으로 ‘해외 진출 기업의 리쇼어링 촉진을 위한 과제 조사’를 실시했다. 만약 리쇼어링을 추진한다면 어느 지역을 선호하느냐는 질문에 ‘수도권’을 선택한 응답이 47.9%로 가장 높았다.
하지만 수도권은 각종 규제로 막혀 있다. 경총 관계자는 “현 제도상 수도권은 수도권 공장 총량제 등으로 공장 신·증축이 어렵고 정부의 국내 복귀 기업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며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수도권 복귀 기업은 입지 보조금 지원이 제한된다. 또 설비 보조금은 원칙상 비수도권에만 지원된다. 정부도 난처하다는 입장이다. 수도권 규제를 풀게 되면 지방자치단체들의 ‘수도권 집중화’ 비판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수도권 규제 완화가 어렵다면, 지방 이전을 유인할 ‘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사회 문제와 맞닿아 있는 ‘인력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꼽는다. 오정근 교수는 “한국은 사회·교육 특성상 주요 대학교가 밀집된 수도권에 주요 인재들이 쏠린다”며 “최근 부산 지역으로 이전한 모 기업도 원하는 연구 인력을 찾지 못해 용인에 별도 연구개발 센터를 건설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의견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 교수는 “기업 생산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게 인적 자원이다. 하지만 한국은 수도권에 대학이 몰려 있어 인재들이 집중된다. 산학연 클러스터 등 기업과 대학 간 협업을 위해서라도 지방에 우수 인재들이 분산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한데, 오래된 사회적 문제인 만큼 단기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결국 대학 분산 등 한국 사회의 고질적 사회 문제를 풀어내야 리쇼어링 정책도 성공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김용진 교수는 “무작정 리쇼어링을 외칠 게 아니라, 기업이 원하는 생태계를 구축한 뒤 불러들여야 한다”며 “여기서 말하는 생태계는 단순 기업 단지 조성이 아니다. 인재들이 머물고, 몰릴 수 있도록 사회·문화·교육 측면에서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고 총평했다.
강성 노조 리스크 줄이고 안전망 확충
전문가들은 ‘국내 산업 공동화’ 해결을 위한 마지막 퍼즐로 ‘노동 유연화’를 지목한다. 한국 특유의 강도 높은 노동 규제가 기업의 설비 투자를 막는다는 것이다. 파행적 노사 관계와 짧은 교섭 주기, 노조 집행부의 짧은 임기, 불확실한 노동 정책, 파견·계약직 근로자 관련 규제와 불확실성 등 산적한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로 해외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물론 외국 기업이 한국 투자를 꺼리는 이유 1위가 ‘노동 규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2022년 9월 해외 진출 기업 306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해외 진출 기업들은 리쇼어링 저해 요인 1위로 노동 규제(29.4%)를 선택했다. 외국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2022년 11월 윤석열 대통령과 화상 면담을 진행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한국은 기가팩토리(테슬라 공장) 최우선 투자 후보지 중 하나”라고 말하면서도 한국 특유의 강도 높은 국내 노동 규제와 강성 노조를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경제포럼(WEF)가 발표한 노동 시장 유연성 평가 부문에서도 한국은 OECD 37개국 중 35위에 그쳤다.
전문가와 업계 관계자들은 ‘노동 규제 완화’가 필수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의 무조건적인 고용 보장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 유연화를 통해 기업 숨통을 틔워주되, 최소한의 ‘안전망’을 확보해 최약층을 보호하는 방안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은 충분한 성과 평가와 이에 따른 보상을 적용하지 못하는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기존 근로자 고용을 보호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현재의 규제 체계는 실질적으로 신규 채용 부담을 높이는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 부담은 줄여주되, 사각지대에 벗어난 노동계층을 위해 국가가 촘촘한 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는 주장이 뒤따른다. 김우찬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려면 고용보험 등 사회적 안전망 확충이 전제돼야 한다. 이를 ‘유연안정성(Flexicurity)’이라고 한다. 한국 저임금 노동계층의 경우 노동법과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들에 위해 고용보험 등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표준에 맞는 임금 체계·근무 시간 제도 도입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제임스 킴 암참(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은 “미국 기업은 대부분 성과급 제도를 쓰는데 한국은 호봉제가 많다. 근로 시간도 경직적이다”며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90호·신년호 (2022.12.28~2023.01.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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