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가의 알려지지 않은 일생… 책으로 만나다
예술가들의 묵직한 평전이 연말에 쏟아졌다. 위대한 예술가들이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들이라서 더 반갑다. 한 예술가의 삶을 그가 살아간 시대와 그가 추구한 예술 여정 속에서 조명하는 예술가 평전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될 뿐아니라 예술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프랭크 게리(1929- )는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미국 건축가다. 로스앤절레스의 디즈니 콘서트홀, 파리의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도 그의 작품이다. 뉴욕타임스, 뉴요커, 베니티페어 등에서 일하며 건축 비평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저자는 20대에 게리를 만나 40년 이상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를 통해 게리의 삶과 건축 여정을 자세하게 풀어냈다.
게리는 전위적이면서 대중적이고, 확실히 현대적이면서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건축물을 짓고 싶었다. 그는 젊은 시절 로스앤절레스의 예술가 공동체와 어울렸고, 아트 신에서 큰 에너지를 얻었다. 그는 예술의 기술을 사용해 건축적 목적을 수행하는 식으로, 주류 건축과는 다른 자신만의 세계관을 완성해 나갔다.
하지만 게리의 건물이 기능적인 건축물이라기보다 화려한 눈요깃거리에 가깝다는 평가도 늘 따라다녔다. 저자는 2014년 루이뷔통 미술관 완공 시 게리의 인터뷰들을 소개하며 “건축물은 우리에게 비를 피할 곳을 제공할 책임이 있지만, 그러한 기능이 전부라면 별 볼 일 없다고 게리는 믿었다”고 전했다. 또 “그의 작업은 기능성만큼이나 기쁨과 사색을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이다”라고 썼다.
케터 콜비츠(1867-1945)는 민중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독일 미술가다. 사회주의권 미술가들은 물론 한국의 1980년대 민중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시 전쟁은 안 돼!’ 같은 판화 작품, 베를린의 관광 명소가 된 피에타 조각상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그동안 제대로 된 전기가 없었다. 이 책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콜비츠의 일기나 편지 같은 자전적 기록들과 손주들을 포함한 지인들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저자는 콜비츠의 작품론보다는 생애에 중점을 두었다. 콜비츠의 작품 대다수가 어둡고 침울하기 때문에 그녀의 삶도 주로 어두운 쪽으로만 알려졌다. 이 책은 남동생의 죽음, 남편의 죽음, 손자의 죽음 등이 그녀의 작품 속으로 깊숙히 파고 들었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열정적이고 삶을 즐기던 콜비츠도 보여준다. 아내이자 부모,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콜비츠의 모습도 있다.
그는 신념에 찬 투사가 아니었다. 모순되고 흔들리는 인간이었다. 책은 콜비츠의 다면적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민중미술가, 페미니스트, 공산주의자 등으로만 규정해온 그의 예술을 보다 넓게 해석할 가능성을 연다.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1915-1997)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고 가장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를 남긴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피아노 슈퍼스타였지만 평생 자신의 삶에 대해 침묵해 왔고, 고립된 삶을 택한 신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동안 이 러시아 출신 음악가에 대해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자료는 브뤼노 몽셀종의 다큐멘터리 ‘리흐테르, 수수께끼’, 리흐테르 말년의 인터뷰와 일기를 함께 엮은 책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 정도였다. 2007년 덴마크에서 처음 출간된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피아니스트’는 리흐테르에 대한 본격적인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라스무센은 작곡가다. 이 책은 리흐테르의 생애뿐 아니라 그의 음악과 음반들을 깊게 해설한다.
저자는 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능력, 음악에 몰입하는 능력, 그럼으로써 작품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능력에 관한 한 리흐테르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고 평가하면서 그를 음악이 스스로 말문을 열게 만드는 일종의 영매이자 대변인으로 묘사한다.
“음악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음표 속에? 피아노에? 음파에? 귓속에? 마음 속에? 리흐테르는 불변의 이상, 혹은 ‘진실’은 존재하지 않음을, 그리고 음악 작품은 오로지 언제나 새롭게 탄생하는 근사치로서만 존재함을 잘 알고 있었다.”
래컴의 삽화는 100여년 동안 전 세계의 아이와 어른을 매혹하는 한편, 겁에 질리도록 만들었다. 사후 80년이 지난 지금도 E. V. 루카스가 말한 ‘우아함과 기괴함의 조합’이 만들어낸 특별한 ‘전율’은 힘을 잃을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세계 3대 삽화가 중 한 명이자 현대 북 일러스트의 기원으로 평가받는 아서 래컴(1867-1939) 평전. 저자는 영국의 큐레이터로 고증을 통해 래컴의 생애와 작품을 충실하게 복원한다. 200컷이 넘는 래컴의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그림들도 수록했다.
래컴은 의인화된 나무, 구불구불한 덩굴, 거품이 일어나는 파도 같은 정교한 배경 속에 도깨비와 님프, 거인, 악령, 바다용, 요정 등이 가득한 신비한 세계를 창조했다. 그가 동화와 판타지 문학을 위해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번역자 정은지는 “어째서 어떤 예술은 살아남고, 어떤 예술은 잊히는가? 이 책은 이 난해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라고 소개했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라면 김남주(1945-1994)라는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같은 김남주 시집 제목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시인보다 ‘전사’나 ‘혁명가’로 불렸던 사람. 남민전 사건으로 10년 가까운 옥고를 치르면서 평생에 남긴 시 510편 중 360편을 옥중에서 썼다. 그의 시들은 한국 민중민족문학이 생산한 가장 뜨겁고 순결한 언어들로 남겨졌다.
김남주 평전은 해남 땅끝에서부터 광주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김남주의 정신을 다시 불러낸다. 7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는 민주화운동과 문학계의 역사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저자 김형수는 시인이자 소설가로 김남주의 시를 깊게 다룬다. 저자는 김남주에게는 김수영이 보여주는 시적 정직성의 최대치가 있었고, 신동엽에게 조금도 부족할 바 없는 생태적 장엄함이 있었다고, 또 절정기의 김지하가 보여준, 가공할 야만과 맨몸으로 대결하는 ‘역사적 산화’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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