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수복·오리발이 그대로”…檢, ‘월북’ 아닌 ‘실족’ 무게

조민아,신지호 2022. 12. 2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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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서욱 첩보 삭제로 기소
“군에서 첩보 5600여건 삭제”
서훈 삭제 혐의는 수사 중
서해 피격 공무원의 유족과 그들의 법률대리인이 지난 6월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고발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기 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해 공무원 고(故) 이대준씨 ‘월북 몰이’ 사건 당시 첩보 삭제를 지시한 혐의로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과 서욱 전 국방부 장관이 29일 재판에 넘겨졌다. 북한군에 피살된 이씨에 대해 지난 정부는 월북자라고 결론 냈지만, 검찰은 실족 가능성에 방점을 찍었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부장검사 이희동)는 박 전 원장과 노모 전 국정원장 비서실장을 국정원법 위반·공용전자기록 등 손상 혐의로, 서 전 장관을 직권남용·공용전자기록 등 손상·허위공문서 작성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들은 이씨 사망 이튿날인 2020년 9월 23일 국정원이나 국방부 직원들에게 피격과 시신 소각 관련 첩보·보고서 삭제를 지시한 혐의 등을 받는다.

검찰은 이씨가 피살된 직후 국방부와 예하 부대에서 5600여건, 국정원에서 50여건의 첩보나 보고서가 삭제된 것으로 파악했다. 국방부 군사정보통합처리체계(MIMS)에서 60건, 국정원에선 46건의 첩보 관련 보고서가 삭제됐다는 감사원 감사 결과보다 훨씬 늘어난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이같은 대량의 첩보 삭제에 대해 “굉장히 이례적인 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첩보를 삭제한 게 아니라 보안 유지를 위한 배포선 조정 과정이었으며 자료의 원본은 남아있다는 박 전 원장 등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검찰은 보고 있다. 그동안 수사팀이 파악한 사실 관계와 동 떨어진 주장이라는 것이다.

검찰은 특히 이씨가 자진 월북이 아닌 실족으로 북한 해역으로 표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수사팀은 이씨가 바다에 빠진 시점에는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한다. 이씨가 발견 당시 착용하고 있던 구명조끼는 그가 타고 있던 무궁화10호의 물품이 아니었고, 개인적으로 구명조끼를 보관하고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전 정부에선 이씨가 구명조끼를 입은 채 발견된 점을 자진 월북 근거로 제시됐었다. 무궁화10호에는 개인 방수복이나 수영 수트, 오리발 등 수영 장비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검찰은 그가 가족과 유대감이 깊었으며, 북한 해역에서 발견될 당시 보였던 생존 의지도 실족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으로 봤다. 공무원으로 안정된 신분이었고, 외항선 간부급 선원으로 재취업할 수 있는 경력을 보유하고 있던 사실도 고려됐다. 이씨는 북한에 대한 동경이나 관심을 보인 정황도 없었다고 한다. 검찰은 이씨 실종 직전 가족과의 마지막 통화 관련 맥락도 살폈는데, 유언이나 작별 인사가 아닌 아들의 대입 상담 내용으로 일상적인 대화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사건 당시 해양경찰이 이씨의 표류예측을 의뢰한 기관 4곳 중 2곳은 ‘인위적 노력’ 없이도 북한 해역으로 표류할 수 있다는 사례가 담긴 분석 결과를 내놨던 것으로도 조사됐다. 하지만 해경은 당시 중간수사 브리핑에서 “인위적 노력 없이 실제 발견 위치까지 표류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밝히며 표류예측 결과도 월북의 근거로 내놨었다.

그러나 표류예측시스템 운영을 담당한 해경 관계자는 표류예측은 정확한 지점을 짚어내는 데 한계가 있고, 수사 목적으로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양학계 전문가들은 현재 사용되는 표류예측시스템의 오차는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검찰 관계자는 “국가가 개인에게 월북자라는 결론을 내리려면 사법절차에 준하는 과정을 거쳐 명확한 근거를 확보해 판단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이씨 실종 당시는 야간이었으며 해상 유속이 시속 2.92㎞~3.51㎞ 정도로 성인 남성의 평균 수영 속도(2㎞)보다 빨라 원하는 곳으로 수영하기 어려웠고, 수온은 22도 정도로 장시간 헤엄치기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해양 전문가인 이씨가 이런 조건을 알고도 최소 27㎞(무궁화10호와 이씨 최초 발견 지점 간 거리) 자력으로 헤엄칠 이유가 없었다는 취지다.

월북 몰이를 총괄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첩보 삭제 혐의는 계속 수사 중이다. 검찰은 첩보 삭제 지시 배경에 이씨 피살이 우리 국민을 구조하지 못했다는 국민적 비난이나 남북관계의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 서 전 실장 등이 첩보 삭제를 지시한 날에는 한반도 종전선언을 지지해달라는 취지의 문재인 전 대통령 유엔총회 화상 연설도 있었다. 이런 상황 역시 사건 은폐의 동기라는 게 검찰 판단이다. 종합하면 당시 서 전 실장이 내린 지시의 실체는 보안 유지라는 명목 하에 사건 진상 은폐를 지시한 것이라는 게 검찰의 시각이다.

기소된 이후 박 전 원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검찰 조사를 성실하게 받았고, 국정원 고발 내용에 대한 사실을 부인했다”며 “기소의 부당함이 재판 과정에서 밝혀지기를 기대한다”는 입장을 올렸다.

조민아 신지호 기자 minaj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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