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성장=일자리 증가’ 공식 깨졌다…대표 기업 15곳 살펴보니
현대자동차는 올해 상반기에 66조2985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4조9087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14.9%, 38.6% 늘었다. 하지만 현대차가 고용 중인 직원 수는 올 상반기(6월 30일 기준) 7만673명이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7만644명)보다 29명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는 비단 현대차 만의 일이 아니다. 29일 중앙일보가 자산 기준 국내 15대 그룹(농협 제외) 주력 계열사 15곳의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 반기보고서를 분석했더니 모두 매출과 영업이익이 개선됐지만, 고용이 늘어난 곳은 6곳에 불과했다. 다만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10월 배터리 자회사인 SK온을 분사시킨 점을 고려해 분석 대상에서 제외했다.
‘기업 성장=고용 증가’라는 등식이 무너지고 있다는 얘기다. 코로나19 여파로 국내 주요 대기업의 고용 유지 능력이 약해진 데다, 향후 경영 환경 불확실성 심화 등을 이유로 기업들이 인재 채용에 보수적으로 나서고 있어서다.
늘릴 땐 ‘찔끔’ 줄일 땐 ‘대폭’
지난해 상반기 11만1683명이던 삼성전자의 직원 수는 올해 11만7904명이 됐다. 1년 만에 6221명(5.6%)이 증가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 역대 최대 매출(157조7800억원)을 기록했다. 현대차(29명)와 한화솔루션(576명·8.7%), GS칼텍스(25명), CJ제일제당(357명·4.5%), 카카오(622명·21%) 등도 식구가 늘었다. 하지만 한화솔루션과 CJ제일제당, 카카오를 제외하면 사실상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반대로 몸집(직원 수)이 줄어든 기업은 그 폭이 상당했다. LG전자는 지난해 3만9282명에서 올 상반기 3만4792명으로 4490명(11.4%)이 줄였다. 지난해 7월 스마트폰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소속 직원 상당수를 LG에너지솔루션 등 관계사로 전환 배치한 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 조정을 통해 실적 개선에 나선 유통 대기업도 사정은 비슷하다. 롯데쇼핑은 같은 기간 1074명이 줄어든 2만678명, 이마트 역시 716명이 감소한 2만4247명이었다. 올해 상반기 기준 역대 최대 매출을 기록한 KT는 정년퇴직 등으로 인해 1268명(5.7%)의 직원이 줄었다.
문제는 올해 상반기가 기업 입장에선 상당한 호(好)시절이었다는 점이다. 주요 대기업 대부분이 올해 상반기 역대 최대 매출을 올리거나, 그간의 영업 부진에서 벗어났다. 조사 대상 기업 중 롯데쇼핑을 제외하곤 모두 최근 1년 새 매출이 늘었다. 롯데쇼핑도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해 106.3% 증가했다. 그만큼 채용 여력이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런 영업실적 개선이 고용 증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익명을 원한 대기업 인사담당 임원은 “인력을 줄이는 기업들은 큰 폭으로, 늘리는 기업은 소폭 늘리는 데 그치고 있는 게 뚜렷한 추세”라며 “요즘은 오히려 실적이 좋아서 희망퇴직 등 지급 여력이 있을 때 몸집을 줄이자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전했다.
신기술 분야와 ESG 등은 수요 많아
직원 수를 줄인 기업들은 실제 인건비 절감 효과를 거두고 있다. 한 예로 대한항공의 올 상반기 급여총액은 지난해 동기보다 1718억원(21%)이 줄어든 6439억원이었다. 롯데쇼핑 역시 지난해 상반기 5128억원 수준이던 급여총액을 올해에는 5074억원으로 낮췄다.
사실 기업 입장에선 지금 돈을 잘 번다고 무턱대고 사람을 뽑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당장 삼성전자 같은 반도체 기업은 급변하는 반도체 경기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인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는 내년 반도체 시장 매출이 올해보다 4.1% 감소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현대차 앞에도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란 숙제가 놓여 있다. 올해 상반기 4조355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린 포스코홀딩스 역시 지난 9월 태풍 ‘힌남노’로 인한 제철소 침수 탓에 하반기 실적 악화가 불가피한 형편이다.
여기에 기업에선 ‘뽑고 싶어도 뽑을 사람이 없다’는 한탄도 나온다. 헤드헌팅 업체인 드래곤HR의 박용란 대표는 “메타버스나 암호화폐, 빅데이터, 미래 모빌리티 같이 소위 ‘뜨는’ 기술 관련 분야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관련 전문가는 대기업부터 중견기업까지 수요가 고르고 넓게 퍼져 있다”며 “이들 분야는 기업이 원해도 수요를 다 채우지 못할 정도”라고 전했다. 다만 일반 사무직처럼 상대적으로 개성이 덜한 분야는 공급이 넘친다. 참고로 이날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산업기술인력 수급 실태조사에 따르면 소프트웨어, 바이오·헬스, 화학 분야의 기술인력 부족률은 3∼4%대로 다른 주력 산업에 비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렇게 고용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고 있는 만큼 정부도 고용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광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결국 해고 회피 노력 중심의 기존 고용 지원 정책으로는 산업별 일자리 수급난과 일자리 미스매치를 해결하기 힘들 것”이라며 “일자리가 줄어드는 산업에 대한 지원 못지않게,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미래성장 산업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정부 지출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 중심의 고용 시장 자체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만큼 정부가 더 탄력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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