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만들고 진통제 먹고... 농촌 어르신들의 뭉클한 런웨이 데뷔 [월간 옥이네]
[월간 옥이네]
▲ 지난 11월 11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나무달팽이에서 열린 '시니어 모델 패션쇼' 모습 |
ⓒ 월간 옥이네 |
화려한 조명 아래, 독특한 의상을 걸치고 당당하게 걷는 젊은 모델들의 모습. 패션쇼하면 으레 머릿속에 떠올리는 장면이다.
그러한 편견을 단번에 뒤집어 놓는 패션쇼가 지난 11월 11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나무달팽이에서 있었다. 2022 충북문화재단 지역 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으로 옥천마을미디어사회적협동조합이 진행한 옥천 '시니어 모델 패션쇼'다. '농촌 속 오래된 미래-들(野), 산(山), 강(江)'이라는 이름으로 옥시모(옥천시니어모델 커뮤니티) 회원 20명이 정지용의 시구절과 옥천의 들, 산, 강 등 자연을 의상에 담아 표현했다.
관객들이 숨죽인 가운데, 감각적인 음악과 함께 20명의 시니어 모델이 하나둘 런웨이를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진지한 표정과 당당한 걸음으로, 각자 옷장에서 골라 준비한 의상을 뽐냈다. 선글라스에 위아래 색을 맞춘 의상도, 화려한 패턴으로 힘을 준 의상도, 정갈한 정장 차림도, 맨발·맨살에 가죽자켓을 걸친 모습도 있었다. 마치 관객에게 의상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듯한 무대였다.
이후, 정지용 시인의 시구절을 담은 의상과 옥천의 자연 풍경을 담은 의상 패션쇼가 이어졌다. 첫 번째 무대가 개인이 등장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엔 팀별이다. 팀마다 특징을 달리해 의상을 선보이는 모습이었다. 정지용 시인의 시구절이 적힌 흰색 상의를 맞추거나, 파랑과 빨강 색상의 대비를 주기도, 검정 상·하의에 오방색 스카프를 두르고 등장하기도 했다. 각기 다른 개인이 타인과 공통점을 나누며 하나 되는 모습이었다.
마지막 무대는 한국적인 느낌을 살렸다. 나무와 산, 강과 하늘을 닮은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선 이들의 모습은 주변 자연 풍경과 조화를 이뤘다. 일부 시니어 모델은 패션쇼 외에도 시 낭송, 악기 연주 등을 관중 앞에 선보이기도 했다.
▲ 지난 11월 11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나무달팽이에서 '시니어 모델 패션쇼'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22 충북문화재단 지역 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으로 옥천마을미디어사회적협동조합이 진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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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 11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나무달팽이에서 '시니어 모델 패션쇼'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22 충북문화재단 지역 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으로 옥천마을미디어사회적협동조합이 진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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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2차를 맞은 시니어모델 양성 활동이다. 행사를 주관한 옥천마을미디어사회적협동조합은 처음 시니어 모델 모집공고를 내던 당시를 회상했다. '장롱 속 오래된 미래'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첫 번째 시니어 화보모델 양성과정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어요. 우리의 기대만큼 사람들이 모일까, 관심이 없지는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옥천 곳곳에 포스터와 현수막을 거는 방식으로 시니어 모델을 모집했는데, 15명 정도 모집 인원에 40여 명이 신청해주셨어요. 괜한 걱정이었다 느꼈죠." (정창영 사무처장)
선착순 모집이었기에 앞서 신청한 인원을 선발했다. 키나 몸무게는 문제 될 것 없었지만 '모델' 하면 떠올리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미리 본인의 사진을 보내거나, 신체 조건을 우려하며 신청을 주저하는 이들도 많았다.
"처음 시니어 모델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전형적인 모델의 조건을 떠올리며)의기소침해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러한 마음이 패션을 통해 드러났죠. 초반에는 일상에서 입던 평범한 옷차림이 대부분이었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점점 화려해지셨어요. 이전 같으면 입지 못했을 옷을 입고 오시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죠." (황현경 팀장)
지난해 프로젝트는 화보집 완성을, 이번 프로젝트는 화보집과 실제 패션쇼까지 진행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지난 5월부터 매주 화요일, 옥천공동체허브 '누구나'에 모여 3시간 동안 모델로서 갖출 자세부터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 의상 제작 등을 학습하며 행사를 준비했다.
"공연을 한 달 앞두고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씩 모였죠. 수업 준비물로 집에 있던 옷을 보따리로 잔뜩 챙겨 오셔야 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지루한 과정도 있어서 수고로웠을 텐데 끝까지 열정을 잃지 않았어요. 행사를 주관하는 당사자로서 이분들의 열정이 두렵기도 했어요. '이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렇게 열심히 참여하시는 걸까, 거기에 부응해야 할 텐데...' 이런 마음이었죠(웃음)." (황현경 팀장)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연출한 대덕대학교 패션디자인과 이경형 교수와 전희관 교수는 이번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갈수록 농촌이 고령화되면서 이제 이곳을 이끌어나가는 주축은 50-60대, 시니어예요. 그에 반해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행사가 많지 않고, 해당 나이대 분들이 그동안 자신을 억제하며 살아온 경우가 많다고 느낀 게 시작이었죠. 모델로 선다는 것은 자신을 표현하고, 자기다움을 찾고, 가꾸는 일이기도 해요.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이분들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준비 과정 역시, 자기다움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선보일 의상 역시 개인의 특성에 맞추어 매력을 보여줄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의상은 시니어 모델의 자체 코디 외에도 다니엘 프란(이경형 교수와 그의 제자 신재영 디자이너), 성순희씨(대전), 공주한복·시옹·색동백(대전·충청·서울 등 활동)이 힘을 합해 제작·준비했다.
무엇보다 시니어 모델 스스로 의미가 남달랐을 테다. 낯선 분야에 도전하고, 새로운 사람들, 또 완전히 다른 자신의 모습을 알아가면서 이들은 다시금 '성장하는 기쁨'을 느꼈다. 그중에는 모델로 활동하는 것이 적성에 적합하다고 느껴 전문 교육을 받는 시니어 모델도 있다.
▲ 강연규 모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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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규(63) 모델은 지난해 과정에 이어 올해도 꾸준히 교육에 참여했다. 옥천에 이주해온 뒤, 바리스타·노인 미술·원예·한식 조리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기에 열심을 내던 그였다. 시니어 모델에도 도전해보면 어떠하겠냐는 추천을 받아 이곳에서 함께하게 됐다.
"워낙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도전해볼 생각도 못했었죠. 평소에 말도 잘 안 하고, 자신감도 부족한데 어떻게 모델을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재미있고, 이게 내 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새로운 제 모습을 알게 된 것 같았어요."
실제 무대에서 그는 누구보다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강연규씨의 모습은 이경형 교수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는 강연규씨가 전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대학 과정을 추천했다. 강연규씨는 현재 대덕대학교 시니어 모델학과에 진학해 또 다른 배움의 길을 걷고 있다.
"어릴 적 홍정희 무용가의 공연을 보고 감명을 받은 적이 있어요. 한때 무용을 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예체능 계통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 좋았죠. 저는 소위 말하는 '착한 아이'였기에 적극적으로 꿈에 도전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문헌정보학과에 진학했지만 큰 애정이 없어서였는지 전공을 살려 일해본 적은 없죠. 돌아보면 아쉬워요."
서울에 거주하던 그는 더 늦기 전 자신을 더 알아가고 싶어 무작정 옥천으로 이주해 왔다.
"서울에 살 때는 집안일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옥천에는 아무 연고가 없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죠. 이곳에 와 둘러보니 잘 알아보면 무료 강좌들이 참 많더라고요. 이것저것 배우며 지내니까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중 가장 즐거웠던 것은 단연 시니어 모델 활동이다. 올해 양성 과정에 참여한 시니어 모델들은 지난 10월 포항으로 1박 2일간 여행하며 3-4번의 패션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내내 날씨가 좋지 않아 비를 맞으며 무대에 섰지만 그마저도 즐거웠을 정도다.
"제가 당당하게 무대 위를 걷고, 사람들이 나를 보아주고, 즐거워한다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잘해서 더 유명해지고 싶다기보다는, 모르는 분야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내 안에 있는 열정을 태우며 살고 싶죠."
강연규씨는 12월에 연극 무대에도 설 예정이다. 대덕대학교 평생교육원 교육과정을 통해 현재 옥천 최고령 모델로 활동중인 인물이자 전 옥천문화원장인 박효근 모델(81)의 삶을 다룬 옥천 향수극단의 창작극 <웃는 인생>에서 큰딸 역을 맡는다. 그는 한 사람의 모델로서, 또 연극인으로서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삶을 즐길 수 있는 요즈음이 '천국에서 사는 것 같다'는 강연규씨다.
▲ 백남규 모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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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규(69) 모델은 이번 패션쇼에서 맨발·맨몸에 가죽 자켓을 걸치고 나와 당당한 모습을 자랑했다. 올해 상반기부터 시니어 모델에 합류한 그는 '옥시모(옥천시니어모델 커뮤니티)' 회장을 맡을 만큼 열정이 가득하다.
"환갑을 맞을 때 바디프로필 사진을 하나 남기고 싶었죠. 40대 후반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오면서 이루고픈 꿈이었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하지 못했는데, 시니어 모델이 된다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단 끝에 신청했지만 15명 모집 정원에 16번째, 예비 번호 1번이었다. 실망하던 때, 다른 지원자가 자리를 비운 덕분에 함께할 수 있었다. 그에게 이번 프로그램은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있던 '미래'를 찾아내고 펼치는 과정이었다.
"그간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하며 살아왔어요. 그동안 스스로 초라하다고 느껴 움츠러들 때도 많았죠. 그런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당당하게 나를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게 됐어요. 이번 패션쇼에서도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비웃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몸도 만족할 만큼 만들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한다는 것, 나를 표현하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이 훨씬 컸어요."
그는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면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적당한 긴장감이 삶에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하고자 했던 일들을 조금씩 이루어나가고 있는 요즘, 그는 10년 전 계획했던 바디프로필 촬영에 다시금 도전해보려 한다. 만족스러울 정도로 몸을 관리해서 칠순을 맞는 내년에 결과물을 만들어보겠다는 것. 그는 다양한 종류의 운동을 하며 체력을 기르고 있다.
그는 "시니어 모델로서의 경험이 평생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면서 "옥시모 회장으로서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이들이 소통하고 모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지면을 통해 아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제가 이렇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아내 덕분이죠. 부족한 저를 응원해준 아내에게 너무나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 임재근 모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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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 11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나무달팽이에서 열린 '시니어 모델 패션쇼'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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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에게도 이들의 도전은 뜻깊었다. 그동안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익숙했을 시니어 모델 한 사람 한 사람이다. 이날 임재근(72)씨의 무대를 본 그의 딸 임수정 씨는 벅찬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뭉클했어요. 아빠는 삶의 대부분을 가게에서 일만 하시며 지냈죠. 오늘 아빠가 무대에서 당당하게 걷는 모습을 보니, 다른 사람 같네요(웃음)."
이밖에 패션쇼를 앞두고 진통제를 먹으며 허리 통증을 견뎠다는 모델 임재근씨는 "사실 딸 덕분에 시니어 모델에도 도전했던 것"이라면서 "무대에 안 섰으면 후회했을 것 같다.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했다.
함께 여행을 가기도 하며 관계가 돈독해진 시니어 모델들은 '옥시모(옥천시니어모델 커뮤니티)'를 결성하고 서로 격려하며 우정을 이어나가고 있다. 옥천마을미디어사회적협동조합은 앞으로 이들이 주축이 돼 옥천에서 시니어 모델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다.
"내년 계획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옥시모가 임원진을 꾸려 결성된 만큼 앞으로 이들이 활동할 무대를 만들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용제, 금거북이길 축제라든지 다양한 행사에서 이분들이 큰 역할을 해주실 것 같아요. 지역에서 이분들을 더 알고 찾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창영 사무처장)
"단순히 무대에 서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분들이 유명해졌으면 좋겠어요. 화보 사진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공유되고, 어린 학생들도 '어느 가게 사장님은 모델이야'라면서 찾아가고 '나도 저렇게 멋진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말할 만큼요. 이 도전이 세대 간 소통으로 이어지면 지역에도 활력이 생길 것 같습니다." (황현경 팀장)
월간옥이네 통권 66호(2022년 12월호)
글 한수진 사진 옥천마을미디어사회적협동조합·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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