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다 스윈튼과 태국 거장의 만남 '메모리아'
[김상목 기자]
▲ 영화 <메모리아> 포스터 이미지. |
ⓒ 찬란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신작은 전작인 <찬란함의 무덤>으로부터 6년 만에, 처음으로 감독의 고향인 태국 북부 정글을 벗어난 장소에서 만들어졌다. 21세기에 데뷔한 숱한 감독들 중에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데뷔 10년 만에 <엉클 분미>로 수상한 것처럼, 동 시대 예술영화감독 중 첫손에 꼽히는 확고한 위상을 지닌 그의 신작에 대한 목마름은 전 세계 시네필들에게 공통된 분위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게다가 감독에게 명성을 안겨준 익숙한 작업배경을 벗어난 이후 최초 공개되는 작품인 만큼 압박이 엄청났을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다행히도 아피찻퐁 감독은 그런 중압감을 응축시켜 동어반복이나 자가 복제를 피해가면서도 전작들에서 쌓아올린 성과를 한층 더 진화시켜냈다. 과연 신작 <메모리아>는 어떤 변주를 선보이는 걸까?
▲ 영화 <메모리아> 스틸 이미지. |
ⓒ 찬란 |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영화의 무대는 남미대륙의 문턱인 콜롬비아다. 그곳에 머물던 주인공 제시카(배우 틸다 스윈튼)는 언젠가부터 타인에겐 들리지 않는 '쿵' 소리에 시달린다.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아 봐도 별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 제시카는 지인 후안의 소개로 사운드 엔지니어를 찾아가 자신을 괴롭히는 소리를 찾는 작업을 이어간다. 여러 사건들이 주변에 발생하는 가운데 소리의 성격에 대해 실마리를 찾은 그는 본격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제시카는 산골 외딴 동네로 그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감독은 자신이 갖고 있던 '폭발성 머리 증후군(Exploding Head Syndrom)'에서 신작의 발상이 출발했다고 말한다. 어디선가 머리가 터질 듯 굉음이 불규칙하게 울리는 바람에 애를 먹었던 본인의 경험과 견고하게 구축해온 작품세계가 결합된 셈이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불편한 소음이 뇌리를 메우지만 실제로는 어떠한 소음도 확인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기막힐 테다. 그런 기이한 상황에 직면하는 개인의 실존을 영화는 느릿느릿, 하지만 현란하게 극화해낸다.
감독의 영화를 즐겨온 이들에게 더없이 친숙한 배경이던 태국의 정글을 떠나온 아피찻퐁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입구인 콜롬비아의 도시공간으로 무대를 옮긴다. 대도시의 풍경은 감독의 전작들을 봐온 이들에겐 생경한 이미지다. 하지만 도입부부터 흘러나오는 정체불명의 소음은 자세히 들어보면 인적은 없지만 그 안에 무수한 존재들이 느껴지는 정글의 숨소리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그 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주인공은 다시 감독 고향의 열대우림을 빼닮은 내륙 지방의 정글로 발걸음을 옮긴다. 소리를 매개로 시각적인 황홀경에 청각적인 소재를 추가해내는 진화를 선보인 셈이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전 세계 영화제와 예술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이후 늘 따라붙던 의문이 있다. 과연 이 감독이 자신에겐 너무나 익숙한 배경인 태국 정글을 벗어나는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적지 않은 감독들이 본인의 주요 활동무대를 떠나면 귤이 탱자가 되듯 위축되는 사례를 드러내온 만큼 누구나 기대 반 걱정 반 궁금했을 지점이다. 그 대답으로 감독은 고향의 정글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무대를 옮겨 공통점과 차이점을 골고루 선보이는 확장성을 신작을 통해 입증해보였다. 정글이라는 매력적 배경이 감독의 야심찬 비전에 의해 실로 무한한 가능성을 띤 새로운 장으로 탈바꿈되기 시작한다.
▲ 영화 <메모리아> 스틸 이미지. |
ⓒ 찬란 |
이 영화는 인간의 기억과 감각의 한계를 초과하는 영화적 체험을 관객에게 2시간 15분 동안 선사한다. 관객은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운 채 온전히 스크린과 사운드에 집중해야 한다. 통상적인 상업영화의 속도감과는 동떨어진 진행속도라 기승전결이 예정된 드라마보다는 미술관에서 자유롭게 전시를 따라가는 질감에 가까운 체험이다. 그런 생소한 분위기 때문에 종종 관객은 길을 잃고 만다. 다행히 정글 속에서 헤매는 시행착오를 최소화한 채 집중력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어느 순간부터 관객은 우주적인 시공간으로 전이되는 신비체험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 대해 보편적인 장르 구분법 대신에 '시네마틱 사운드 오디세이'라는 괴악한 신조어를 갖다 붙이는 건 의외로 잘 들어맞는 적절한 표현이다.
<메모리아>는 기억을 발견하고 해석하기 위한 경로 찾기에 소리를 매개로 삼는 작업이다. 이미 정평이 난 감독 고유 미장센에 사운드 효과와 구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자 전면적으로 나선다. 그에 걸맞게 본 작품의 사운드는 무려 7.1채널로 세팅되어 있다. 통상적인 5.1채널에서 대폭 보강된 보기 드문 시도다. 그만큼 <메모리아>는 안방이 아니라 제대로 음향장비를 세팅해놓은 극장에서의 관람을 전제로 한 작업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블록버스터 끝판 왕 <아바타> 시리즈가 시각적인 황홀경 체험을 위해 전통적인 내러티브를 도구로 삼는 것처럼, <메모리아>는 청각적인 몰입을 중시하는 도전이 되는 셈이다.
'시네마틱' 체험이라는 표현은 흔히 대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가 현란한 특수효과를 통해 선보이는 시각적 쾌감으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유원지 테마파크가 선사하는 롤러코스터 체험과 영화적 스펙터클은 동일할 수 없다. 예술영화로 분류되는 작업들 중에도 그런 도전은 숱하게 발견되어온 바 있다. 그런 유형의 최신 사례로서 <메모리아>는 OTT의 도전에 대해 영화만이 선보일 수 있는 면모는 이런 것이다! 하는 야심을 펼쳐 보인다.
영화 속에서 연속되는 소리는 그저 불협화음일 리 없다. 얼핏 맥락과 의미라곤 없어 보일지언정 그 안에 담긴 과거의 기억들은 정치적·역사적인 접근법 경로를 빈틈없이 감춰둔 채다. 감독의 전작들이 태국의 전승과 민담부터 현대사의 정치적 갈등과 상흔까지 아우르는 이야기를 선보인 것을 상기해보자. '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새로운 무공 초식을 선보이는 본 작품 또한 행간에 감독이 이것저것 갈무리해뒀으리라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영화 <메모리아> 스틸 이미지. |
ⓒ 찬란 |
제시카가 병원에서 목격하는 6000년 전의 천공수술 흔적을 가진 유골은 그가 겪는 괴이한 소음이 인류 역사와 함께 한 오래된 현상임을 짐작케 해준다. 그리고 밀림으로 진입할수록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소리들은 과거 라틴아메리카가 겪은 기억과 연동되기 시작한다. 고대 문명의 자취에서 정복과 식민 그리고 정치적 혼란을 거듭한 대륙의 사연이 암호처럼 하나둘 드러나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소리는 기억을 내포하고, 그 기억은 시공간을 초월한 대화이자 세계의 진실을 여는 창으로 기능하는 듯 보인다.
물론 이 영화를 지극히 개인적 방식으로 관람한다 해서 딱히 틀렸다거나 문제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감독이 구체적으로 정치나 역사적 맥락을 풀어내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관객이 아무리 치열하게 시사적인 관점으로 영화를 대한다 해도 반드시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그저 보는 이들 각자 마음껏 중력에 갇혀있던 속박을 벗어나 우주에서 무중력 상태로 유영하며 제각각 꿈을 꾸게 만드는 식이다. 시간이 지나면 친절하게 결말을 제시해주는 게 아니라 관객 각자가 답을 찾아야 한다. 결코 친절한 태도는 아니다.
결국 <메모리아>는 정답을 도출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드는 기획이다. 이 영화를 본 감상을 수식어를 통해 규격화하기란 지독하게 난감한 일이다. '형언할 수 없다'는 탄식이 절로 나올 법하다. 하지만 강렬한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느낀 건 분명하다. 이 영화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내가 대체 무엇을 본 걸까?" 필사의 탐구가 시작될 테다. 마치 네시나 설인 같은 미지의 생물들, 일명 '크립티드'라 불리는 존재를 목격하긴 했는데 증인은 달랑 나 혼자고 아무런 증거도 자료도 없는 그런 심정에 가깝다.
<작품정보> |
메모리아 Memoria 2021|콜롬비아, 태국, 프랑스 외|시네마틱 사운드 오디세이 2022.12.29. 개봉|135분|12세 관람가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주연 틸다 스윈튼 출연 엘킨 디아스, 잔느 발리바, 후안 파블로 우레고, 다니엘 히메네스 카초 수입 및 배급 찬란 공동배급 소지섭, ㈜ 51k 2021 74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2021 57회 시카고국제영화제 골드휴고 작품상-국제경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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