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서울을 생각하다]상업화만 남은 '한국식 젠트리피케이션'

2022. 12. 29.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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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 서울에도 소위 ‘뜨는 동네’가 여럿이다. 어느 동네가 뜨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젠트리피케이션이다. 그 정의와 역사를 먼저 살펴보고 가기로 하자.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영국의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Ruth Glass)다. 일정 주거지에서의 주민 변화와 그 과정에서 특정한 사회 계층이 입는 피해에 대한 논의를 뜻하는 이 단어는 1964년 런던에서의 현상을 두고 처음 사용됐고, 이후 북미와 유럽 몇몇 도시에서 일어나는 현상에도 적용하게 됐다.

도시마다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적인 현상은 비슷하다. 즉, 오래되고 낙후된, 그래서 임대료가 싼 지역에 젊은 예술가 또는 비주류에 속한 이들이 조금씩 모여 살기 시작하고, 그들로 인해 새로운 카페나 식당, 개성 있는 가게 등이 들어서면서 지역의 상권이 점차 살아난다.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외지인들이 점점 찾아오기 시작하고,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상업 시설이 계속해서 늘어난다. 지역이 좋아지자 외지인들 가운데 이곳에서 ‘살고 싶은’ 이들이 늘어나고, 건물이나 집주인들은 이들을 위해 낡고 오래된 집을 고치면서 월세와 집값, 임대료 등을 올리기 시작한다.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이들은 살던 곳을 떠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오래된 공동체는 붕괴한다. 이들이 만들어낸 지역의 분위기도 사라지고, 남은 건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이들 또는 대기업 체인점들뿐이다. 원래 살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이 지역은 매력은 사라진 채, 땅값만 비싼, 개성 없는 부자 동네가 되고 만다.

유럽이나 북미에서 먼저 나타난 젠트리피케이션의 양상은 서울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매우 다른 부분이 있으니, 바로 상업 중심이라는 점이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서울 대학로의 풍경을 떠올리면 이해할 수 있다. 그 무렵 대학생들의 소비 능력이 올라가면서 대학로처럼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의 뒷골목 주택가에 상업 시설들이 꾸준히 들어서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큰 길가 중심으로 형성되던 상가들이 1980년대 말부터 골목 안쪽으로 점점 들어오면서 단독주택들이 하나둘 빠른 속도로 상업 시설로 바뀌었다. 그 뒤 1990년대 중반에 이르자 골목 안쪽의 단독주택들은 대부분 상업시설이나 다가구 주택으로 변했고, 이런 상업화로 인해 대학로는 주거 기능이 약해지고 온갖 가게들로 가득한 동네가 됐다. 비슷한 시기, 서울 홍대 앞도 거의 비슷한 변화 과정을 겪었고, 1990년대 말로 가면서 두 곳 모두 거주 기능은 거의 다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유럽이나 북미와 비슷한 사례도 없지 않다. 그 유일한 사례가 바로 북촌이다. 2000년대 서울시의 한옥 보존 사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이곳의 한옥을 고친 뒤 직접 살기도 하고, 별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지역에서 오래 살던 주민들은 집을 팔거나 떠나고, 그 거리에는 구경하러 온 외지인들을 위한 다양한 상업 공간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동시에 모든 부동산 가격은 치솟았고, 북촌은 어느덧 부촌이 됐다.

연남동 뒷골목, 식당 카페로 변신한 주택가./김현민 기자 kimhyun81@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 서촌, 연남동, 상수동, 성수동처럼 서울의 뜨는 동네를 보면 오래전의 대학로와 홍대 앞의 변화 과정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주거지였던 골목길 안쪽까지 다양한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주거 기능은 점점 약해지거나 사라지고 있다. 앞서 이미 인기를 끈 익선동 역시 사람이 살던 한옥들은 이미 완벽하게 상업 공간으로 변신했고, 집값은 크게 올랐다.

비단 서울의 현상만은 아니다.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도시에서 일어나는 이런 현상은 젠트리피케이션이라기보다 단순한 상업화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유럽과 북미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집값의 상승으로 오래 살던 주민이 떠나는 현상이라면, 한국은 월세의 상승에 그치지 않고 공간이 사라지거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굳이 표현한다면 ‘상업화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한국에는 또 다른 젠트리피케이션도 있다. ‘신축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재개발 사업을 통해 지어진 아파트와 오피스텔이 주인공이다. 부동산 소유자, 건설사, 지자체가 협력해 지역 주민을 이주시킨 뒤 있던 건물을 전면 철거하고 아파트 중심의 새로운 주거지를 조성한다. 서울에서는 아파트값이 비싸니 새로 지은 이곳에는 원래 살던 주민들보다는 새로 유입된 고소득층 화이트칼라 계층이 살게 되고, 단기간에 이 지역은 서민들의 동네에서 도시 속 부유한 동네로 변신한다. 새로 지은 아파트 주변에는 새로 유입된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상업 공간이 들어오는데, 대부분 대기업의 체인점들이다.

서울의 서촌은 상업화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 바로 옆 교남동은 신축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 사례다. 이 두 지역은 서울의 미래와 관련해 중요한 문제점을 시사한다. 즉, 서촌처럼 외지인이 즐겨 찾는 지역에서 상업 공간이 주거지로 계속 침투한다면 사람이 살 수 있는 집들이 점점 줄어든다. 이는 곧 상주인구의 감소로 이어지고, 지역의 주거 기능 약화를 초래한다. 또한 교남동처럼 재개발로 인해 기존 집들을 철거하고 화려한 아파트 단지를 계속 지으면 1인 가구나 젊은이, 저소득층이 살 수 있는 저렴한 주택들이 사라진다. 저렴한 주택의 상실은 도심에 젊은 사람, 은퇴자, 저소득층, 1인 생활자 등 다양한 사회 계층의 형편에 맞는 주택이 사라지는 걸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도심에서는 더이상 이들이 살 수 없다.

이러한 한국식 젠트리피케이션이 계속되면 앞으로 서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고유한 매력이 있는 곳, 재개발이 어려운 곳들은 거의 다 사람이 살지 않고 상업 공간만 가득한 지역이 될 것이다. 재개발이 가능한 곳이라면 중산층 이상의 화이트칼라들만 사는 도시가 될 것이다. 과연 오늘날 서울이 꿈꾸는 미래에 어울리는 모습일까. 그래도 좋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런 도시에 활기와 창의성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런 도시에 과연 사회 정의가 존재하기는 할까?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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