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K-우먼]도전하기 두려울 땐 …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난소암 투병 끝에 만화 작가로 변신
숱한 제안에도 SNS 연재와 독립출판 고집
편집자주 - 아시아경제는 10월 19일 개최한 ‘2022 여성리더스포럼’에서 국내외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 가운데 40인을 ‘파워 K-우먼’으로 선정했습니다. 성별·인종·장애·가난 등 온갖 장벽과 경계에 직면해서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경계를 부수거나 뛰어넘어 새롭고 보편적인 가치를 창출한 여성 리더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친 세상에 위로를 주고, 누군가의 롤모델로 자리 잡아 공동체가 다시 나아갈 힘을 줄 것입니다.
"만화의 매력은 내가 생각한 어떤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마무리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오늘 생각한 것을 내일이라도 당장 세상에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에요. 마치 마법처럼."
얼굴도 본명도 공개하지 않는 웹툰 작가 수신지. 그림책에 삽화를 그리는 평범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던 그는 2012년 ‘3그램’이라는 만화로 데뷔, 2017년 ‘며느라기’라는 만화를 그려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연재했다.
왜 부부는 위치가 다른거지?
"그냥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결혼만 하면 부부 사이의 위치적 관계가 변하는지. 평범한 결혼 생활에서도 수위가 높지는 않지만 어떤 억압과 불평등이 내재하잖아요. 그런데 여성들이 그런 스트레스에 점차 길들여진다는 걸 알았죠. 은근히 서러운데 말하자니 치사해서,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에 적응해 가는 거죠"
그는 결혼 후 여성들에게 벌어지는 이상한 억압과 차별에 담담하게 돋보기를 들이댔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그냥 지나치던 대한민국 수많은 며느리의 일상 풍경이 불합리한 사건으로 자각되기 시작했다. 대단한 갈등도 첨예하고 거친 대사도 없이. 60만 팔로워의 사랑을 받은 이 웹툰은 동명의 웹드라마로 제작돼 카카오TV로 방영됐고 누적 1700만뷰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며느라기’는 2017년 ‘오늘의 우리 만화’에 선정됐다. 수신지 작가는 ‘한국 만화가 협회장상’을 받았으며 2018년엔 ‘올해의 성평등문화상 부문 청강문화상’과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문화체육부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사람들은 스토리뿐 아니라 새로운 연재 방식에도 주목했다. "작가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선사했다"는 찬사에 가까운 시상평을 들었다. 그전까지는 플랫폼이나 출판사 등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야만 작품이 대중에게 노출될 수 있었지만 요즘은 그처럼 SNS에 자유롭게 올리는 만화가들이 많아졌다.
"정식으로 급여를 받고 연재를 하려면 어떤 기준에 맞는 스토리나 완성도가 있어야 되거든요. 이제는 그림이 서툴러도 내용만 좋으면 인기 있는 경우도 많고. 각자의 사소한 이야기가 다양하게 나온다는 게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작가로서 자신이 경험한 어려움과 즐거움을 충분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는 물론 독자들에게도 행복한 일. 하지만 작가들 중에는 아직도 ‘이게 유명해지려면 팔로워 수가 최소한 몇 만명은 되어야 하는데’ 고민하면서 시작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수신지 작가는 "그냥 내 이야기를 사람들이 들어주고 공감해 줬으면 좋겠다는 그 생각이 중요하다"고 독려한다. "일단 올리고 나서 한두 개라도 댓글이 달리면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대학 졸업 후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꿈
수신지 작가는 사실 만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출판사 관계자의 권유로 일러스트레이션을 하게 됐고, 그의 관심은 오로지 유명 일레스트레이터가 되는 것이었다. 주변에 같이 공부한 친구 중에도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없다.
그러던 중 2006년 가을, 고작 스물여섯 살에 그가 난소암에 걸린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난의 선물이었달까. 난소암으로 투병할 때 그는 "사람들이 하는 위로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위로의 말들이 약간 꼬여서 들렸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병원에 비치된 암 환자들의 후기가 실린 잡지들을 찾아 보기 시작했다.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가 아니라 결국엔 나았고 괜찮아졌다는 얘기, 그 실제 증거들을 보고 안심하고 싶었다.
"투병 생활 하고 나서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보다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전시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나도 무사하게 살아남았다는 걸 전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고 싶었죠."
이렇게 탄생한 투병기가 ‘3그램’이다. 3그램은 작가가 수술로 잃은 난소의 무게다. 그는 작업이 끝났을 때 200권을 독립 출판해서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전시했다. 그러다가 2년 정도 후에 유명 만화 출판사 미메시스에서 연락이 와서 책을 출간하게 됐다.
"암투병 때문에 만화라는 멋진 세계를 만난 것은 맞아요. 근데 사실 지나고 나서 잘 마무리가 됐으니 할 수 있는 얘기죠. 안 겪을 수 있다면 안 겪는 게 좋겠죠."
암 완치 판정 후 10년도 더 훌쩍 지난 일이라 이제는 특별한 관리 없이 일상생활 중이다. 그는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고 공용 TV에 코인 넣어서 보던 시절 이었다"며 "할머니들 취향에 맞는 드라마만 보고 단체 생활하는 게 항암치료보다 더 힘들었다"며 웃는다. 젊은이에게 지루함은 참을 수 없는 고통임을 작가는 그때 알았다.
사실 난소암을 겪고 그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시간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전까지도 그는 늘 열심히 산다고 자부하고 살았는데 그 바탕에는 시간이 늘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할 때도 ‘지금 나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뭔가 성취를 이루면 나의 이름도 알려지겠지, 지금은 내가 그걸 준비하는 기간이다’ 이렇게 자위했다.
"솔직히 제 그림도 스스로 좀 부끄러워했어요. 그러면서도 언젠가 나를 알아주고 유명 출판사에서 연락이 오겠지 하며 기대하고 살았는데. 아프고 나니까 그 기회라는 게 오지 않고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시간이라는 게 내 앞에 마냥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동안 유명한 외국 일러스트레이터 그림을 따라 그리며 골방에서 조용하게 연습하던 작가는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꼭 부합하지 않아도 그냥 지금이 좀 부족하더라도 솔직하게 세상에 보여 보자"고 스스로 용기를 냈다.
지금도 간혹 사람들이 그에게 ‘실패하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지 묻곤 한다. 그는 "유명한 작업을 기준으로 삼아 그걸 선망하면서 자기 것을 꺼내놓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다"며 "하지만 그러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는 "게다가 요즘 독자들은 잘 그린 그림보다는 친근하고 공감되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지금 세상 자체는 생각의 틀만 깨면 굉장히 좋은 기회가 열려 있어요. 그런데도 아직도 많은 작가가 기술적 한계가 아닌 생각의 한계에 부딪혀 있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리고 아직 멋있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 나왔을 때 피드백을 받으면서 성장을 하는 거더라구요. 저도 그렇고."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그는 ‘며느라기’ 이후 유명 플랫폼과 웹툰 사이트의 제안을 거절하고 여전히 SNS와 독립출판을 고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홈페이지에서 굿즈도 만들어 팔고 행사도 기획한다. 유명 웹툰 작가들의 경우 연재 수입이 어마어마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SNS로 발행하고 책으로 제작해 판매하면 상대적으로 그 수입이 훨씬 적을 수밖에 없다. 수입도 수입이지만 1인 다역을 하는 이 과정이 무척 고될 것 같다. 더구나 혼자 모든 과정을 소화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사실 처음엔 연재하고 싶어 여기저기 문을 두드렸지만 거절당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유명 웹툰 사이트에서 연재하자고 연락이 왔을 때는 민사린이라는 주인공이 SNS에 웹툰을 올린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좋아서 이걸 유지하고 싶더라구요. 웹툰 사이트에 연재하게 되면 설정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게 되니까."
그는 "콘텐츠 내용과 성격에 가장 잘 맞는 방식으로 독자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며느라기’와 ‘곤’ 작품 모두 담고 있는 메시지가 많은 사람에게 퍼지는 게 중요해서 SNS에 올리는게 어울렸다. 물론 다음 이야기들은 그에 맞는 형식을 찾아 갈거다.
작가는 지난달부터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연재를 시작했다. 오래 전 단편 만화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을 장편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일상적 소소함을 세밀하게 드러내서 공감을 증폭시킨다는 평을 듣는 그는 모든 작품이 자기 경험에서 출발했다.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고등학교 때, ‘스트리트 페인터’는 대학 졸업 후 초상화로 아르바이트 하던 시절, ‘며느라기’는 결혼 후 경험이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고 주창하며 오토픽션이라는 자전적 글쓰기 장르를 개척한 2022년 노벨상 수상작가 아니 에르노가 연상된다. 자전적 글쓰기는 시대적인 흐름인걸까. 그가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인지 궁금하다.
"사실 저는 그게 작가로서 저의 한계라고 생각해요. 제가 아예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두렵거든요. 상상만으로 어떤 이야기를 과연 재밌게 그려낼 수 있을까가 저에겐 도전 과제입니다."
시대와 공감하는 작가 되고 싶어
그는 ‘곤’ 작업을 하면서 낙태죄 폐지라는 주제의식에 천착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주제의식이 너무 강했던 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주제가 있지만 이야기가 먼저 보이는, 스토리가 재밌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다.
수신지라는 필명은 ‘3그램’ 작업할 때 일러스트레이션에서 만화라는 새로운 작업에 들어가면서 이름 석자 배열만 바꿔 급하게 지은 것이다. 그런데 그가 창작자이다보니 마치 ‘메시지가 도달하는 목적지’라는 의미로 지은 것처럼 의미 부여를 하게 된다. 작가로서 그가 도달하고 싶은 목적지는 어디일까.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을 죽을 때까지 계속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시대의 코드에 뒤처지면 안되는데. 빠른 시대의 속도 속에서도 늘 현재성을 갖고 시대와 공감하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어요."
추명희 작가 jedda@asiae.co.kr
추명희 기자 jedd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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