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미래는 '다정한 것'에 달렸다

윤일희 2022. 12. 29.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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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중심의 과학기술사 뒤집어보기 카트리에 마르살 지음 <지구를 구할 여자들>

[윤일희 기자]

차를 바꿀 계획이라면 보통은 전기차를 염두에 둘 것이다. 기후 위기로 자동차 연료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어서인데, 탄소를 내뿜는 연료차를 대체할 대안으로 전기차가 등극했기 때문이다. 다들 전기차하면 일론 머스크 같은 천재의 재능으로 발명됐다고들 생각하지만, 이 책 <지구를 구할 여자들>을 읽어보면 반전의 진실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카트리에 마르살 지음 '지구를 구할 여자들' 겉표지.
ⓒ 부키
 
1903년에 게재된 한 광고는 전기 자동차를 소음과 냄새가 없는 깨끗하고 편안하고 우아한 자동차로 소개한다. 당시 연료 자동차는 크랭크로 시동을 걸어야 했는데, 이 작업은 힘들 뿐만 아니라 쉽게 더러워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료 자동차 크랭크 시동이 당시 숙녀들에게 불편하다고 여겨졌는데, 이 약점을 보완해 전기 시동장치가 달린 전기차가 등장했다.

편리함과 깨끗함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전기자동차의 판매는 부진했다. 연료 자동차가 곧 남성다움이라는 못 말릴 젠더 관념이, "진정한 남자는 크랭크로 시동을 건다"는 말을 유통시키며 전기차를 여성화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나 타는 열등한 것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전기차는 혁신적인 발명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어떤가? 테슬라 전기차가 남성들의 열호 속에 개념 있고 폼 나는 남성성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과 비교해 보면 실소가 나오지 않는가? 이렇듯 "젠더 관념은 우리가 어떤 기계를 개발할지에 영향을 미친다."

젠더 편향이 부른 기술의 차별은 비단 전기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서 잠깐 2017년에 개봉한 영화 <히든 피겨스>의 몇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 영화는 1960년대 NASA에서 벌어진 인종 차별과 여성차별을 멋지게 깨부순 걸출한 흑인 여성 영웅들의 실화를 다룬 이야기다. 영화 속에는 미국 우주 궤도 비행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발탁된 뛰어난 흑인 수학자 캐서린 존슨이 등장한다.

NASA는 최초 우주비행을 성공시키기 위해 비행 궤도를 계산할 사람 특히 여성이 필요했다. 여성들이 고용된 것은 안타깝게도 여성의 뛰어남을 인지해서가 아니라, 일명 'Girl Hour(여성 시간)'라 불리는 싼 임금 때문이었다.

당시 남자들은 책상에 하루 종일 앉아 계산이나 하고 있는 지루한 일은 남자답지 않다고 여겼기에, 이 인력 시장에 유인되지 않았다. 결국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계산하는 여성들은 이들의 수학적 능력과 무관하게, 젠더로 차별받은 저임금 여성들이었다.

영화 속 또 하나의 장면은 NASA의 IBM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담당하는 많은 여성들의 모습이다. 이 역시 실제 인물이었던 도로시 본이 등장하는데, 그는 당시 NASA에서 유일하게 IBM 컴퓨터를 작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도 흑인이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저임금 차별을 당했다. 이토록 여성으로 게토화되었던 컴퓨터 직종은 어떻게 남성의 영역으로 넘어갔을까?

당시 남성들이 컴퓨터를 여성화하고 기피하자, 남성들의 관심과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특별한 공적 제도를 고안한다. 컴퓨터 직종의 여성들을 다룰 관리직으로 즉 여성들의 상사로 남성들을 기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은 상상하는 대로다. 여성들은 임금과 승진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컴퓨터 직종에서 여성 종사자가 급격히 줄기 시작하자, 여성들이 사라진 컴퓨터 직종은 남성 중심의 고임금 분야로 변신한다. 컴퓨터 직종을 남성 중심 고임금 직종으로 전환하기 위해 여성들을 퇴출한 것이다. 그 많던 여성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사살 상 추방되었지만, "75년 전만 해도 컴퓨터는 여성이었다."

젠더 차별은 경제의 영역에서도 도드라진다. 미국의 경우 사업체의 40%가 여성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벤처캐피털의 고작 1% 미만이 여성 창업자에게 돌아간다. 여성 소유 사업체의 수익이 남성보다 높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여성 사업자는 신용 대출에서 배제된다.

여성 최초로 노벨물리학상과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과학자 마리 퀴리를 그린 영화 <마리 퀴리>에서, 퀴리 여사는 여성 과학자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다른 무엇도 아닌 '돈(연구비)'을 꼽는다. 남성에게만 수혈되는 돈 줄기에서 배제된 여성에게 하늘이 낸 과학자의 자질은 무용지물이었다.

퀴리 여사가 과학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건, 그의 남편이 지원한 연구 자금 덕에 가능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을 배제하는 경제 시스템 때문에 "수많은 (여성)발명이 개발되지도 못한다."

책은 이 밖에도 반박할 수 없는 젠더 불평등한 남성 중심 기술 편향과 그 차별상을 또박또박 적고 있다. 미래 기술 핵심으로 인공지능에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지능이 "교육 수준이 높은 남성 과학자들이 어려워하는 문제와 씨름하는 능력"이라 여겨지며 고평가되기 때문이다.

이는 오랫동안 몸과 정신을 분리하고 위계화해 온 이분법이 몸보다 정신을 우월하다 여겼기에 가능한 관념인데, 몸 없는 지능만으로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건 착각이다.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이 남자다운 것이라 믿고 이것을 기술이나 과학으로 표명해온 인류는 여전히 남성적인 것이 강하고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뿐 아니라 이제는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을 대체한다고 장담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고령화 사회를 목전에 둔 인류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의제는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돌봄이다. 어떤 인간도 돌봄에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없지만 돌봄은 철저히 자연화되고 비가시화된다. 돌봄은 늘 여성의 자연스런 역할로 간주되고 이로 인해 돌봄 직종은 비숙련 저임금 일자리로 고착돼왔다.

돌봄의 윤리를 고찰한 매들린 번팅은 그의 저서 <사랑의 노동>에서, "돌봄은 열린 과정이고 시간의 문제이며 협업하는 여러 사람의 손을 통해 작동되는 결과"임을 강조한다. 돌봄은 "매우 다차원적이며 모든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이 서로 영향을 받는" 영역이지만 매우 하찮은 일로 무시당하기 일쑤다.

영국의 한 인공지능 연구 기관조차 "돌봄에는 언제나 인간의 기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인공지능이나 로봇으로 대체할 수 없는 돌봄의 '관계성' 때문이다. 날마다의 삶을 의존하는 본질에 관계의 돌봄이 있다.

저자가 미래 경제를 "관계 경제", "돌봄 경제"로 정의하는 이유와도 통한다. 그는 제2 기계시대 혁명적 잠재력은 기술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인간성을 직면하게 할 가능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을 정복하는 것에 주력했던 기술이나 경제 시스템은 더 이상 인류를 버티게 할 수 없다. 자연을 희생시켜 이룬 기술의 진보와 쓰고 버리고 사고 소비하는 것이 미덕이라 길들인 경제관념으로는 인류의 생존을 연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전기 자동차에서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젠더 편향 사례를 아우르며 '관계 경제'로 도약한 까닭은, '장악하고 짓밟고 파괴하는 것'을 혁신이라 믿어 온 경제 패러다임을 급진적으로 바꾸지 못하면, 지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인류를 구할 수 없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외치는 까닭이 이해되고도 남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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