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삶, 무한한 가능성…뮤지컬 ‘이프덴’ [쿡리뷰]
프랑스 철학가 장 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생은 B(Birth·탄생)와 D(Death·죽음) 사이의 C(Choice·선택)라고. 삶이란 거듭된 선택이 이끄는 사건의 총체. 지난 8일 개막한 뮤지컬 ‘이프덴’은 선택에 따라 두 개로 갈라진 엘리자베스의 삶을 조명한다. 베스와 리즈, 두 인생을 바쁘게 오가다 보면 모든 순간에 충실하자는 다짐에 다다른다.
39세, 여성, 무직, 이혼. 남편과 헤어지고 10년 만에 뉴욕으로 돌아온 엘리자베스는 앞날이 막막하다. 자신만 출발선에서 뒤처진 듯해 불안하다. 이웃사촌 케이트는 그를 거리공연으로 이끈다. 대학원 동기 루카스는 주거환경 개선 운동에 참여하자고 제안한다.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 케이트를 따라나선 삶은 리즈의 것, 루카스와 동행한 삶은 베스의 것이 된다. 리즈는 공원에서 조쉬를 만난다. 베스는 도시계획부에 취직한다.
선택은 숙제 같고 삶은 전쟁 같다. 리즈는 가정을 꾸린다. 아이도 가졌다. 하지만 임신은 그저 축복이 아니다. 호르몬이 솟구치고 몸은 무겁다. 리즈는 흐느낀다. “임신, X발.”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는 베스도 삶이 부대끼긴 마찬가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상사 때문에 머리를 싸매다가 홧김에 루카스와 밤을 보낸다. 침대에서 눈을 뜬 베스, 이렇게 노래한다. “왓 더 퍽. X 됐다.” 울상인 베스와 달리 객석에선 웃음보가 터진다.
‘이프덴’은 무턱대고 인생을 낙관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첫 번째 미덕이다. 매일 벌어지는 크고 작은 고난은 삶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안에서 엘리자베스는 옳은 선택을 내리려 애쓴다. 어떤 선택은 그를 절망으로 이끈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듯한 순간에도 새로운 문은 열린다. 작품은 거듭된 선택을 통해 우리 삶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엘리자베스는 말한다. “운명은 가능성의 범주 안에 있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뿐”이라고. 이런 그에게 운명은 마법 같은 기적을 선물한다. 관객에겐 각자의 삶을 그러쥘 용기를 준다.
‘이프덴’의 두 번째 미덕. 개성 강한 캐릭터가 잔뜩 등장한다. 극적 전개를 위해 캐릭터를 소모하지도 않는다. 인생의 모든 순간을 우주가 보내는 신호라고 여기는 케이트, 시니컬한 앤, 청년 주거환경 개선에 투신하는 루카스, 사랑이 넘치는 군의관 조쉬 등 등장인물 모두 각자 꿈을 향해 씩씩하게 나아간다. 좌충우돌하고 우당탕대는 이들의 일상은 유쾌하고 경쾌한 리듬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세 번째 미덕은 업데이트된 감수성이다. 게이와 레즈비언 커플 등 성 소수자를 정형화되지 않은 캐릭터로 그려낸다. 임신·출산·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청년 세대가 겪는 주거 불평등, 성차별과 기후위기 문제까지 등장인물 대사에 녹였다. 음악은 드라마 일부로 녹아들어 각 인물의 감정을 증폭한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로 퓰리처상과 토니상을 석권한 브라이언 요키 작가와 톰 킷 작곡가의 솜씨다. ‘이프덴’은 2014년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400회 넘게 공연됐다. 한국 공연은 이번 시즌이 처음이다.
출산 이후 ‘이프덴’으로 무대에 복귀한 엘리자베스 역의 배우 정선아는 그야말로 ‘인생 연기’를 펼친다. 코믹함을 곁들인 일상 연기로 작품에 경쾌함을 더하다가도 진한 감정을 우려내 눈물샘을 자극한다. 인생을 고민하고 사랑에 설레하며, 때론 ‘흑역사’에 몸부림도 치면서 엘리자베스를 실제 존재할 법한 인물로 그려낸다. 배우 박혜나와 유리아가 엘리자베스 역에 함께 캐스팅됐다. 루카스는 에녹·송원근, 조쉬는 조형균·신성민·윤소호가 번갈아 맡는다. 최현선·이아름솔·조휘·임별·박좌헌·김찬종·전해주 등 조연배우들도 감칠맛 나는 노래와 연기를 보여준다.
‘이프덴’은 끝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매일 매일 길은 열리고, 나도 몰래 다시 시작해”라는 첫 곡 가사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메시지는 상투적이지만, 과정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모든 삶이 상투적이지 않듯이. 공연은 내년 2월26일까지 서울 연건동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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