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짜미 예산협상]②"의장·여야 원내대표만 있으면 된다"…들러리 된 예결위
올해 예산은 감액규모도 못 정한 채 담판으로 넘어가
비공개 심사 뒤에 현수막 예산만 펄럭
편집자주 - 내년도 예산안이 법정기한을 3주 넘어 어렵사리 국회를 통과됐습니다. 준예산 사태를 피해 예산안이 처리됐으니, 이제 문제가 없을까요? 올해 예산심사는 증액동의권을 가진 정부·여당과 과반의석을 보유한 야당의 충돌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회 예산심사 제도 전반의 문제점이 한꺼번에 드러났습니다. 예산안이 가까스로 처리됐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 없는 것은 올해 문제점은 내년 예산에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편에 걸쳐 국회 예산심사 문제점을 조명하고 해법을 모색합니다.
[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국회의장하고 여야 원내대표, 딱 3명만 있으면 굴러가는 시스템이다."
지난 9월27일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반성과 혁신’ 토론회에서 국회 운영 제도의 개혁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현재 국회 운영 시스템의 작동방식을 꼬집으며 이같이 말했다. 실제 세법에서부터 예산안 협상까지 올해 연말에 진행됐던 내년 예산안 처리 과정은 조 의원의 지적을 단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사례였다.
물론 협상 과정에서는 원내대표 외에도 정책위의장과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 기획재정위원회 간사 등이 일부 논의에 참여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결정은 ‘비공개 담판’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런 방식의 처리방식은 꽉 막힌 협상을 여야 지도부 리더십으로 포장할 수도 있지만, 예산 심사나 조세 법률주의의 근간이 무너졌다는 지적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국회는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열어 예산안 전체 방향을 심사한 뒤 흔히 계수조정소위라고 불리는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를 열어, 상임위원회에서 심사한 예비심사 등을 토대로 예산안 심사에 나선다. 통상적으로 소위 단계에서 감액 심사를 마치면, 여야 간사들만 모여 ‘소소위’ 증액을 심사한다. 국회 예산 심사의 핵심으로 꼽히는 이 증액 심사 단계는 과거부터 속기록 한 줄 남지 않는 예산 심사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하지만 올해 상황은 더 심각했다. 통상적인 감액심사조차 소위에서 마쳐지지 않은 상태에서 끝났기 때문이다.
가령 지난해 예산 심사(2022년 예산)의 경우 소위 종료 때 "세출에서 1조2281억원, 세입에서 11억5200만원을 삭감했다"고 확정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었다. 반면 올해 예산 심사에서는 이같은 예결위 차원의 확정 규모조차 확정되지 않았다. 예결위는 파행 끝에 결국 감액심사도 마치지 못한 채 소소위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소소위로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 회의에서 어떤 사업이 얼마나 감액됐다고 정리한 뒤에 넘어가는 게 그동안 소위의 관행이었다"며 "이번에는 이 같은 정리 작업도 없어 소소위로 넘어가 예결위에서 공식적으로 뭐가 감액됐는지 모르는 채로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이미 소소위 단계에서부터 예산 심사는 비공개로 진행됐지만, 여야 예결위 간사는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후 여야 지도부가 나섰다. 하지만 이 단계 역시 어떤 공식적 기록도 없이 여야 간 협상으로만 진행됐다. 여야는 예결위 간사와 정책위의장의 참여하는 2+2 협의체, 이어 원내대표까지 참여하는 3+3 협의체, 의장과 원내대표 간 담판 등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여야는 수시로 협상을 벌였지만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의 기록은 전무하며, 협상 과정 내용도 알려지지 않았다.
여야 예산안 합의문, 여야 밀실심사 단적인 증거내년 예산안이 얼마나 밀실 속에서 진행됐는지를 단적으로 반영해주는 것은 지난 22일 여야간 예산안과 세법 관련 합의문에 드러났다. 합의문 1조 1항에는 "국회 예산 심의로 정부안 대비 4조6000억원을 감액"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감액 규모가 결국 여야 원내대표간 담판에 의해 합의됐음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켜준 것이다.
사실 예산안 협상 과정개별 사업 예산을 차치하고 여야가 가장 첨예하게 논란을 벌였던 부분은 감액 규모다. 감액이 중요한 이유는 정부 예산안에서 국회가 감액한 만큼 국회에서 증액이 논의되기 때문이다. 여야는 이 문제에 대해 첨예하게 엇갈렸다. 여당은 가급적 정부 예산안을 유지하려 했지만, 야당은 예산안 원안에서 대폭 삭감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올해는 재량지출 예산이 줄어 감액이 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정말 터무니없는 감액 수준을 내놓는다"고 반발했다. 정부·여당은 2조원에서 3조5000억원 규모, 야당은 5조원 수준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감액 규모는 추경호 경제부총리 등과 함께 여야 원내대표가 결론을 내리는 식으로 정리됐는데, 규모는 양측 주장의 중간에 가까운 지점이었다. 쟁점이 됐던 세부사업 예산 내용을 봐도 비슷했다. 야당의 우선사업인 지역사랑상품권 사업은 당초 야당 요구의 ‘절반’인 3525원이 편성됐다. 여당이 반드시 지키려 했던 행정안전부 경찰국과 법무부 인사관리단 예산도 ‘절반’은 유지됐다. 뿐만 아니라 여야 정치권 실세들의 지역 민원 예산이 늘어난 것도 확인됐다. 이미 언론 등에서는 여야 실세들의 지역구 예산이 늘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배진교 정의당 의원은 예산안 처리 당시 반대토론자로 나서서 "올해는 예산안 심사와 합의과정이 더욱 더 비공개로, 더 은밀하게 진행됐다"며 "국회 예결위 위원인 저를 포함한 예결위 위원 뿐만 아니라이 자리에 계신 대다수 의원들 모두, 예산 심사 상황을 알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나라살림연구소는 "이번 예산심사 중 국토교통부에서 (국회서) 증액된 사업은 모두 지역 개발 사업에 불과하다"며 "부여-익산, 도담-영천 전철, 춘천-속초 전철, 서해안선, 별내선 전철 등의 사업인데 이는 이전에 불용액이 많은 사업으로 증액해 봐야 지출하지도 못하는 ‘현수막용 증액’ 사업일 가능성이 높다"고 꼬집었다.
세법 심사 조세소위 여야 힘겨루기 탓에 4개월만에 구성세법도 마찬가지였다. 올해는 원구성 이후 세법을 심사할 조세소위를 여야 어느 쪽이 맡을지를 두고 힘겨루기를 한 끝에, 후반기 개원 4개월만인 지난달 6일에야 구성됐다. 이후 조세소위는 모두 6차례 논의했지만, 법인세 등에 대한 이견이 큰 탓에 조세소위 논의 틀에서 합의안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결국 세법들은 모조리 정부안이 부의된 뒤에 각각의 법안에 대해 국회 원내대표 간 합의를 반영한 세법이 수정안이라는 형태로 제출되는 식으로 처리됐다. 세법 역시 여야 간 원내대표 간 합의 방식으로 처리됨에 따라 베일 속에 감춰진 채 비공개로 합의됐다.
이 때문에 법인세법 등 표결 과정에서 의원들은 법안에 대해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의원들이 수시로 기권과 반대, 찬성 등을 바꿔가며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본회의 전광판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통상적으로 전자표결에 걸리는 시간보다 오랜 시간 동안 표결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은주 정의당 원내대표는 본회의에서 세법 개정에 항의하며 "헌법과 민주주의의 대원칙인 조세법률주의는 단지 의회에서 표결하라는 절차를 뜻하는 게 아니다"라며 "이해관계가 첨예한 조세에 대해 시민 대표들이 충분한 토론과 조정을 거쳐 공익적 대안을 만들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수정안은 도깨비처럼 등장해, 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을 위협하고, 우리 국회를 모독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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