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짜배기 지식재산]버버리의 힘? 체크무늬 교복 못입게 된 사연
단속업체 의뢰·AI 활용하기도
상표권 보호·관리 허술하면
해외진출 지연 등 사업에 타격
[아시아경제 김보경 기자] 2024년부터 버버리 체크무늬 교복이 사라진다. 영국의 패션 브랜드 버버리가 교복 속 체크무늬는 자사의 상표권 침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주로 교복의 소매나 옷깃, 치마 등에 사용됐다. 물론 모든 체크무늬가 해당되는 건 아니다. 버버리 체크무늬와 유사한 패턴이 퇴출 대상이다. 현재 교복을 입고 있는 재학생이 아닌 신입생부터 새로운 디자인의 교복을 입으면 된다. 당초 내년 1학년부터 적용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교복업체를 대표해 버버리와 협의한 한국학생복산업협회에서 "행정 절차를 거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보내 2024년에 입학하는 1학년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즉, 버버리에서 1년의 유예기간을 준 셈이다. 앞서 버버리는 2013년에도 LG패션의 닥스 셔츠 등 체크무늬 제품을 상표권 침해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벌였다. 당시 법원은 LG패션이 버버리에 3000만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디자인권은 20년이 지나면 소멸되지만 상표권은 10년마다 무제한으로 갱신할 수 있다. 버버리처럼 특정 문양을 장기적·지속적으로 사용하면 출처를 식별할 수 있는 힘, 즉 상표로서의 식별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상표권 분쟁은 동종 업계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다. 루이비통 브랜드를 소유한 프랑스 LVMH그룹은 2015년 경기도 양평에 있는 루이비통닭(LOUIS VUITON DAK) 치킨집을 상대로 영업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루이비통이 연상되는 간판과 루이비통의 로고 디자인을 패러디한 치킨 포장이 문제가 됐다. 이때도 법원은 루이비통의 손을 들어줬고, 치킨집은 결국 문을 닫았다. 중과특허법률사무소 한국지사장인 이종기 변리사는 "해외 브랜드들은 저명 상표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며 "저명 상표에 편승해 이익을 취하려는 자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특허법인 우인의 최성우 변리사는 "명품업체들은 국내 로펌이나 상표권 전문 단속 업체에 의뢰해 유사 상표를 찾아내기도 한다"며 "최근에는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정밀한 단속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명품 브랜드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이처럼 디테일한 부분에서 시작한다"며 "오랫동안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평가했다.
지식재산권 침해 사례가 많은 중국에서도 외국 기업의 상표권 인정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해 중국 고등법원이 샤넬 향수의 겉포장을 모방한 A사의 유사 상품 판매를 중단하고 60만 위안(한화로 1억9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게 대표적이다. 직사각형의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 선으로 테두리를 하고 정면에 N˚5 라고 쓴 포장 박스가 도마 위에 올랐다. A사는 법원에서 "향수 가격이 저렴해 소비자들이 혼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맞섰다. 하지만 법원은 "가격 차이는 혼동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며 "실제 구매하기 전에 혼동 행위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러한 항변은 성립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판례와 관련해 한국지식재산보호원 관계자는 "한국 기업, 특히 화장품 기업은 겉포장과 장식에 대한 지식재산권을 철저히 관리해 분쟁 시 증거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며 "동종 상품의 상투적인 포장 디자인과 차별성을 둬 출처를 구별하는 요소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우리 기업의 지식재산권 관리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기업의 상표권 침해 대응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이종기 변리사를 만났다. 2018년까지 특허청에 몸담았던 이 변리사는 현재 중국 북경에 본사가 있는 중과특허법률사무소의 한국지사장을 맡고 있다. 이 변리사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상표권에 대한 인식이 안일한 게 사실"이라고 했다. 최근 패션 기업 B사는 그에게 "중국 상표 브로커로부터 상표를 선점당했다"며 상담을 의뢰했다고 한다. B사는 MZ세대를 중심으로 반향을 일으키며 빠르게 성장 곡선을 탄 기업이다. "B사가 어느 기업인지 기사에 밝혀도 되나"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 변리사는 간청하듯 말했다. "어느 기업인지 보도하시면 안 돼요. 저 밥줄 끊깁니다." 실명을 들어 상표 분쟁 사례를 소개하면 ‘상표권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까 기업이 부담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변리사는 "상표 브로커들은 쿠팡, 11번가 같은 온라인 쇼핑몰에 올라온 브랜드를 보고 모방 상표를 출원한다"며 "해외 진출 계획이 있다면, 브랜드를 대중에 노출하기 전에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상표를 출원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최소한 출원을 해야 나중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며 "일단 상표권을 빼앗기면 수많은 증거를 수집해 대응하거나 상대방이 악의적인 상표 브로커라는 걸 입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시간과 비용이 낭비되고 사업 진출이 지연되는 등 경영상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상표 무효심판을 진행한다 해도 결과적으로 상표권을 못 찾아오면 중국 진출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이 변리사는 "상표 등록에는 몇십만원의 비용이 들지만, 분쟁에 휘말리면 몇천만원으로 불어나고 사업에 막대한 피해를 미친다"면서 "상표 출원은 아이의 출생 신고처럼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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