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새해엔 '지배구조 퍼즐' 완성할까
대표이사 교체, 현대차‧기아 중고차 사업 진출로 새 국면
2023년 새해가 다가오면서 현대자동차그룹이 묵은 과제인 지배구조 개편에 속도를 낼지 관심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018년 지배구조의 핵심 축인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를 분할합병하는 방식의 개편을 시도하다 시장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당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배구조 개편 작업 중단을 선언하면서 향후 한층 보완된 방안을 만들어 재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대내외적으로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된 언급은 없었으나 5년차에 접어드는 새해에는 최소한 사전작업 수준의 움직임은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28일 재계에 따르면 아직까지 현대차그룹 내부적으로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된 가시적인 움직임은 없다. 다만 정의선 회장이 그룹 지배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실탄’ 역할을 할 수 있는 현대글로비스의 기업가치 상승 여부에 따라 상황이 급진전될 가능성이 점쳐진다.
이규복 부사장, 글로비스 기업 가치 높여 그룹 지배구조 개편 포석 '중책'
현대차그룹은 지난달 30일 사장단 인사에서 이규복 현대차 프로세스혁신사업부 전무를 부사장으로 승진시켜 현대글로비스 대표이사로 내정했다.
이번 인사에서 이 부사장 외에 루크 동커볼케 그룹 CCO(Chief Creative Officer)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한 게 전부였다. 동커볼케 사장의 보직이 유지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현대글로비스 대표를 교체하는 원 포인트 인사였다.
다른 계열사 CEO와 그룹 내 요직에 큰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안정에 중점을 둔 이번 인사에서 유독 현대글로비스 대표만 교체한 점이 의미심장하다.
재계에서는 이규복 신임 대표가 현대글로비스의 기업 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여 그룹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는 중책을 맡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현대글로비스의 최대주주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으로, 9월 말 기준 20%의 지분을 보유했다. 올해 초 23.29%에 달했던 지분이 공정거래법 사익편취 규제 확대(오너지분 30% 이상 상장사→20% 이상 상장사로 확대)로 3.29%를 매각하며 소폭 줄었지만 여전히 정 회장이 보유한 가장 큰 자산이다.
현대차그룹에 대한 정 회장의 지배력 유지를 전제로 하는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서 정 회장 부자가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은 중요한 ‘실탄’ 역할을 한다. 현대글로비스의 기업 가치가 높아질수록 개편 작업은 수월해진다.
현대차그룹은 큰 틀에서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를 갖고 있다. 그동안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은 기아→현대모비스의 모-자회사 관계를 해소해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현대모비스를 정점으로 하는 지배구조를 만드는 식이 될 것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관건은 0.32%에 불과한 정 회장의 현대모비스 지분을 확대해 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2018년 개편작업 당시 현대글로비스와의 분할합병을 시도하다 시장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현대차그룹이 재차 지배구조개편을 시도하는 시점에 현대글로비스 기업 가치가 높아진다면 정 회장이 이 지분을 매각해 현대모비스 지분을 사들일 자금을 마련하건, 지분을 현물 출자하건 수월한 개편 작업이 이뤄질 수 있다. 심지어 2018년의 분할합병 모델을 다시 시도하더라도 현대글로비스의 기업 가치가 높아진 시점이라면 주주들의 반응이 전향적으로 바뀔 수 있다.
이규복 신임 대표는 그간의 커리어만으로도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 특화된 경영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유럽 지역 판매법인장 및 미주 지역 생산법인 CFO(Chief Financial Officer)를 경험한 재무, 해외판매 기반 전략기획 전문가로, 현대차에서 수익성 중심 해외권역 책임경영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최근에는 현대차그룹의 지속가능한 미래 성장을 위한 프로세스 전반의 혁신을 담당해 왔다.
기존 주력 사업인 해운‧육상물류 분야에서 수익성을 높이는 한편 수소 사업과 스마트 물류, 로보틱스 등 다양한 미래사업에서 적기 투자를 통해 현대글로비스의 미래가치를 높이는 스페셜리스트 역할에 적임자로 평가된다.
현대차‧기아 중고차사업 진출…'점유율 제한'으로 글로비스에 기회
새해부터 그룹의 완성차 계열사인 현대자동차와 기아가 중고차 사업에 뛰어드는 것도 현대글로비스의 기업가치를 높여줄 수 있는 요인이다. 현대차‧기아가 확보할 수 있는 중고차 물량과 팔 수 있는 물량의 격차가 큰 관계로 상당 규모의 물량이 현대글로비스를 통해 기존 중고차 사업자들에게 경매로 넘어가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현대차‧기아는 중소벤처기업부 중소기업사업조정심의회의 권고에 따라 내년 1~4월 중고차 시범 판매를 진행한 뒤 5월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중고차 시장에 진출하더라도 기존 사업자들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약속 이행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일정 수준의 점유율 제한을 걸 예정이다.
현대차의 경우 중고차 사업 진출 허용 1년 유예가 결정되기 전인 지난 3월 중고차 사업 방향을 공개하며 사업 첫 해 시장점유율 2.5%를 시작으로, 2차년도 3.6%, 3차년도 5.1%까지 시장점유율을 자체적으로 제한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기아 역시 첫 해 1.9%를 시작으로 2차년도 2.6%, 3차년도 3.7%의 시장점유율을 제한하겠다는 내용의 중고차 사업 방향을 4월 공개했었다.
사업 진출 시점이 내년 5월로 밀리며 세부 수치는 바뀔 수 있지만 연도별로 일정 수준의 점유율 제한 약속은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신차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지닌 현대차‧기아는 중고차 사업 진출 이후 트레이드 인(중고차 매입 연계 신차 보상판매) 등의 방식으로 막대한 규모의 중고차를 확보하게 될 것으로 보이며, 이들 중 5년 10만km 이내의 자사 브랜드 중고차만 성능검사와 수리를 거쳐 인증중고차로 판매하고 나머지 물량은 경매 등으로 기존 매매업계에 공급한다는 방침이다.
인증중고차 기준에 적합한 차량이더라도 중고차 시장 점유율 제한을 초과하는 물량은 기존 중고차 사업자들에게 넘길 수밖에 없다.
현대차와 기아는 지난해 국내 시장에서 도합 126만대를 판매했다. 이들의 국내 신차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기준 완성차 업계 내에서 88%, 수입차까지 포함해도 73%에 달한다. 현대차‧기아의 신차 구매자들 중 절반만 트레이드 인 방식으로 구매한다고 쳐도 연간 60만대 이상의 중고차가 확보된다.
이는 전체 중고차 시장(2020년 기준 250만대)의 25%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현대차‧기아의 중고차 판매 점유율 제한이 내년 도합 5%라고 가정하면 나머지 30~40만대는 경매로 시장에 내놔야 한다.
현대글로비스는 국내 최대 중고차 경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해당 분야 선도 업체다. 현재 경기도 분당과 시화, 경남 양산에 중고차 경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중고차 경매장 출품 대수는 11만7000대 수준이었다.
현대차‧기아로부터 인증중고차 외 물량이 공급될 경우 단숨에 중고차 사업 규모가 5배까지 커질 수 있다.
현대글로비스는 주력 사업인 자동차 운송 사업을 통해 구축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중고차 수출 및 해외 유통까지 사업 영역 확장도 추진 중이다. 지난해부터는 중고차 업계와 소비자를 잇는 온라인 거래 중개 플랫폼 오토벨을 론칭하기도 했다. 경매 외에도 새로 늘어나는 중고차 물량을 통한 사업 확장 기회가 많다.
해외 중고차 사업 진출도 적극적이다. 지난 10월 미국 중고차 경매장 운영 업체 GEAA를 인수한 게 대표적이다. GEAA는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2003년부터 중고차 경매 사업을 해온 지역 유력 업체로, 5개의 경매 레인을 통해 연간 2만대가량 경매를 취급하고 있다. 등록된 회원 딜러 수는 4000여개에 달한다.
현대글로비스는 이를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사업을 늘려 2025년에는 미국 주요 도시 내 6개 경매장을 확보할 예정이다. 경매장 연계를 통해 도매·소매·수출 등 중고차 전 영역에 걸친 사업을 펼쳐 2025년 이후 연간 약 3000억원의 현지 매출을 구상하고 있다.
현대글로비스는 지난해 미주와 유럽, 중국, 아태 4대 권역 공략 계획을 세우고 현지 도소매, 플랫폼 사업을 추진 중으로, 향후 다른 국가로의 중고차 사업 확대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대차‧기아의 중고차 사업 진출은 어떤 식으로든 현대글로비스의 기업가치 상승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이는 곧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수월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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