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착륙은 면했다지만... [이상렬의 시시각각]
무역적자 확대, 부동산 거래절벽 등
진단도 대응도 한 박자 빨랐어야
윤석열 정부의 집권 첫해는 위기와 함께 시작했다. 취임 한 달도 안 돼 지방선거 승리를 거둔 뒤 소감에 대한 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 답변은 “여러분은 지금 집 창문이 흔들리고 마당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걸 못 느끼나”였다. “정당의 정치적 승리를 입에 담을 상황이 아니다”고도 했다. 모두 경제가 역대급 위기라고 했다. 중앙SUNDAY의 5월 전문가 조사에선 응답자 46명 전원이 ‘복합위기 상황’이라고 답했다. 세계 경제는 침체 일로였다. 그렇지만 한국 경제는 경착륙이나 불시착을 피했다. 대형 부도도, 대규모 실업도 없었다. 다행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몇 가지가 있다. 전투로 치면 고지를 사수하긴 했는데 피를 덜 흘릴 수 있지 않았을까 되돌아보게 되는 장면들이다.
우선 경고 포착과 적기 조치 미흡이다. 무역적자가 그런 경우다. 윤 대통령 취임 첫 달인 5월 17억 달러의 무역적자가 났다. 4월에 이어 두 달 연속 적자였다. 문재인 정부 말기인 2021년 12월과 올 1월도 적자였다. 무역전선에 상당한 탈이 나 있다는 신호였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움직인 건 8월 말이었다. 그제야 산업통상자원부의 ‘수출 경쟁력 강화 전략’이 윤 대통령이 주재한 ‘제7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 올랐다. 그 뒤로도 무역수지는 7개월 연속 적자다. 1~11월 누적으론 마이너스 425억 달러. 무역 통계 사상 최대다. 우리는 무역적자가 경상적자로 이어져 외환위기까지 간 나라다. 무역적자에 아무리 민감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부가 위기감을 갖고 좀 더 기민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을까.
부동산도 타이밍을 놓쳤다. 금리 인상과 부동산은 대개 상극이다. 최근 정부가 다주택자 규제를 뭉텅뭉텅 풀고 있지만, 늦었다는 인상을 떨칠 수 없다. 상반기에 이미 매수세가 사라져 거래 절벽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지난 정부가 대못처럼 박아놓은 반시장적 규제를 하루속히 풀어야 한다”는 건의가 점증했다. 보수 정권에서 경제수석을 지낸 인사는 “한번 식기 시작하면 급랭하는 것이 부동산이다. 새 정부가 규제 완화 쪽으로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수도권 규제도, 대출 규제도 한동안 그대로였다. 정부 발신 신호도 달랐다. 추가 하락이 불가피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가구소득 대비 주택가격비율(PIR)이란 지표로 설명했다. “현재 서울 PIR이 18인데, 이게 10~12 정도로 떨어져야 정상”이라고 했다. 30~40% 더 하락해야 한다는 것으로 들렸다. 하향안정을 바라서였겠지만, 너무 나갔다. 시장은 기겁했다. 정부가 집값 하락을 용인하는 걸로 비치면 시장은 더 얼어붙기 마련이다.
과잉 약속도 있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8월 말 기준금리를 2.25%에서 2.5%로 올렸다. 한국 기준금리가 미국의 기준금리(2.25~2.5%) 상단과 정확히 같아졌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이날 “기준금리를 0.25%포인트씩 인상하는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친절한 ‘포워드 가이던스’였다. 때를 잘못 골랐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물가 잡기 총력전 중이었다. 9월 하순이 되자 6월과 7월처럼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인상)을 밟았다. 한·미 간 금리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다음 금통위는 10월 12일. 속수무책이었다. 이 총재의 베이비 스텝(0.25%포인트 인상) 공언은 당국의 환율 방어 의지가 약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환율 급등의 빌미로 작용했다.
경제 운용엔 실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이, 전문가들이 입 아프도록 지적했던 문제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내년엔 더 어렵다고들 한다. 작은 실책이 용납되지 않는 진검승부의 해가 될 것이다. 올해 치른 비싼 수업료, 겪지 않아도 됐을 민생의 고통을 기억하길.
이상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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