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린 클라크의 문화산책] 인공지능 시대, 전통은 살아 남는다

2022. 12. 29.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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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린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

팬데믹 3년 만에 친구들과 가족들, 옆 나라 중국처럼 내게도 결국 올 것이 왔다. 가족과 성탄절을 보내기 위해 알래스카 고향으로 갈 비행기 표를 끊어 놨는데 처음으로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출국을 연기하고 휴일에 외로운 격리를 시작했다.

바이러스 때문에 기운이 없고 마감일은 다가오기에, 새로 설치한 챗GPT 앱을 사용해 칼럼을 써 볼까 싶은 유혹이 일었으나 물리쳤다. 챗GPT(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생성적 사전학습 변환기)는 질문과 프롬프트에 응답해 담화를 생성한다. 결과가 즉각적이고 매우 신빙성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도 있다. 온라인 sociobits.org의 칼럼 ‘챗GPT의 가장 우스꽝스럽고 괴상한 응답 10가지’에 따르면 챗GPT는 유리컵을 먹는 유익에 대한 에세이를 쓰라는 명령을 받자 곧장 완벽한 문법을 구사하면서 “(유리컵을 먹는 행위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놀라워 보일 수 있으나” 유리는 “완전히 천연이고” “실리콘의 훌륭한 원천”이라는 논지로 글을 썼다는 것이다.

「 AI ‘챗GPT’ 앱 처음 써봐
인간의 창조력 대체할까
국악계 사제전승 더 소중
전통도 계속해서 커나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발레 단원들이 국악 ‘침향무’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이렇듯 전통은 늘 새롭게 태어난다. 디지털 인공지능 시대에도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다. [연합뉴스]

챗GPT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어떤 것보다도 뛰어나다. 인간의 이성뿐 아니라 창조하는 능력까지 대체하려 하고, 우리가 창조한 것도 보존한다. 음악적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인생의 상당 부분을 바쳐온 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축적한 모든 지식을 디지털화해 사이버 공간에 저장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작품(책·그림·노래 등)을 생성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진짜’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인가.

‘전통의 정의는 죽은 자들로부터 받는 동류집단 압력’이라는 농담이 있다. 한국의 음악적 전통에서 이 농담이 농담으로만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피드백을 제공하는 산 스승의 구전으로 전수받는 방법이다. 초보자는 불완전한 음을 완벽한 음으로 오인하지만, 피와 살을 지닌 선생님은 잘못된 음을 곧장 잡아낸다.

오늘날 한국에는 그런 면역의 필요성을 인지하는 젊은이가 별로 없다. 내가 만난 이들 대부분은 국악을 현대 한국인의 삶에서 주변부를 떠도는 그림자, 과거의 망령이 지닌 고통(식민지, 분단, 전쟁, 끊임없는 변화 등의 고통)을 치료하는 만병통치약 정도로 생각한다. 대부분은 국악의 전통을 유지하는 일을 인간 대신 챗GPT 같은 앱에 맡겨버릴 것이다.

X세대인 나는 기술이 창조할 수 있는 심오한 아름다움과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깊은 상실의 가치를 알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었다. 한국에서 30년을 살면서 나는 전통의 가치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음악적 전통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한 번 상실하면 복원이 거의 불가능하다. 음악적 전통은 완성된 체계다. 그와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낼지는 모르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숙성되어 온 진정한 대가의 작품은 아닐 것이다.

전통은 그런 면에서 인간과 흡사하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전통도 호전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응한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생성해 내는 새로운 형태의 국악처럼 말이다. 적응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어느 지점에서 그 뿌리를 잃게 되면 전통은 더는 전통이라 할 수 없다. 챗GPT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기술에 적응하면서 우리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자신을 온전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지는 않을까.

지난가을, 나는 온라인으로 대체한 다섯 학기를 보내고 현장 강의로 복귀했다. 출석 체크를 하고 학생들이 앉아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들은 몸만 교실에 와 있고 생각은 스마트폰에 뺏겨 버린 것 같았다. 70명이 수강하는 강의에 들어가면 교실은 완전히 고요했다. 아무도 교실에 불을 켤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다들 어두운 교실에 앉아 마스크와 모자를 쓴 채 이어폰을 귀에 끼고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려갔다.

나는 “질문 있어요?” 라고 몇 번 물었다가 돌아오는 침묵에 여러 번 찔린 뒤로 그렇게 묻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그래도 이따금 누군가 손을 들어 주의를 끌고, 몇몇 학생들의 고개가 돌아가고, 의견을 나누면서 열띤 토론이 일었다. 그런 순간 때문에 계속 수업하게 된다. 마치 가야금을 배우면서 연주 기법을 터득하는 순간마다 소리를 탐구할 용기가 솟아나고 스승님의 뜻을 되살리려는 힘을 얻는 것과 같다.

코로나19에서 자유로워지면 내 삶을 구성한 전통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이어나갈 것이다. 이에 앞서, 늦게나마 알래스카로 날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재충전을 하지 않고는 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조세린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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