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6) 수술 以後(이후)
2022. 12. 29. 00:36
수술 以後(이후)
정일근(1958∼)
세계를 모두 잃고 詩를 얻다, 라고 쓴다
내 그릇에 담겨 있던 오욕 죄다 비워내고
정갈한 한 그릇의 물을 담았다, 라고 쓴다
-우리시대현대시조100인선 100 ‘만트라 만트라’
세모(歲暮)에 읽는 생명의 은총
시인은 큰 수술을 받았나 보다. 그러니 세계를 모두 잃었었겠지. 그러나 수술이 잘 되어 시를 얻었었겠지.
‘목욕을 하며’라는 시조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마흔 해 손 한 번 씻겨 드리지 못했는데/ 아들의 등을 미시는 어머니 우리 어머니/ 병에서 삶으로 돌아온 내 등 밀며 우신다.’
큰 병을 앓고 나면 알게 된다. 목숨 앞에서는 그 외의 것은 모두 사소한 것임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일상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시인은 몸속의 오욕을 죄다 비워내고 ‘정갈한 한 그릇의 물을 담았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숨 한 번 편히 쉬고 싶은, 물 한 모금이라도 목으로 삼키고 싶은, 물 한 방울이라도 제대로 짜내고 싶은 환자들이 고통받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지 않은 가운데 우리는 한 해를 아쉬움 속에 보낸다.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생명의 은총이 찾아오기를……. 그리하여 소생의 기쁨이 함께하기를……. 벼랑 끝에서 생명의 시를 얻은 정일근 시인처럼…….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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