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의 '남 탓 정치'로 경제위기 못 넘는다
[오준호 기자]
영화 <아바타2 - 물의 길>은 전편과 세계관에서 다른 점이 있다. 1편에서 제이크 설리의 의식이 인간 몸과 아바타인 나비족 몸을 오간다면, 2편에선 의식과 나비족 몸이 완전한 합체를 이룬다. 설리는 1편에선 본래 자신과 아바타의 괴리를 핑계로 자기 행동을 변명할 수 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설리는 나비족으로서 자기 결정에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상태가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정농단 사건 수사팀장이었고 문재인 정부에서 중앙지검장을 거쳐 검찰총장까지 지냈다. 지금 윤 대통령은 '문재인의 검찰총장'이 자아와 어긋난 잘못된 사회적 아바타였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 검사 윤석열의 자아는 문재인 정부와 갈등하며 영웅 서사를 만들었고, 끝내 자아와 일치하는 아바타를 찾기 이르렀다. 이제 검사 윤석열의 의식은 대통령이라는 사회적 몸에 완전히 합체했다. 그가 원하지 않는 것을 명령할 '보스'는 더 이상 없다.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8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개인정보보호위원회·원자력안전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국기에 경례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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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제부터다. 자아와 사회적 아바타가 일치한다면 자기 지위와 거기 파생되는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기본 중에 기본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 기본을 따르지 않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남탓'이다. 전 정권, 야당, 언론탓이다. 물가 상승은 전 정부가 현금을 무차별 살포해서고, 경기 침체는 세금 폭탄을 때렸기 때문이다. 지지율 하락은 언론이 가짜뉴스를 만들어서고, 야당이 정부 발목을 잡아서다. 안전운임제 연장을 요구하는 화물연대가 대화를 요청할 땐 무시하다가, 막상 물류가 멈추니 노조의 불법행위 때문이라고 책임을 떠넘긴다.
지난 26일엔 북한 무인기 여러 대가 서울 상공을 휘저어 국민이 충격을 받았는데, 이번에도 윤 대통령은 무인기를 격추 못한 책임을 전 정권의 잘못된 대북 정책과 대응 훈련 부족 때문이라고 전가했다. 집권한 지 7일 혹은 7주도 아니고 7개월이 넘은 정권이다. 이쯤 되면 윤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는 아바타에서 종종 의식이 달아나기라도 하는지 의심 안 할 수가 없다.
국민 158명이 도심 한복판에서 압사당한 이태원 참사에서조차 대통령은 공식적 대국민 사과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책임은 책임질 사람에게만 '딱딱' 물어야 한다며 고교 후배 이상민 행안부장관을 감쌌다. 대통령이 정한 가이드라인에 갇혀 특수본 수사는 좀처럼 윗선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당당한 이상민 장관은 27일 국정조사 기관보고에 나와 "이미 골든타임은 지난 시각이었다"는 망언을 보탰다. 현장 도착이 늦었다는 질타받자 자기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럼 누구 탓인가? 희생자가 더 오래 버티지 못한 잘못인가? 컨트롤타워도 없는 혼란 중에 인명구조에 애쓴 구조대원 잘못인가?
▲ 채용 줄이고 희망퇴직 늘어 '고용 한파'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국내 유통가, 금융권 등이 인력 감축과 비용 절감에 나서는 분위기다. 업계에서는 내년에 역대급 고용 한파가 몰려올 것을 우려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일 서울 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게시된 구인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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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의 남탓 버릇이 더 우려스러운 건 내년 우리 경제가 무척 불안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고물가와 고금리의 지속, 중국발 무역 감소 그리고 이에 따른 역대급 경기 침체와 고용 한파가 예상된다. 특히 올해 81만 명 증가한 고용은 내년에 10만 명 미만 증가로 크게 쪼그라들 것이다(2023년 정부 경제정책방향). 경기가 내년 하반기부터 회복될지 침체가 장기화할지 정부도 어느 연구기관도 확실히 예측하지 못한다.
불확실성의 파도가 치는 경제 여건을 헤쳐 나가려면 정부는 유연하게 정책을 조합하고 조정해야 한다. 실사구시적 정책 기조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그런데 전 정부의 정책은 악마화하고 무조건 반대하며 심지어 '통계 조작' 같은 혐의를 걸어 정책 판단 과정까지 사법 잣대를 들이대면, 윤석열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폭은 극히 좁아질 수밖에 없다.
양보해서 올해까지는 문재인 정부가 정한 예산과 세제의 틀 안에서 나라 살림을 꾸렸으니 전 정부탓을 할 수 있다고 하자. 내년은 오롯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시간이다. 윤 대통령은 예산안 확정이 한없이 늦어져도 야당탓을 하며 버티더니 사실상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었다. 내년도 예산안과 부수법안은 윤 대통령이 하고 싶은 감세, 긴축, 대기업 몰아주기, 원전 되살리기를 한 바구니에 넣어 통과됐다.
법인세에서 '최고세율 3%p 인하'라는 원안이 '과표구간별 1%p씩 인하'로 바뀌었으나 역시 초대기업이 가장 큰 혜택을 얻는다. 이를 제외하면 다주택자 종부세 완화, 금융투자소득세 유예, 상속증여세 공제 확대 등 대부분 안이 정부 뜻대로 통과됐다.
여야 합의를 반영해 내년 세수 계획을 새로 제출해야 하지 않느냐는 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질의에 기재부가 "세수 차이는 800억 원 정도로 미미할 것"이라 답한 것으로 봐도 예산안 정국의 승자는 윤석열 대통령이다. 민주당은 '부자 감세 대 서민 감세' 같은 얄궂은 프레임을 내걸고 싸우는 생색만 내다가 거의 모든 걸 다 내준 채 예산안 통과가 지연된 책임만 나눠 지게 됐다.
윤 정부는 뜻이 관철된 예산과 세제를 가지고 내년 경제 여건에 대응하면서 반등을 이뤄내야 한다. 고물가와 고금리와 구직 한파와 소득 상실로 고통받는 저소득 서민, 노동자, 자영업자, 청년, 노인의 삶을 붙잡아주어야 한다. 이 일을 못해내면 누구도 아닌 윤 정부의 책임이다. 감세와 긴축이 낙수효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이미 IMF나 세계은행도 인정한 사실조차 부정하며 얻어낸 예산이기 때문이다.
▲ 지난 22일 윤석열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서울 용산 청사가 불을 밝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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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내년에는 남탓하지 않는 대통령을 볼 수 있을까? 그 역시 의심스럽다. 윤 대통령은 일이 어떻게 되든 책임을 떠넘길 대상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찾은 대상은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다.
느닷없이 노동조합의 회계장부를 더 꼼꼼히 들여다보겠다고, 시민단체가 받는 보조금 사용을 감시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규모 있는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는 이미 법이 정한 감사제도를 운영하는데도 말이다. 정부·여당은 '기득권' '엄단' 같은 용어를 써가며 노조와 시민단체를 특권층으로 몰아가려 하고, 보수 언론은 신나게 지원사격 중이다. 이는 경제 회복이 비관적일 경우 그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빌드업'인 동시에 저항 세력을 선제적으로 무력화하는 방책으로 보인다.
이런 일에 적합인, 검찰 출신 인사들이 용산과 정부 기관에 포진해 있다. 설득보다 위협에, 협상보다는 수사에 능한 이들이다. 공정을 내세우지만 공정하지도 않다. 대통령 가족 비리에는 한없이 관대하고 전 정권 인사, 야당, 노조, 시민단체, 비판적 언론에는 시퍼런 칼을 들이댄다. 법을 무기로 권력에 아부하는 자들을 '법비(法匪)'라고 부른다. 나비족이 판도라의 대자연과 영혼으로 이어졌다면 법비족은 용산의 권력자와 이익으로 이어져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남탓을 더 세게 할수록 지지층이 결집한다고 학습한 듯하다. 이처럼 '남탓 정치'는 어떤 면에선 유용하다. 만들고 싶은 세상은 없어도 지키고 싶은 권력은 있을 때 그렇다. 어느 때보다 국민의 힘을 모아야 통과할 수 있는 경제위기가 닥쳐오는데, 우리에게 있는 건 남탓할 준비 하나는 완벽한 대통령과 정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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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는 기본소득정책연구소장, 기본소득당 공동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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