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 시작된 왜곡... '귀무덤'을 '코무덤'으로 바꾸다

이윤옥 2022. 12. 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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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경남 사천 '耳塚' 위령비 명칭 변경에 중심 역할 한 최진갑 박사

[이윤옥 기자]

▲ 사천 코무덤 위령비 경남 사천 선진리에 있는 조명군총 옆에 세워져 있는 '코무덤 위령비, 입구 오른쪽에 작은 안내판이 있다.(내용은 아래 사진 참조)
ⓒ 이윤옥
 
지난 23일, 서울은 올해 들어 가장 추운 영하 1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필 취재를 위해 경남 사천에 가기로 한 날 아침 일기예보는 전라지역 등 서해안 일대 폭설까지 예보하고 있었다. 취재지인 사천은 폭설과 상관 없지만, 무주 등 폭설 지방을 거치는 고속도로를 타야 했다. 일정을 바꿀까 고민하다가 눈 속이라도 뚫고 가 만나야 할 인물이 있어 약속대로 차를 몰았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한일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인 최진갑 박사였다.

사천이 고향인 최 박사는 자신의 고향땅에 역사 왜곡의 표상으로 서 있는 '耳塚(이총)' 위령비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했다. 이후 지난 1년여 동안 뛰어다니며 해당 관청인 사천시와 협의한 끝에, 본래 이름인 '코무덤'을 찾아온 인물이다. 

여기서 잠깐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있는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 세워져 있던 '耳塚' 위령비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耳塚'은 우리말로 '귀무덤'으로 귀가 묻혀있는 무덤이다. 그러나 조명군총 옆에 세워져 있는 것은 '위령비'일 뿐 귀가 묻혀있지는 않다. '耳塚'의 원형은 일본 교토시에 있는 '鼻塚(비총), 일본말로 하나즈카, 코무덤'에서 유래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토시에 현존하는 '鼻塚'은 400년 전인 정유재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은 무덤이다. 말만 들어도 섬뜩한 이 참상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한국측에서는 1990년 부산 자비사의 박삼중 스님을 중심으로 코무덤의 흙 일부를 봉환하여 사천시의 조명군총 옆에 묻었다. 이때 코무덤을 나타내는 '鼻塚'이라는 비(碑)를 세웠어야 하지만, 귀무덤을 뜻하는 '耳塚'이라고 새겨둔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사실 조명군총 옆에 있던 '耳塚' 비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최진갑 박사가 처음이 아니다. 기자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한겨레>가 2010년 공동 주최한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에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과 함께 동행 취재한 바 있으며 이후 사천, 부안 호벌치, 일본 교토 등을 오가며 취재하여 수차례에 걸쳐 '교토 코무덤이 귀무덤으로 둔갑되었다'라는 기사를 올렸다. 

그러나 이 문제에 전념할 수 없는 형편인지라 차일피일 시간만 보내고 있던 차에 지난 1월, 최진갑 박사로부터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후 '耳塚'이 '코무덤'으로 바로잡히기까지 최 박사와 수십 차례 소통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 코무덤 위령비 안내판 코무덤 위령비에 대한 안내판
ⓒ 이윤옥
 
그렇다면 어찌해서 경남 사천 조명군총 옆에 세워둔 코무덤 위령비가 '耳塚'이 된 것일까. 최 박사는 "국내에서 귀무덤으로 정착된 것은 언론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라며 "당시 언론에서 교토의 무덤을 '耳塚(귀무덤)'으로 앞다투어 보도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겨레> 4백 년 떠돌던 '귀무덤' 원혼 돌아온다(1990.04.20.)
<MBC> 임진왜란 때의 귀무덤 400년 만의 귀환(1990.04.22.)
<국민일보> 귀무덤 원혼들 (1990.04.24.)
<중앙일보> 귀무덤 원혼 고국 안치 /부산 동명불원에(1990.04.24.)
<동아일보> 귀무덤 '이총' 새 안식처(2007.10.01.)
  
국내 보도가 이렇게 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코무덤'이 있는 교토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교토시가 코무덤의 안내판(1979)을 세울 때 '耳塚'이라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耳塚(鼻塚)'으로 바뀐 상태다.

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기자는 지난 11월 24일 자로 교토시 문화시민국 문화예술도시추진실 문화재보호과(京都市文化市民局文化芸術都市推進室文化財保護課)에 질의를 했다. 기자는 교토 코무덤의 최초 안내판 설치 일자와 그 내용, 현재 안내판의 설치 일자와 그 내용 및 사진에 대해 물었고, 며칠 뒤 담당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답변과 현장 사진을 받았다.

"최초의 안내판 설치는 소화 54년 7월(1979.7.)이며, <耳塚(鼻塚)>이라고 병기하게 된 것은 평성 15년 3월(2003.3.)이다. 변경한 까닭은 예부터 <鼻塚>이라고 불려오던 적이 있다는 설이 있어서 <耳塚(鼻塚)>이라고 표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여 안내판을 수정했다."

그러나 담당자인 이에하라 씨의 답변 중 "예부터 '鼻塚'이라고 불려오던 적이 있다는 설이 있어서 '耳塚(鼻塚)'이라고 변경했다"라는 답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토 코무덤은 조성 당시부터 줄곧 '鼻塚'이었고, 근거가 불명확한 '설(設)'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명확한 근거들이 문헌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 교토 코무덤 일본 교토시에 있는 코무덤은 정유재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공(戰功)을 자랑하기 위해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만든 무덤이다
ⓒ 이윤옥
 
이에 대한 근거로 메이지시대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던 호시노 히사시(星野恒 1839~1917) 박사의 논문만큼 명백한 자료도 없다. 호시노 교수는 '교토 대불전 앞의 무덤은 코무덤이며 귀무덤이 아니다(京都大仏殿の塚は鼻塚にして耳塚にあらざる)'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단연코 이 무덤이 '코무덤'임을 밝혔다.

호시노 박사의 논문보다 250년이나 앞선 기록인 1620년의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에도, "이총(耳塚), 대불전(大佛展) 앞에 있다. 세상에서는 이총(耳塚)으로 부르나 사실은 비총(鼻塚)이다. 1597년 가등청정(加籐淸正),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이 조선인의 코를 베어 온 것이다. 두 장수의 병력은 20만으로 1인당 조선인의 코 3개를 베어오라고 했다. 조선에서는 감독관이 이를 확인하여 소금에 절여 보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 구참모본부가 펴낸 <일본전사(日本戰史)> 속의 <청정고려진각서(淸正高麗陳覺書)>에도 교토의 무덤이 '코무덤'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무덤의 이름이 '귀무덤'으로 왜곡된 것일까? 그것은 에도정부의 참모였던 젊은 학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의 "코무덤은 잔인하므로 순화하여 귀무덤으로 부르자"라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주장 때문에 교토의 코무덤은 귀무덤으로 둔갑된 채 오늘에 이르렀고, 경남 사천시의 조명군총 옆에도 '耳塚' 위령비가 세워진 것이다. 

최진갑 박사는 먼저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하고, 1990년 교토시에서 코무덤 유토를 봉환해온 박삼중 스님을 두 차례 방문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년여 만에 '耳塚'을 '코무덤'으로 바꾸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지난 11월 29일엔 사천시로부터 '코무덤 안내판'을 설치했다는 통보도 받았다. 
 
▲ 새로 수정된 사천 '코무덤' 위령비 최진갑 박사의 국민신문고 민원에 의해 새로 수정된 '코무덤' 위령비(왼쪽), 수정되기 전까지 세워져 있던 '耳塚' 위령비(오른쪽)
ⓒ 이윤옥
 
다음은 지난 23일 사천 시내 한 카페에서 만난 최진갑 박사와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낸 뒤 사천시에 '코무덤' 명칭 변경을 위한 자료 제출 등 박삼중 스님과 사천시에 이어 사천문화원과 회의 및 의견 제시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교토에 있는 무덤 이름이 '이총'에서 '이(비)총'으로 바뀌었지만, 이 역시 원래 명칭이 아니며 조성 당시의 이름이 '비총'이라는 명확한 근거자료를 시대별로 정리하고 문헌을 첨부하여 '비명(碑銘) 정정 사유서'라는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이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토 코무덤의 유토를 봉환해온 민관단체(대표 박삼중 스님)를 찾아가서 '귀무덤'이 아니고 '코무덤'이 진짜 명칭이라는 점을 설명하면서 각종 자료를 제시하고 명칭 변경을 허락받는 일 또한 힘들었습니다."

- 사천시 '코무덤' 뿐 아니라 부안군 호벌치에 있는 '코무덤' 관련해서도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낸 것으로 압니다. 아울러 순천과 진도에서도 코무덤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전라북도 부안군 호벌치에도 '코무덤'이 있습니다. 이곳은 코무덤만 있고 30년째 추모비와 안내판 없이 방치되었습니다. 지난 1월 국민신문고에 이곳에 대한 민원을 냈고 12월 말까지 추모비와 안내판을 설치하기로 하여 제작 중입니다. 순천시에도 (사)귀무덤봉환추진본부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순천지역은 정유재란 때 코가 잘린 곳이므로 (사)코무덤봉환추진본부로 정정해야 합니다. 또 진도문화원은 코로나19 돌림병 이전, 해마다 교토 코무덤 앞에서 '왜덕산 사람들의 교토 코무덤 평화제'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2022년 9월 진도국제학술회의에서는 '교토 귀무덤'이란 이름으로 업무협약(MOU)를 맺었는데 이는 잘못된 일입니다."
 
▲ 최진갑 2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내고 각종 문헌자료를 제시하여 '耳塚'에서 '코무덤'으로 위령비 이름을 고치게 한 최진갑 박사
ⓒ 이윤옥
 
- 교토 코무덤을 비롯한 일본의 태도와 국내 학자들, 지방자치단체의 태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십시오.

"임진·정유 침략전쟁에 참전한 일본군 후손들이 발행한 기록물은 대체로 자신들 선조의 공(功)은 부풀리고 과(過)는 축소하는 등 왜곡된 부분이 존재하므로 참고는 하되 코, 귀무덤의 판단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게다가 얼마 되지도 않는 귀, 코무덤 선행연구 자료를 가지고 학계 제출보고서의 분량을 채워 '귀무덤'으로 오판하지 마시고 일본 국가지정 중요문서를 가지고 제대로 '코무덤'을 인식했으면 합니다.

거듭 밝히지만, 일본국가 지정 문서에 따르면 정유재란 시에는 코를 베었기에 귀와는 무관합니다. 따라서 정유재란 때 축조된 교토 무덤은 '코무덤'으로 불러야 합니다. 아울러, 지방자치단체 관리자는 지역 내에 있는 문화재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이해력으로 관리해야 합니다. 사천 선진리 '귀무덤' 위령비가 세워진 2007년부터 비명(碑銘)의 왜곡 문제가 계속해서 제기돼 왔지만, 그동안 개선하려는 노력이 별로 없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 지난 32년 넘게 '사천 귀무덤'으로 왜곡 보도해온 국내 언론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1990년 박삼중 스님의 '코무덤' 유토 봉환과정에서 언론들은 일본이 왜곡하여 붙인 '귀무덤'이란 이름을 고증 없이 그대로 귀무덤으로 보도했습니다. 한편, 이러한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텔레비전 드라마나 기획 보도 그리고 국제학술희의 등 여러 경로로 노력을 해온 사람들이 있지만, 아직도 일본이 왜곡한 '귀무덤'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언론이 대부분입니다. 하루빨리 교토의 무덤을 '코무덤'으로 바로 잡는데 힘을 기울이고 더 나아가 경남 사천시의 '코무덤' 위령비 역시 최근 '코무덤'으로 변경되었음을 널리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앞으로 교토 코무덤을 국내로 봉환하려는 단체들에 대해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교토시 코무덤을 국내로 봉환하는 것은 일본의 잔학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우리 스스로 지워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봉분을 그대로 두고 일본 자손 대대로 그들의 조상이 이웃 나라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도록 하는 증빙 자료로 남겨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코무덤 원혼들이 봉분 위 수십 톤 무게의 돌덩어리에 눌린 채 이역 땅에 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차선책으로 경주 천마총처럼 교토시 코무덤 봉분 옆에 구멍을 뚫어 봉분 속에 있는 순수 코무덤 유토만 봉환해오고 봉분은 그대로 유지 시키는 방법으로 교토시청과 협의를 해야 합니다.

국내로 봉환된 유토는 정유재란 때 희생된 지역에 나누어 안장하여 원혼들을 위로하고 다시는 이런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울러 코로나19도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고 있으니 교토 코무덤 위령제를 지내온 나라 안팎 단체들과 뜻을 모아 함께 '코무덤' 위령제를 재개했으면 좋겠습니다."
 
▲ 대담중인 최진갑 경남 사천시에 있는 '코무덤' 위령비 이름을 바로 잡은 최진갑 박사와 대담 중인 기자
ⓒ 이윤옥
 
최진갑 박사와 만나 사천시 '코무덤' 명칭 변경 과정을 소상히 듣고 카페 근거리에 있는 조명군총을 찾았다. 동지를 갓 넘긴 탓인지 짧은 저녁해가 '코무덤' 위령비 쪽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돌아보니 '耳塚'이라는 위령비 이름의 왜곡을 알리기 위해 기자 역시 일본 교토로, 사천 조명군총으로 뛰어다닌 시간이 어느새 10여 년을 훌쩍 넘었다. 악인(惡人)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공(戰功)의 징표로 삼기 위해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교토에 커다란 봉분의 <비총, 鼻塚, 하나즈카>을 만든 지 올해로 425년째다. 고향의 사랑하는 부모자식을 뒤로하고 먼 이국땅에 남아 떠돌아야 하는 원혼(冤魂)을 생각하면 기자 역시 가슴이 미어진다.

원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한없이 무기력해지지만, 최진갑 박사처럼 왜곡을 바로잡아가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는 사람이 있다면 왜곡된 역사는 400년 아니라 4000년이 되어도 바로 잡을 수 있을 듯하다. 우리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온갖 궂은 행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왜곡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밝혀낸 최진갑 박사에게 크게 손뼉을 쳐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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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우리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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