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69>] 납치

데스크 2022. 12. 2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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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69화 납치


하지만 음주철 의원은 뜻밖에도 차분하게 대꾸했다.


“금주운동이 순수하다는 말씀은 좀 지나친데요. 금주운동은 순수한 게 아니라 엉큼하게도 정부여당을 공격하는 베이스를 숨기고 있었어요.”


“금주운동에 정부여당을 공격하는 베이스가 깔려있다?”


“잘 들어보세요. 술로 인한 경제적 파급효과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국가가 금주정책을 시행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그럼 보건복지부에서 추진한 비둘기 플랜은 대체 뭐죠. 보건복지부는 정부 부처가 아니라 민간입니까?”


“술과 경제의 상관관계는 지금 여실히 드러나고 있잖아요. 금주운동으로 경기가 가라앉았다고 정부여당에서도 인정하는 바이고요.”


“술과 경제의 관계 유무는 차후의 문제고요. 경기부양을 위해 술을 권장하고 있다, 알코올중독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있는데도 국가는 금주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건 아니잖아요.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국가가 경제를 위해 음주를 권장한다는 이 말은 유언비어의 극칩니다. 어떻게 이런 발상,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겁니까!”


음주철 의원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김석규를 노려보았다. 김석규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얼마 전 공안당국에서 금주운동과 관련한 유언비어 색출을 공언했었는데 김석규 자신이 전격적으로 그 표적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김석규는 적극 방어에 나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게 어떻게 유언비어입니까? 술과 경제의 관계는 지금 증명되고 있고, 또한 합리적 의심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헌법에도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까?”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닙니다. 언론의 자유가 있다고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국민들은 김석규 씨의 선동으로 국가를 믿지 않게 되었어요. 국가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국민의 음주를 조장한다는 근거 없는 주장으로 국민들이 국가를 불신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한 유언비어가 어디 있겠어요?”


“합리적 의심을 유언비어로 치부해 버린다면 이 세상은 전혀 발전이 없습니다. 자연과학이고 사회과학이고 간에 모두 합리적 의심으로부터 출발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온 건데 그걸 유언비어라고 해버리면 발전은 둘째치고라도 다들 무뇌아로 살라는 겁니까? 그런 발상은 민주국가가 아니라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에요. 음 의원처럼 합리적 의심을 유언비어라 한다면 토론이나 대화는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이번 토론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해주네요. 금주운동의 정당성을 호도한다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투쟁동력이 떨어질까요? 김 선생, 그만 갑시다.”


금주성 의원이 냉소적으로 말하고는 김석규를 부추겨 스튜디오를 함께 나가버렸다. 생방송으로 진행 중이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토론’의 돌발적인 방송사고가 그대로 전파를 타고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카메라에 잡힌 여당의 패널 두 사람이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당황한 사회자는 서둘러 토론 중단을 선언했다. 그리고 김석규의 문제적 발언 장면들을 편집해서 내보내며 오늘 토론의 경과랍시고 시청자들에게 편파적인 해설을 늘어놓았다.


이튿날 보수언론은 1면 톱으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토론’을 대서특필 해놓았다. 금주성과 김석규가 토론 중간에 퇴장한 것을 두고는 금주투쟁이라며 억지주장을 하던 김석규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보수여당 패널의 반박에 밀려 꽁지 빠지게 달아난 것이라고 왜곡했다. 금주운동의 허구를 조목조목 지적하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할 말이 없어진 진보야당 패널이 생중계 TV토론 중간에 도망쳐 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고 호도하면서 비아냥거렸다. 기자가 TV토론이나 제대로 보고 기사를 쓴 것인지 의심스러운 대목이었다.


그리고 하단에는 ‘금주특별법 제정 않으면 국가 아냐! 이런 국가는 없어져야’ 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김석규를 비난하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사 내용은 TV토론에서의 발언과는 무관했고 국민의 고통을 기반으로 경제 활성화를 꾀하는 파렴치한 국가를 비판하는 김석규의 저서 내용이 일부 발췌되어 있었다. 그렇게 대부분의 신문이 같은 곳에서 보도 자료를 받아 쓴 듯 대동소이한 내용이었다.


김석규는 농성장 천막에서 신문들을 뒤적거리다가 앞으로의 상황 전개를 가늠해 보았다. 신문기사를 보면 어제의 토론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고 기존의 발언이나 저작내용이 실려 있었는데 미리 기사가 작성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토론’을 디데이로 잡아 대대적인 여론몰이를 작정했다고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더욱이 자신을 정면으로 겨냥해 비난하는 기사가 실린 걸로 봐서 당국의 후속조치도 예상할 수 있었다.


이철백은 벌써 동이 훤하게 튼 시각인데도 세상모르게 곤히 자고 있었다. 이철백이 내뱉는 숨결마다 술 냄새가 물씬 묻어나왔다. 어제 토론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후 울분을 참지 못한 이철백이 여당 패널 욕을 하다가 정부 욕을 하다가 국가 욕을 하다가 그러면서 깡소주를 진탕 마셔댔었다. 김석규는 자신의 저작과 발언을 핑계 삼아 유언비어 운운하던 공안당국이 강제구인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짐작했다.


김석규는 나중에 이철백이 일어나면 당직자와 함께 공안당국의 구인에 대비한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농성장 천막을 나섰다. 매일 아침 운동을 겸한 산책으로 김석규는 대한문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을 한 바퀴 돌곤 했다. 거리엔 여느 때와 달리 출근하는 시민들로 분주했다. 어제 TV토론 후 뒤풀이를 마치고 늦게 잠자리에 들어서 김석규의 아침산책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김석규는 천천히 걸으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신중하게 헤아려보았다.


“김석규 씨, 잠깐 같이 좀 갑시다.”


불현듯 건장한 체격의 정장차림 남성 세 명이 김석규의 팔짱을 끼며 허리춤 뒤쪽을 틀어쥐었다.


“뭐야!”


김석규는 순간적으로 염려하던 것이 닥쳤다고 직감하며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자 남성 한 명이 주먹으로 김석규의 명치를 있는 힘껏 가격했다. 김석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힘없이 무릎을 꺾었다. 느닷없는 광경에 출근하는 시민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를 피해 종종걸음을 쳤다. 남성들은 수많은 시민들의 시선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뒤에서 따라오던 검정 세단에 김석규를 우겨넣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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