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을 새로이 편집하면서 내가 배운 것들

이효미 2022. 12. 2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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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이효미 기자]

 <사양>(에디터스 컬렉션) | 다자이 오사무 | 오유리 옮김 | 2022
ⓒ 문예출판사
일본 문학의 대체 불가능한 작가 다자이 오사무. 그의 생전 가장 큰 인기를 누린 작품 <사양>이 전문번역가 오유리의 최신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이 책의 편집자로 출간 작업에 참여했다.

서서히 파멸해가는 존재의 유구한 아름다움에 관하여 

<사양>은 '지는 태양(斜陽)'이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와 같이 2차 세계대전 직후 무너져가는 귀족 집안과 시대 의식을 그린 소설이다. 같은 시대 정신이 담긴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 <인간 실격>에 앞서 출간된 이 작품은 초판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만여 부 이상 판매되며 단숨에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몰락한 집안과 사람들을 일컫는 '사양족'이란 신조어가 생겨 유행하는가 하면, 지금은 기념관이 된 다자이 오사무 생가는 '사양관'이라 불렸다고 하니 당시 이 작품의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사양>은 <인간 실격>보다 국내에 덜 알려진 작품이라 이 작품의 매력을 국내 독자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책을 편집하는 내내 고민이 짙었다. 우선 <인간 실격>과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작가 특유의 인간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아름다운 문체를 기대할 것이다.

<사양> 역시 "생생한 묘사와 독자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는 천재적 필력(오쿠노 다케오)", "아름답고, 정교하며, 힘 있는 문체! 틀림없이 독보적인 작품(애틀랜틱 먼슬리)"이라는 찬사를 받는 작품으로 가슴속에 스며드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소설에서 주목하고, 이 작품을 처음 혹은 새롭게 다시 읽을 독자에게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순수한 인간성과 사랑의 의미, 삶에서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닌 메시지다.

시대를 초월해 불변하는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들이 '고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몇 세대 혹은 몇 세기 전에 살던 저자가 남기고자 했던 변치 않는 진리 혹은 아름다움을 오롯이 전하되 동시대 독자들의 정서와 시대변화를 반영해 그 메시지가 왜곡과 오독 없이 전달될 수 있게 하는 것이 고전 번역가와 편집자의 역할일 터. 단순히 독자로서 작품을 읽을 때와는 마음가짐이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이 책에 앞서 올해 8월에 출간된 <인간 실격>(에디터스 컬렉션)을 편집할 때도 이미 많은 사람이 읽고 평가한 고전 작품을 새롭게 출간하면서 책에, 나아가 작품 감상에 동시대적인 새로운 시각과 의미를 부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장 먼저 이미 출간된 <인간 실격>과 <사양>의 판본 중 가장 많이 읽힌 책들의 독자 리뷰를 살폈다. 특히 부정적인 평가에 주목했다.

부정적인 리뷰를 곱씹어 내 나름으로 해석한 바는 이렇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가장 많이 읽힌 책들인 만큼 번역도 오래 전에 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지금 독자들의 언어 감각과 감수성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또 주요 인물들이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태도, 그들의 선택에 공감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종종 눈에 띄었다. 에고이즘과 위선, 권력 등에 대항해 '자기부정' '자기파괴'를 시도하는 퇴폐주의 문학의 특징, 작품의 난해함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문화적으로 급격한 변화와 발전을 겪고 '정치적 올바름'을 중시하는 현세대의 정서에 비추어볼 때 거슬리는 면도 있지 않았나 싶다.

물론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작품을 요즘 독자의 입맛에 맞춰 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원문에 충실하며 시대상을 반영하되, 번역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손질할 때 이 책을 읽게 될 동시대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 또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들은 쓰인 지 70년 넘게 지난 소설이지만 모든 고전이 그렇듯 현세대도, 다음 세대도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기에 이 책에서 작품 해설 격인 '옮긴이의 말'과 도서 소개 자료에서 그런 부분이 강조되도록 했다.

20년 만에 이 작품을 개역해주신 역자 오유리 선생님은 다자이 작품 중 <사양>은 개인적으로 특별히 애정을 가진 작품이라고 하시면서 그만큼 진지하고 신중하게 개역 작업을 해주셨다. 편집 과정에서 선생님과 여러 차례 긴밀히 소통했는데, 작가의 의도를 가능한 한 왜곡 없이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결국 감상은 독자의 몫으로 맡겨두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선생님 말씀에 느끼고 배운 바도 컸다.

절망의 어둠 속에서 밝은 희망을 길어 올리는 이야기

<사양>의 주인공 가즈코와 남동생 나오지는 과거에 귀족으로서 누렸던 모든 지위와 특권을 잃고 몰락한 현실에 맞닥뜨려 끊임없이 인간의 삶과 가치에 대해 고뇌한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의 패전 후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대저택이 몰락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던 실제 경험을 소설 곳곳에 녹여낸다. 특히 주인공 두 사람을 통해 상실의 슬픔과 삶의 허망함을 담담하면서도 섬세한 문체로 그려낸다.
 
작년엔 아무 일이 없었다.
재작년엔 아무 일이 없었다.
그 전 해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이런 재밌는 시가 종전 직후 어느 신문에 실렸는데,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 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에 공감하게도 된다. 전쟁의 추억이란 건 말하기도, 듣기도 싫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죽었는데도 진부하고 지루하다. (44~45쪽)

역자 오유리 선생님은 '옮긴이의 말'에서 '어제 함께 이야기하고 밥을 먹던 이웃이 죽어나가는데도 아무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죽음에 무감각해졌다는 것. 삶의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고 곧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뜻이다'라며 전쟁이 초래한 가장 큰 비극을 작가가 이처럼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를 그리고 있음에도 역자는 "<사양>은 제목에서 연상되는 바와 같이 단순히 스러져가는 것, 몰락해가는 것을 주제로 한 작품이 아니다. 마치 모래 속에 묻힌 사금을 추어내듯, 진흙탕 같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자기 의지의 혁명을 꿈꾸고 이뤄나가는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다"라고 평가한다.

순수를 희구하던 나오지는 참혹한 전쟁을 겪고 아편 중독자가 되어, 거의 폐인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방탕하게 생활하던 그는 너무나도 나약했던 시대의 낙오자였다. 반면 가즈코는 낡은 도덕과 사상을 무시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타파하고자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 혼자서라도 키우겠다는 뜻을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이뤄 스스로 생의 씨앗을 심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일본의 문예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다자이는 어둠 속에서 밝음을, 밝음 속에서 어둠 보는 눈을 지녔다"라고 다자이 오사무와 그의 작품을 평가하기도 했다. <인간 실격>과 <사양>의 표지는 일러스트레이터 박혜미 작가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디자인했는데, 밝음과 어둠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았던 작가의 의도를 살리고자 했다. 삶의 혁명가, 희망으로 당찬 걸음을 내딛는 주인공 가즈코가 전면에 등장해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해질녘 풍경을 담담히 바라보는 모습이다.

2022년 지는 해를 바라보며, <사양>을 읽는다면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다자이 오사무 작품 중에서 여성을 가장 탁월하게 그려낸 역작"이라며 칭찬한 작품이 바로 <사양>이다. 이처럼 <사양>은 일본의 패전과 몰락 계급의 비극적인 삶을 여성의 목소리로 그린 페미니즘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발표된 지 70년이 넘은 데다 특히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었던 당시 일본 사회상과 분위기가 작품 곳곳에 배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간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어온 현대 독자들의 감수성에 비추어본다면 이 작품을 페미니즘 작품으로 높이 칭송한 평가가 다소 퇴색되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로이 펴내는 <사양>을 가장 먼저 읽는 첫 번째 독자이자, 편집자인 나는 흥미롭게도 이 고전 작품을 읽으며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이 작품을 읽게 될 독자들께도 그 감상을 나누고 싶다.
 
도대체 나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는지. 혁명을 꿈꾸었던 적도 없고 사랑도 몰랐다. 지금까지 이 세상 어른들은 혁명과 사랑, 이 두 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흉측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주입해, 전쟁 전이나 전시에나 우리는 배운 대로만 알고 있었는데 패전 후, 우리는 이 세상 어른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뭐든 그 사람들이 말하던 것과는 반대로 하는 것이 진정 살길이라 여기게 됐다. (127쪽)
 
희망찬 새천년을 맞이하며 지난 역사의 과오를 반성하고 평화로운 세계의 재건을 다짐했던 인류가 또다시 잔혹한 전쟁을 일으킬 거라 누가 예상했던가. 지금 우리는 시시각각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된 덕분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매일 생생하게 전해 듣는다.

일본은 70여 년 만에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군사력을 강화해 동북아에 긴장감을 높인다. 이란에서는 한 여성이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의문사했다는 무시무시한 사실도 들어 알고 있다. 그러나 쉬이 잊고, 무덤덤해지는 우리 마음은 머지않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전 해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배운 대로만 알고 있었는데 패전 후, 우리는 이 세상 어른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소설 속 문장은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마땅한 어린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 말하고 제 살길만 찾았던 어른들, 축제를 즐기러 갔다가 많은 사람이 참변을 당했지만,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민낯을 떠올리게 한다. "뭐든 그 사람들이 말하던 것과는 반대로 하는 것이 진정 살길이라 여기게 됐다"는 문장에 우리는 가슴 아픈 공감을 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격변의 시기를 겪으며 불안과 암울이 만연한 일본 사회를 밝게 비추고 방황하는 청년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다자이 오사무의 이 소설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독자의 가슴에 따스한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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