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人 이야기]자전거 전문가 오세곤 “연극인으로 사는 인생이 즐겁다”

2022. 12. 2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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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의 연극인 인생 중 번역과 장주네는 삶이었고, 연극정책설계는 투쟁을 하고 싸우면서도 연극강사풀제 도입과 연극교과목 개설 운동, 연극인 복지법은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연극평론가들이 성공한 작품보다는 실패한 예술작품들을 더 많이 쓸 수 있는 지면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폭설(暴雪)이 쏟아졌다. 천안 아산으로 가는 기찻길 풍경은 눈으로 덮여있었고 상행 열차가 달릴수록 유리창에 붙은 눈 때문에 밖을 볼 수 없었다. 역 광장을 걸을 때 추위로 주먹 쥔 손이 펴지질 않았다. 아산의 평야 지대는 신도시가 들어서 있었고 거리는 한산했다. 200m 앞에 비상등을 켜고 기다리는 차에 올라타자 오세곤 선생은 폭설을 대비해 장비를 싣고 다닌다며 웃었다. 온양온천 방향으로 20여 분을 차로 달리면서 자전거 고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아산시에서 운영하는 ‘방치 자전거 예방 및 정비인력 양성사업’에 자전거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공공장소에 방치된 자전거를 수거해 고장 난 자전거를 고치고 있고 자격증도 있다며 웃었다. “아들 때문에 하는 겁니다. 아들이 자전거를 대여하고 판매하는 일이라도 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인 거죠 근데 이놈은 버스를 좋아 해요. 데리고 다니면서 자전거 고치는 일이 보람은 있어요” 하나 뿐인 서른의 아들은 지적장애를 안고 있다. 온양온천역을 돌아 구시가(舊市街) 인근에 사무실을 얻어 연구와 번역 일을 한다고 말했다. 10여 평 남짓한 사무실에는 교수, 번역가, 평론가, 연극행정과 연극운동가로 살아온 삶들이 수 천 여권의 책들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들어가면서 연극을 시작했다. 오세곤이라는 이름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들이 붙는다. ‘장주네’와 ‘이오네스코’ 하면 오세곤을 떠올렸고 그가 번역한 20여 편의 책들은 번역희곡이 귀하던 시절에 공연대본으로 대학연극반과 전공 학생들 필독서였다. 한국연극에서 빠질 수 없는 선생은 문화예술진흥법, 문화예술교육 지원법, 예술인 복지법 등 세 가지 법의 개정이나 제정에 깊이 관여했다. 연극교육 운동을 하면서는 연극인 강사 인력풀제도 도입을 주도하고 연극 교과목 개설 운동을 했다. 초·중·고교에 연극과목과 교재가 전무했던 시절부터 교육부가 연극과목을 정규교육 과정에 도입하고 교재를 개발하는데 이르기까지 항상 선두에 있었고 관련된 일들은 거의 모두 그의 연구와 손을 거쳤다.
“2002년도에 고등학교 교과서, 2003년도에 고등학교 교과서 지침서와 중학교 교과서, 2004년도에 초등학교 교과서와 함께 중학교 교과서 지침서를 냈어요. 2008년에 초등학교 지침서를 마무리해서, 나름대로 초중고 다 교과서와 지침서를 만든 셈이죠. 그런데 그건 교육부 인증을 받지 못했어요. 이후 2011년에 연극 분야 책임연구원이 돼서 교육과정을 개편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대폭 개편해서 학생들이 연극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 교육과정에 의거해서 처음으로 교육청에서 연극 교과서를 개발하게 됩니다. 정식 인정도서로요”
한쪽 책장 벽면으로 개발된 연극 관련 수십 권의 교재들이 정돈되어 있었고 그 옆으로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하녀들’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 첫 연출로 인연이 된 ‘장주네’로 박사학위를 받고 반세기를 장주네 연구로 살아온 그는 2011년도 대학로에 노을 소극장을 개관하고 10년 만에 폐관(閉關)하게 되면서 마지막 공연한 작품도 장주네의 ‘하녀들’이었다. 그는 차 한 잔을 탁자에 올려 놓았고, ‘이제 인터뷰를 시작하는 건지’ 물었다.

| 누나로부터 출발한 오세곤의 연극인생

─ 순천향대학교 정년퇴임 이후에도 여전히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선생의 연극 인생이 올해로 몇 년째지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연극을 시작했어요. 1974년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연극을 접했으니까 한 48년 된 거죠. 당시 친누나가 이대 앞에 있는 카페 파리에서 DJ 일을 했어요. 카페 떼아뜨르와 더불어 카페 파리는 살롱 같은 조그마한 소극장이었거든요. 파리에선 주로 대학생들이 공연을 했고 떼아뜨르는 기성 연극인들의 공간이었어요. 그러니까 파리는 클래식 다방이면서 한구석엔 작은 무대가 마련돼 있는 대학생들한텐 정말 중요한 문화공간이었죠. 대학에 붙고 나서 3월 입학 전까지 놀려고 했는데 그사이에 누나가 데려간 곳이 연극 연습실이었습니다. 제 고등학교 선배이면서 여러 대학 극회에서 연극을 하는 선배들이 모여 연극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극단 예맥이라고 더 잘 알려진 종교적 색채를 띠는 예맥하고는 다른 극단이에요. 아무튼 추운 날 차가운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열심히 연습하는 선배들이 무서워 그만 오겠다는 소리도 못 하고 한 달 동안 연습하는 걸 지켜만 봤어요.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돼서 다른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선배들이 대학 생활 시작하면 꼭 연극반에 들어가라고 했어요. 그렇게 연희극예술연구회(연희극회, 현 연세극예술연구회)에 들어갔고 제 연극 인생이 시작된 겁니다”

─ 오세곤 선생은 다양한 말들을 쏟아냈다. 1976년도를 돌아 20,30년의 시공간을 넘어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왔다.

“그렇게 처음 참여한 작품은 선배가 쓴 창작극이었지요. 제목이 ‘연극 제1번’이었나…. 그때만 해도 극장이 워낙 귀했는데, 카페 파리에서 너무 작품이 실험적이라 공간을 줄 엄두가 안 난다고 했어요. 그래서 유명 평론가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대관 심사를 받게 했습니다. 작품이 너무 아방가르드해서 관객들이 수용하기 어렵겠다는 이유로 결국 공연이 허가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공연이 좌절되는 걸 지켜보면서 연극을 시작했던 셈이에요. 연희극회에서는 선배들이 연기를 시키기도 했는데, 너무 어렵고 어색하더라고요. 그러다가 3학년 1학기 때 휴학을 하고 밖에 나가서 처음으로 연출을 했어요. 1976년 우리나라에 소개된 장 주네의 <하녀들>을 예맥에서 올렸는데, 겁도 없었죠. 뭐가 뭔지도 모르고 배우들한테 디렉션을 했으니까요.

─ 첫 연출이 <하녀들>이었으니 장 주네와의 인연은 숙명(宿命)이었군요.

그런 셈이죠(웃음). 두 번째 작가는 이오네스코 였어요. 2학기 때 복학해서 동아리 선배를 만났어요. 선배가 이오네스코의 <수업>을 준비 중이라고, 저더러 대본을 한번 읽어보라는 거예요. 그전까진 대사를 말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는데, 그때는 힘들지가 않더라고요. 아마 1학기 때 연출을 하면서 저도 모르는 새 벽이 허물어졌던 것 같아요. 어쨌든 즉석에서 제가 교수 역할로 캐스팅됐어요. 아마 그때 무대에 올랐다면 연기를 쭉 했을지도 모르겠는데 갑자기 군대에 가게 됐어요.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건데 결국 공연을 못 했죠. 나중에 학부 졸업논문을 이오네스코 <수업>으로 썼어요. 저 스스로 빚을 갚는다는 느낌으로요. 졸업할 때쯤 앞으로 뭐하고 살아야 하나 생각하니 연극과 공부 두 가지로 귀결되더라고요. 마침 불문학을 전공해서 두 개를 같이 해보려고 별 고민 없이 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드라마를 전공하면서 석사 박사 논문은 장 주네로 썼어요.(웃음) 처음 연출할 때 뭔지도 모르고 배우들한테 순 거짓말을 했던 게 빚으로 남아있었던 거죠”

─ 평생 장 주네와 이오네스코 사이를 배회하면서 사셨군요.

“두 작가 포함해서 출판된 건 20편 정도일 거예요. 이오네스코가 일곱 편으로 가장 많고 장 주네 작품이 두 편. 사실 번역을 맨 처음 했던 건 대학 졸업 전이었어요. 등록금 벌려고 800매짜리 소설을 번역했습니다. 교수님들한테 건방지다고 야단맞을까 봐 이름을 표지에는 못 싣고 뒤에 판권에만 넣었어요. 그 후 학교 교지에 실을 이오네스코 작품 번역을 맡았고, 이후에도 쭉 하다 보니 나름대로 번역에 대한 감각이 생기더라고요. 제가 출판보다는 공연 대본을 중심으로 번역 작업을 했어요. 부탁을 받고 번역을 하다가 중간에 공연이 엎어져 중단한 것만도 아마 30편 쯤 될 거예요”

─ 장 주네를 전공하고 작년엔 다시 ‘하녀들’을 번역하고 공연도 하셨지요. 48년 동안 한 작품에 몰두하시는데

“제가 가장 많이 붙잡고 있었던 작품은 사실 <하녀들> 보단 <우리 읍내>에요. 박사 논문을 다 쓰고 나면 <하녀들>을 번역해주겠다고 이성열 연출가한테 약속을 했었어요. 1991년 말 박사 논문 통과되자마자 번역을 해줬는데 1992년 초 산울림 소극장에서 레퍼토리로 공연이 올라갔어요. 그런데 몇 달 후 혜화동1번지에서 이성열 연출가가 <하녀들>을 재공연하면서,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시도했더라고요. 마담 역을 남자 배우에게 맡긴다든가 하는 식으로 뒤집었어요. 그 후로 <하녀들>이 여기저기서 공연되기 시작한 거예요. 2000년대 초 예니에서 <하녀들> 번역본이 출판되면서 공연이 더 늘어났어요. 당시 이윤택 연출가도 이걸 공연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어요. 나중에 연희단거리패에서 한 걸 보니, 원작에 충실해서 완성도 있는 공연을 만들었더라고요. 작품을 뒤집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원작이 가진 디테일을 놓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던 참이었어요. 그렇게 여러 군데서 작품이 올라가는 걸 즐기고만 있었는데, 어느 날 이윤택 씨에 대한 미투 고발이 터졌지요. 더 이상 그가 그 작품을 하도록 둘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일종의 회수를 한 셈이에요”

“그 이후부터 <하녀들>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원작의 결을 살려 형상화하는 작업을 이제는 우리 극단이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죠. 처음 연출한 게 1976년이고, 그다음 연출을 한 게 2020년 12월인데,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몇 십 년 동안 한 작품을 붙잡고 있었다는 건 오해예요. 성신여대에 남궁연 교수님이라고 계셨어요. 그분이 번역하신 <하녀들>이 1976년 월간 《한국연극》에 실렸는데 그게 장 주네의 희곡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순간이에요. 그걸 가지고 연출을 했을 땐 부조리극이 뭔지도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을 했었죠. 남궁연 선생님 번역본이 제 작업의 바탕이자 큰 힘이 됐었지만, 제가 깨달은 원칙대로 92년에 다시 번역을 해봤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배우들이 텍스트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A가 이렇게 말하니까 B가 그렇게 대답한다’를 분명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오세곤 선생은 최근 번역한 <하녀들>을 보내왔다. 희곡의 대사나 무대지시문에 달려 있는 주석들은 소논문 같았다. ‘희곡을 읽어보니 관객과 공연자들이 장 주네 작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공연했으면 하는 바람이 책에 담겨있더군요’

“배우가 텍스트를 잘 파악하고 그것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하는 게 높은 완성도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주석의 첫 번째 목적은 특수 독자인 배우와 연출가가 작품을 정확히 알도록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가능한 친절하게 설명을 달려고 했습니다”

| 오세곤의 ‘하녀들’과 노을 소극장

장 주네의 <하녀들>(극단 노을)은 반세기를 장 주네를 연구해온 오세곤 번역, 연출의 학문적인 탐구가 녹아있는 작품이다. 마담을 중심으로 클레르(윤이솜 분)와 솔랑주(박지우 분) 두 하녀들이 극 중 놀이극(연극놀이)을 통해 일어나는 살인 계획, 하층계급의 신분(身分)을 벗어나려는 욕망의 놀이가 무대의 극적인 긴장감을 형성한다. 모반(謀反)과 반란(反亂)의 무의식의 욕망을 들어내며 마담을 살해하고자 하는 클레르와, 솔랑주의 극중극들이 현실과 비현실로 뭉개지면서 무대는 이들의 놀이를 이탈해 마담을 향한 증오와 살인 계획, 신분의 욕망이 꿈틀대는 극중 놀이극으로 쏟아진다. 실제 마담의 살인 계획은 마지막 장면에서 마담 역할을 한 클레르가 연극 놀이를 진행하며 마담의 식은 띠욀차를 마시며 죽는 부조리한 장면을 바라보게 된다. 장 주네의 <하녀들>은 수많은 연출들에 의해 재해석과 해체적인 구성을 통해 마담과 두 하녀 인물의 역할들이 변주되거나 모반과 반란의 욕망을 장 주네의 부조리성과 병치시켜 다양한 버전으로 공연되었다. 그만큼 장 주네의 <하녀들>은 국내 연극무대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텍스트다. 장 주네의 부조리적인 놀이의 방식은 더 이상 특별할 것 같지 않을 것 같은 고전이 되었음에도 오세곤 연출의 <하녀들>은 특별한 점이 있다. 장 주네를 연구해온 번역자가 텍스트의 변형을 시도하지 않고 연출의 기술과 해석의 포장으로 무대를 배치하지 않으면서도 희곡의 무게를 연구해온 탐구의 높이로 원작을 깊이 있게 읽게 해준다는 점이다.

1976년 태평로 세실극장에서 <하녀들>을 대학 3학년 때 연출한 오세곤은 ‘작품의 이해가 부족해 허점이 많은 공연’이었다고 고백했다. 대학 연출의 아쉬움은 이후로 장 주네를 연구하는 논문과 희곡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도 장 주네의 텍스트의 탐구와 고집으로 <하녀들>(1992)을 번역해 이성렬 연출에 의해 산울림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그 뒤로 희곡 <하녀들>은 도서 출판 예니(2000)를 통해 출판되었고 생산적으로 무대화 되었는데도 오세곤 선생은 부정확하고 적절치 않은 번역을 방치할 수 없었는지 20년 만에 원고를 수정했다. 지만지드라마(2020)에서 장 주네의 연출법을 추가해 희곡을 재번역해 출간할 정도로 그의 연극인생중 장 주네와 하녀들은 반세기에 걸친 연구와 탐구 정신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그만큼 <하녀들> 번역은 오세곤으로 읽혀지고 있다. 대학 시절 무대로 표현한 엉성함이 평생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던 걸까. 장 주네의 언어는 그가 학문적으로 평생을 섬겨오고 분석 해오면서도 텍스트의 한 음절도, 문장의 지문도, 텍스트를 이탈하는 배우들의 연극 놀이도 무대로 과하게 소비하거나 연출로 낭비할 수 없는 학문의 언어였다.

─ 1976년부터 지금까지 <하녀들>이 끊임없이 공연되는데, 오세곤 선생의 <하녀들>은 원작에 충실한 점이 좋았다.

“아무리 외국 희곡이라도 우리가 알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 재미없을 리가 없어요. 어려울 리가 없고, 관객들한테 전달이 안 될 리가 없죠. 이게 제 신념입니다. 저는 관객들이 확실한 감동과 재미를 느끼게 하고 싶어요. 2020년에 이어 2022년에도 <하녀들>을 올리면서, 어느 정도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여러 버전의 <하녀들>이 있는데, 제가 연출한 작품이 누가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어떻게 다른지를 살피는 하나의 기준점이 됐으면 해요. 최대한 희곡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할 때, 하나의 기준점이 될 수 있잖아요. 그러려면 이걸 레퍼토리 작품으로 만들어서 공연을 지속해야 해요. 아주 작은 부분에 대해서도 서로 피드백할 수 있도록 계속 연습하고 숙달시켜 완성도를 높여나가야죠”

─ 노을소극장이 폐관하면서 아픔도 있으셨겠지요.

“2011년에 노을소극장을 개관했는데 딱 10년 만에 문을 닫았어요. 극장을 열었을 땐 당연히 계속 그걸 유지해나갈 거라고 마음을 먹었지요. 그런데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무력감마저 느꼈어요. 한 달에 드는 유지비가 만만치 않았거든요. 또 천장이 너무 낮다든가, 극장을 꼭 갖고 싶은 마음에 안 좋은 조건을 감수하고 들어왔던 부분이 있어요. 극단 노을이 활발하게 활동해서 레퍼토리로 관객 수입을 계속 거뒀으면 극장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텐데…. 특히 코로나19가 직격탄이 되어서 극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어요. 레퍼토리를 개발해서 극단 자체 작품만으로 일 년을 돌릴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까진 다시 극장을 운영할 생각은 없어요”

─ 그래도 10년이면 짧지 않은 세월인데.

“극장이 생기면서 단원들이 지치기도 했어요. 작품을 개발하는 데 쓰는 힘보다 극장을 유지하는 데 신경 쓸 부분이 더 많다 보니까 자신감이 사라지더라고요. 극장이 생기면 여러 가지 일을 해보리라 다짐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극단을 지키려면 공간, 인적자원, 작품이 필요한데 그 모든 것들이 다 갖춰지거나 어느 하나가 특출하지 못했지요”

| 번역가, 연극정책 행정가 오세곤

1980년대 초까지 연극영화학과 학생들이 국어 교사를 수 있는 교직 이수 제도가 있었다가 없어졌다. 99학번 연극영화과 학생들부터 국어교사가 아니라 연극·영화 교사를 할 수 있는 교직과정이 생겨 교원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오세곤 선생은 이때부터 연극 과목 도입을 위해 적극적인 운동에 나서게 된다. 대학이 교직 개설 신청 서류를 낼 때 해당 대학교 출신 교생을 받겠다는 협력학교의 사인을 첨부해야 했다. 아산의 모 고등학교를 찾아가 사인을 부탁하자 연극 교과목이 없어서 사인을 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교생을 안 보낼 테니 도장만 찍어달라고 하루 종일 교장 선생을 졸라 딱 네 명만 받을 수 있다는 도장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그는 이때부터 연극 교육 문제를 풀려면 교과목을 우선 개설해야 된다고 생각해 연극교과목 개설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 반세기 동안 번역, 연극 교육, 연극 평론 그리고 연극 행정까지, 연극계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하셨지요.

“교수가 되어 졸업생들을 연극 현장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현실이 너무나 열악하니까 이 친구들이 피기도 전에 다 고사해버릴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로 다짐했어요. 연극 교육을 통해 많은 사람이 어릴 때부터 연극을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연극을 친숙한 장르로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연극인들의 일거리도 창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연극 교육 운동을 시작했죠. 그게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요. 처음엔 연극 교과목 개설 운동을 하다가, 연극인 강사 인력풀 운영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했어요. 그러면서 점점 정책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됐습니다. 문화예술진흥법, 문화예술교육 지원법, 예술인 복지법 등 세 가지 법을 개정하거나 제정하는 데에도 관여를 했어요. 국회 공청회에도 나가고, 법학 전공 동료 교수에게 예술인 복지법 초안을 부탁해서 국회에 갖다 준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상당히 공격적으로 활동을 했죠”

─ 특히 정책 가운데 연극인 강사인력풀제 시기가 뜨거웠어요. 당시, 연극인 강사가 되면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적으로 되면서 연극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연극인들이 나섰죠.

“2001년 말 처음 연극인 강사 인력풀 운영위원회를 시작할 땐, 1기로 100명을 뽑았어요. 그땐 한 10년 지나면 인력풀이 천 명 정도 될 것이고, 20년이 지나면 오천 명이 될 거라는 희망을 가졌어요. 그런데 지금 연극 강사가 오백 명이에요. 연극인들이 버틸 힘을 주고 싶어서 제도를 추진한 건데, 초기 희망과는 달리 연극 강사에 대한 처우가 여전히 너무나 형편없어요. 제도에 여러 문제가 있다면, 초기에 그걸 세팅한 저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처음에 학교 예술 강사 지원 사업을 세팅하고 민간 주도로 추진하다가, 정부가 주도하도록 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 사업을 넘긴 사람이 저예요.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오세곤이 어느 정도 노력했다고는 생각하겠죠. 처음부터 제대로 좀 만들지 이게 뭐야 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억울하진 않아요. 처음 만든 사람이 제도가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고 나중에도 신경을 써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 연극인으로서 제도와 싸워서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 잡아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달려오신 시간을 보면 전투적으로 사셨던 것 같다.

“2000년 청소년연극제 부대 행사로 세미나가 열렸는데, 거기에서 제가 발제를 하나 했어요. 전국에 교직 이수중인 학생 수가 96명이지만, 이들이 교생 실습을 나갈 수 있는 학교가 딱 세 군데 밖에 없어요. 안양예고, 계원예고, 전주예고. 연극 교과목이 개설되지 않으면 학생들은 교생 실습을 할 수가 없고, 교사 자격증도 딸 수가 없지요. 이것은 악순환이지요. 그걸 본 당시 한국대학 연극학과 교수협의회 안민수 회장이 연극 교과목 개설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게 된 거예요. 마침 한국연극협회에서는 연극 강사풀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단체가 만나 연극 교과목 개설 및 강사풀 추진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이 문제를 자꾸 이슈화시키고 격렬하게 투쟁을 하니까, 매스컴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라고요. YTN에서 교육부를 취재하려고 하자 교육부가 공문을 보냈어요. 연극반 지도교사가 있는 학교에서는 교생 실습을 할 수 있다고요”

― 연극반이 있는 학교로도 교생실습을 나갈 수 있게 되면서 그 다음으로 하신 일이 연극교과목 개설 운동이었군요.

“맞아요. 그렇게 연극 강사 백 명을 현장에 내보내고 나서 한 일이 교과서 개발이에요. 연극계 여러 교수, 교사, 학자들이 모여 2002년에 고등학교 교과서, 2003년에 중학교 교과서와 고등학교 교과서 지침서, 2004년에 초등학교 교과서와 함께 중학교 교과서 지침서를 냈어요. 2008년에 초등학교 지침서를 마무리해서 나름대로 초중고 다 교과서와 지침서를 만든 셈이죠. 그런데 그건 교육부 인증을 받지 못했어요. 이후 2011년에 연극 분야 책임연구원이 돼서, 교육과정을 개편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대폭 개편해서 학생들이 연극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나중에는 교과서를 쓰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2013년이 되어서야 교육부 인증을 받은 <연극의 이해>, <연극 감상과 비평> 교과서를 개발하게 됐습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2015 교육과정 개발과 교과서 개발에도 책임을 맡게 되었고, 작년부터 시작된 2022 교육과정 개편에도 참여하게 됐는데 이번에는 연극 과목을 많이 늘렸어요. 특히 연기 과목이 세 개로 늘어났죠. <연극과 몸>, <연극과 말>, <연기>입니다. <연극의 이해>는 과목명을 <연극과 삶>으로 바꿨어요. 이 교과서들은 내년에 개발될 예정입니다.

─ 정규 연극 교과서를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보완해 나가야 될까요.

“아쉬운 건 무대 기술과 연극 제작 실습에 관한 교과서가 없어요. 교육부에서 배제됐다면 연극계가 자체적으로라도 매뉴얼을 개발했으면 좋겠어요. 연기의 경우, 교과서만으로는 부족해요. 교수학습 자료나 연기훈련 워크북 같은 걸 만들어야 합니다. 연기법을 표준화시킬 수 있느냐는 목소리도 있지만, 배우가 개성이랄까, 자기만의 방법을 갖는다는 것은 높은 수준에 도달했을 때 이야기고, 기본적인 소양은 표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연기를 포함해 연극계의 용어나 개념이 통일되어있지 않다 보니, 학생들은 다른 교수를 만날 때마다 새롭게 적응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최소한의 용어와 개념을 고등학교 때부터 알 수 있도록, 교과서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어요. 근데 문제는 대학교수들이 교육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 잘 모르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세미나나 홍보가 필요해요. 교과서를 가르치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워크숍도 열어야 합니다”

─ 그는 연극·영화 임용고시 출제위원이었다. ‘앞으로 더 많은 학교에서 연극 과목이 개설되고 교사가 보편화되면 임용고시를 꿈꾸는 연극전공자들도 많아질 텐데.

“교육과정과 교과서는 무조건 숙지해야 해요. 임용고시 문제를 출제할 때, 교육과정을 참고하니까요. 그리고 안타깝게도 연극·영화 시험이라, 연극 전공자들도 영화를 공부해야 합격할 수 있어요. 연극·영화 출제자들이 크로스체크해서 시험 문제를 승인하거든요. 두 분야를 분리해달라고 교육부에 계속 요청해봤지만, 예를 들어 기술·가정처럼 붙어 있는 경우가 여럿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임용돼서 학교에 가면 엉뚱하게 영화를 가르쳐야 할 수도 있는 거죠. 지금 비록 하나의 교과로 묶여 있는데도 연극이랑 영화 따로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것만 해도 노력 끝에 얻어낸 성과예요”

─ 많은 연극정책을 설계하면서 견고하게 제도화 된 것은.

“넓게 보면 그래도 연극 교육이 많이 활성화됐어요. 연극 교과목이 만들어졌고, 많은 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치고 있어요. 2011, 2015년을 거쳐 최근 고시된 2022 교육과정을 짜는 데에도 제가 참여를 했습니다. 교육부에 연극 교육과정이 필요하다고 어필하고, 연극 교과서를 만들고 했던 일들이 전혀 보람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어요. 지금 연극 강사들의 규모나 그들이 처한 현실이 내가 꿈꿨던 거하고는 너무나 차이가 나다 보니 속상할 따름이죠”

| ‘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을 창립하고 평론가로 무대를 보다.

─ 연극 교육과 정책설계를 주도하시는 와중에 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이하 공이모)을 만드셨어요. 얼마 전에 공이모가 창립 30주년을 맞았죠.

“공이모는 저한테 정말 중요한 존재예요. 1992년 초 박사학위를 따고 그해 가을 초기 멤버 다섯 명과 함께 공이모를 창립했습니다. 석사 과정을 마친 다음 현장으로 나오고 싶었지만, 12년간 시간 강사 생활을 하느라 전국을 왔다 갔다 해야 했어요. 박사 과정을 마친 다음에는 제대로 연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박사 논문을 끝내자마자, KBS라디오 <문화살롱>에 나가 연극 비평을 하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드라마 전공한 박사가 그리 흔하지 않을 때니까 저한테 그 일을 맡긴 거죠. 매주 한 작품씩 소개하는, 일종의 주례 비평이었어요. 그걸 하면서 공이모 창립 멤버가 되고 자연스럽게 평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전엔 번역으로 연극계와 맞닿아있었다면, 그때부턴 점점 평론가로 자리를 잡아가게 됐어요. 1994년엔 연극평론가협회에 가입하고 몇 년 뒤에는 부회장까지 하게 되면서, 2000년대 초반까지 맹렬하게 평론 활동을 했습니다. 1996~7년엔 <한국일보> 고정 필자가 되어 연극 평론을 썼어요. 그때는 신문사 고정 필자가 되어 연극 평론을 하는 게 중요했는데, IMF 이후로는 지면들이 다 저널리스트들에게 넘어갔어요. 평론 활동을 시작으로 대학로에 깊게 뛰어들었지만, 2005년 극단을 만들면서 부터는 평론으로부터 좀 멀어졌지요. 이후에는 연극 교과목 운동, 연극인 복지법 제정 운동 등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 대학로 연극 비평 생태계도 많이 바뀌었고, 2030 젊은 비평가들도 생겨났어요. 다양한 연극 비평 플랫폼이 생산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시대인데.

“제가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을 두 번이나 하면서, 계속 평론 지면을 늘리려고 노력했어요. 공연을 기록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평론이거든요. 평론가들이 찾아가지 않는 공연이 너무 많다, 가능한 한 많은 작품이 언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예술은 사실 실패가 중요한데, 평론가들은 너무 성공한 연극만 쫓아다니는 경향이 있어요. 서울연극협회를 설득해 《TIS 서울의 연극》이라는 종이 잡지를 만들고, 한 작품에 대해 두 명 이상의 평론가가 글을 쓰도록 하는 지면을 만들었어요. 격월간으로 12권 정도가 나왔는데, 서울연극협회 이사장이 바뀐 후 갑자기 잡지가 폐간됐어요. 그러다 10년 전쯤 다시 《TTIS 오늘의 서울 연극》이라는 웹진으로 부활을 시킨 거예요. 매체를 지키려고 한 건, 평론가들이 골목마다 연극을 샅샅이 찾아다니면서 활발히 기록하고 평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죠”

─월간 《한국연극》 3년간 편집주간을 맡으면서 변화된 성과도 있죠.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편집주간은 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2019년 드디어 편집주간이 됐는데, 처음에 의욕적이었던 것과 달리 협회지라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더라고요. 예산상의 문제가 컸어요. 너무 큰 욕심은 내지 않으려고 했지요. 평론 지면을 늘리는 것과 더불어, 특집으로 연극 교육과 연극 진흥 정책을 많이 다뤘어요”

─달려오신 길 중에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길은.

“번역은 앞으로도 계속할 거예요. 아까 말했듯 공연이 엎어져서 손만 대고 만 것들이 서른 작품 정도 있어요. 다는 못하더라도 출판할 수 있는 건 작업을 해놔야죠. 그리고 번역에 대한 기술과 노하우를 일반론으로 정리하고 싶어요. 이번에도 집필위원으로 선정되면 마지막으로 교과서 작업에도 참여할 생각이고요. 되도록 젊은 학자들이 많이 참여하고, 저는 약간 뒤로 빠져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겠죠. 용어를 체계적으로 확립해서 연기 훈련서를 쓰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이미 화술 책도 썼고, 화술학회 회장이기도 해요. 창작 작업은 많이 못하더라도, 극단 레퍼토리는 꼭 만들고 싶어요. 첫 번째 후보작은 <하녀들>입니다. 그 작품으로 전국을 돌면서 꾸준히 공연하는 게 꿈입니다”

| 아들과 자전거 전문가로 살고 싶다.

─ 마지막 꿈이 아들과 자전거 점포를 운영하시는 거라고요.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로서, 자식이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일 큰 목표예요. 부모들한테는 이 아이를 어떻게 훈련시켜 사회에 내보낼 것인가가 가장 큰 걱정이거든요. 앞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많이 얘기했지만, 부모로서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소용없어요. 아들과 함께 자전거포를 열고 싶은데, 자폐아를 교육하기 위해선 내가 원리를 완벽하게 터득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자전거 책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 자전거 전문가 오세곤, 재밌네요.

“전문가는 무슨(웃음), 창피하죠. 생활 자전거를 고치고 그걸 사람들한테 가르치는 것 정도는 하고 있어요. 지역공동체일자리사업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가르쳐요. 아산시에서 ‘방치 자전거 예방 및 정비인력 양성사업’을 주관하는데, 저는 전문 인력으로 가서 방치되고 있는 자전거를 고치고 수리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거예요. 아들도 자전거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같이 활동하는 중이에요. 인생의 마지막 결승지점은 자전거포를 열어서 아들과 함께 운영하다, 언젠간 아들이 혼자 운영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기까지 한 5년은 걸릴 것 같아요”

─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즐거우신가요.

“즐겁죠. 물론 어떨 때는 답답하기도 해요. 자기 고집도 있고, 말이 안 통할 때도 있고, 납득 안 되는 행동을 할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영원히 아기구나 싶어요. 다 크지 않은 자식을 보는 즐거움도 있거든요. 장애인들에겐 훈련이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나라 교육이 그렇게까지 정교하지 못해요. 장애인들 개인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맞춤 교육을 해주지 않으면 안 돼요. 너무 안일하게 범주화시키고 섣부른 효율을 따지면 교육 효과가 없어요. 내가 완전히 원리를 터득한 다음, 이 방법이 막히면 저 방법을 써보고 어떻게든 아들이 할 수 있도록 길을 내주면 돼요. 우리 아이가 생활 자전거나 아동용 자전거 정도는 충분히 다룰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 누나를 통해 연극을 접하셨고, 대학교 때 <하녀들>을 만났지만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장 주네와 살아가는 연극 인생을 이어오고 있다. 삶을 돌아본다면, 몇 점 정도의 연극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죽을 때 매겨야겠죠.(웃음) 한 때 힘들다, 연극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안 하게 됐어요. 그냥 이게 내 삶이고 길이라고 받아들였죠. 어쨌든 만족하고 있어요. 아직 할 게 남아있으니까요”

─ 오세곤이란 연극인을 한국 연극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기록하고 바라봤으면 좋겠습니까?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연극 정책이나 교육 관련해서 제가 초석을 놨다는 사실은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문화예술교육지원법, 문화예술진흥법, 예술인복지법 등 여러 문제가 있긴 해도, 그것을 고치거나 처음 만드는 데 열정적으로 참여한 오세곤이 있었다. 성과는 미미하지만, 평론이 제 역할을 하도록 노력했던 오세곤이 있었다. 유명한 작품이 어렵고 재미없을 리 없다는 신념으로, 번역에 도전하고 희곡을 잘 형상화하려고 노력한 오세곤이 있었다. 이 정도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 번역가, 연출가, 평론가, 연극정책 설계자 등 많은 수식어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그냥 연극인이었으면 좋겠어요. 연극인.”

몇 해 전 대학을 정년퇴임하고 칠순(七旬)이 가까워지는데도 오세곤 선생은 대학 시절만큼 뜨거웠고 한국연극계가 정책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시절처럼 여전히 할 일이 많아 보이면서도 이들 이야기를 하면서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보였다. 그는 술 한 잔으로 집에 갈 수 없을 때 잔다는 방을 열고 보여주었다. 2평 남짓한 방에는 그가 대학 때부터 모아온 LP판들과 공연기록을 한 VHS 테이프들 수백 개와 노끈으로 묶인 책들로 가득했다. 그가 인생의 시간을 버릴 수 없는 것은, 그만큼 오세곤 선생은 한국연극제도의 위기 때마다 구원투수로 나서며 전투적으로 달려왔기 때문인 듯 보였다. 그가 번역하고. 평론 글을 쓰며 연극교재를 써온 책들을 들고 바라보며 사진으로 담을 때 행복해 보였다. 인터뷰를 끝내고 두 사람은 감자탕으로 빈속을 채웠고 선생은 식사하면서도 48년의 연극인 인생을 다시 꺼냈고 온양온천역은 온천의 온수에도 눈발이 녹지 않고 쏟아졌다. 연극 환경을 위해 옳다고 생각되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끝장을 보는 사람이 오세곤 선생이고, 그런 고집과 신념이 오세곤을 각인(刻印)시켰고 한국연극의 시간은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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