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선수 꿈꾸다 쇼트트랙 국가대표로 성장한 김길리
피겨 퀸이 되고 싶었지만, 이제는 쇼트트랙 여왕을 꿈꾼다. 쇼트트랙 기대주 김길리(18·서현고)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김길리는 지난달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2022~23 쇼트트랙 월드컵 2차 대회 1000m에서 1위에 올랐다. 성인 국제대회에서 따낸 첫 금메달이었다. 김길리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4차 대회까지 메달 4개(금1, 은1, 동2)를 목에 걸었다. 월드컵 포인트 종합 랭킹에선 세계 최강자 수잔 슐팅(네덜란드)와 코트니 사로(캐나다)에 이어 3위에 올랐다. 1500m는 1위다.
김길리는 '남다른 떡잎'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전국 대회를 휩쓸었다. 2020년엔 주니어 세계선수권 1000m 금메달을 따냈다. 그리고 지난 5월 국제대회보다 어렵다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언니들을 제치고 1위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시니어 무대를 처음으로 밟았지만 세계적인 선수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했다.
김길리는 "1, 2차 대회 때는 처음이니까 무슨 느낌인지 감을 잡으려고 했다. 경험을 많이 쌓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세계 1, 2등 선수들과 같이 탔는데, 결과까지 잘 나와 좋았다"고 말했다. 최민정, 슐팅 등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하기도 했다. 김길리는 "(3위를 차지해)아쉽기도 했지만, 더 노력하면 민정이 언니랑 1, 2등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김길리는 개인전 뿐 아니라 단체전에서도 맹활약했다. 여자 대표팀은 두 번이나 우승했고, 2000m 혼성 계주에서도 3번이나 정상에 올랐다. 특히 2차 대회 여자 3000m 계주 결승에선 김길리가 마지막 바퀴를 도는 2번 주자를 맡아 멋진 추월로 금메달을 이끌었다. 최민정과 심석희 못지 않은 존재감을 뽐냈다.
사실 김길리가 스케이트를 신게 된 건 '피겨 여왕' 김연아(32) 때문이다. 김길리는 "엄마 친구 딸이 피겨를 배워 구경을 갔다. 나도 배우고 싶어 7살 때 여름 특강을 들었다. 그런데 점프 말고 다른 것만 가르쳐줬다"고 떠올렸다. 김길리의 어머니 이진영(51)씨는 "여자아이라 예쁜 걸 좋아했다. 하지만 집 근처 한국체대에는 피겨 수업이 없었다. 그래서 쇼트트랙을 먼저 했다"고 설명했다.
원하던 종목은 아니었지만, 남다른 재능을 발견했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아버지 김선호(53)씨를 닮아서인지 빠르게 실력이 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듣는 주말반 수업을 들으면서, 한 달 만에 출전한 생활체육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개인 레슨을 시작했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인 엘리트 선수의 길을 걸었다.
김길리는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했다. 나이가 두세 살 많은 언니들도 이겼다. 18살이 되면 열리는 2022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세웠다.
승승장구하던 김길리의 발목을 잡은 건 코로나19였다. 실업팀 선수도, 국가대표도 아닌 선수들은 훈련장소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때마침 사춘기도 왔다. 어머니 이진영씨는 "부상도 있고, 정신적으로도 힘든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고1이었던 2020년 김길리는 어머니에게 "쇼트트랙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묵묵히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엇나가지 않을 거라 믿고 지켜봤다"고 했다.
방황은 2주 만에 끝났다. 김길리는 "실컷 놀았는데, 삶이 허전하더라"고 했다. 다시 스케이트 끈을 졸라매고 빙판 위에 섰다. 짧은 일탈은 쇼트트랙에 대한 의지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김길리는 "국가대표 후보선수로 선발되면서 대표팀에서 생활한 게 큰 힘이 됐다. 경쟁심도 생기고,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베이징 올림픽 티켓이 걸린 2021년 선발전에선 8위로 탈락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올해 선발전에서 1위에 올랐다.
김길리의 롤모델은 6년 선배 최민정이다. 어렸을 때부터 김길리는 최민정을 보며 자랐다. 최민정은 2018 평창올림픽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둘은 체격(최민정 1m62㎝, 김길리 1m60㎝)도 비슷하다. 침착하고 안정적인 레이스를 한다는 점도 닮았다.
김길리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훈련했다. 언니는 정말 스케이팅이 뛰어나 닮고 싶었다. 기술에 대해 알려주기도 한다. 올 시즌 국제대회를 함께 치르면서 더 친해졌다. 경기 끝나면 '배고프다, 집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며 웃었다.
김길리는 월드컵 3차 대회 때부터 결승 레이스 전 특별한 동작을 했다. 축구 국가대표 조규성(24)의 트레이드 마크인 손가락을 꼰 뒤 키스하는 세리머니다. 하트 모양이기도 하고, '행운을 빈다'는 의미도 담겼다. 김길리는 "1등을 하고 세리머니를 하고 싶었는데 아쉽다. 조규성 선수는 잘 생기고, 키도 크고 축구도 잘 한다. 그런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미소지었다.
내년 3월 서울 목동아이스링크에선 세계선수권이 열린다. 김길리도 당당히 이제는 우승후보로 꼽힌다. 김길리는 "우리 나라에서 열리니까 팬분들도 많이 올 거다. 그 앞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며 "베이징올림픽엔 나가지 못했지만, 경기를 다 봤다. 2026년 밀라노 대회엔 꼭 나가고 싶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수원=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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