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균 감독이 ‘영웅’ 만들며 고민한 것 [쿠키인터뷰]
뮤지컬 원작, 배우 정성화 주연, 라이브 녹음. 영화 ‘영웅’(감독 윤제균)은 처음부터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 한국 영화 시장에서 흥행이 쉽지 않은 뮤지컬 영화였고, 티켓 파워가 크지 않은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굳이 현장에서 직접 노래를 녹음하는 어려운 길을 자처하기도 했다. 2019년 촬영을 마친 영화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여파로 2년이나 개봉을 미뤘다. 지난 21일 개봉 직후부터 영화 ‘아바타: 물의 길’(감독 제임스 카메론)에 밀려 박스오피스 2위를 지키고 있다.
막상 영화를 보면 시선이 달라진다. 왜 이 뮤지컬을 영화화해야 했는지, 정성화를 꼭 캐스팅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된다. 뮤지컬 넘버를 라이브로 녹음하는 것이 어떤 효과를 주는지도 체감할 수 있다. 흥행이 예상되는 ‘아바타’ 시리즈와 맞대결을 택한 자신감의 근거도, 처음부터 굳이 어려울 길을 간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어렴풋한 짐작이 하나 둘 명확해졌다. ‘영웅’ 개봉 전인 지난 14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윤제균 감독은 대부분 질문에 “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입을 열었다. 무엇을 목표로 했는지, 왜 ‘영웅’을 만들어야 했는지, 첫 장면은 무엇으로 하고, 노래와 영화 비중은 어떻게 할지 등 고민할 주제가 계속 나왔다. 영화 ‘국제시장’ 이후 8년 만에 새 작품으로 돌아온 윤 감독이 영화를 만들며 무엇을 고민했고, 어떻게 결정했는지 정리하며 ‘영웅’이 가진 의미를 되짚었다.
뮤지컬 ‘영웅’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한 이유
윤제균 감독이 뮤지컬 ‘영웅’을 처음 본 건 2012년이었다. 실제 영화 제작이 본격 진행된 건 2017년이지만, 윤 감독은 이미 그때부터 영화화를 결심했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대결 구도 때문은 아니었다. 안중근과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드라마가 주는 울림이 컸다. 조마리아 여사가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를 노래하는 대목에서 오열했다. 윤 감독은 인터뷰에서 “마음을 헤집었다”, “마음에 와 닿았다”,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모든 노래를 라이브로 녹음한 이유
윤제균 감독이 뮤지컬 ‘영웅’을 영화화하며 세운 목표가 있다. 먼저 원작 뮤지컬을 본 관객이 영화를 봐도 실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세계 시장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뮤지컬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걸 달성하지 않으면 ‘영웅’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목표는 자연스럽게 라이브 녹음으로 이어졌다. 뮤지컬 공연을 본 관객들이 느낀 생생한 현장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국내 뮤지컬에서 처음 도전한 방법인 만큼 힘들었다. 겨울 촬영이었다. 노래 외에 다른 소리가 들어가면 안 되기에 현장 스태프들은 사각거리는 패딩 점퍼를 입지 못했다. 배우 배정남이 소리가 나지 않는 플리스 점퍼를 200장 협찬받아서 스태프에게 나눠줬고, 강풍기를 50미터 밖에서 비닐로 연결해 효과를 내며 찍었다. 배우들도 같은 장면을 10번씩 찍으며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윤 감독은 “이 정도로 힘든 걸 알았으면 아마 더 고민했을 것”이라고 했다.
어색하지 않은 뮤지컬 영화를 만들려면
일부 관객이 뮤지컬 영화를 꺼리는 이유가 있다. 배우가 연기하다가 갑자기 노래가 나올 때 찾아오는 어색함. 윤제균 감독은 그 어색함을 극복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노래와 대사를 5:5로 하는 것이 어색함을 없애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노래가 처음 나오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하려고 장면 전환에 신경 썼다. 설희(김고은)가 노래를 시작하기 전 술잔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면서 연못을 비춘 다음 노래가 나오는 식이다. 윤 감독은 “배우가 노래를 한다는 생각이 들면 감정이 빠져나온다”라며 “장면이 바뀌면 배우가 연기하는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보다 훨씬 이질감이 덜하다”고 설명했다. 뮤지컬 경험이 많은 정성화가 노래를 처음 시작하는 ‘송 모먼트(Song moment)’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며 도움을 줬다.
첫 장면은 뮤지컬
‘영웅’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간다. 안중근이 의병에 지원하려고 집을 나서는 이야기부터 사망할 때까지. 관객들은 안중근 의사가 어떤 고민을 하고, 왜 선택했는지 하나씩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영웅’ 첫 장면은 안중근이 동지들과 함께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 장면이다. 이후 시간을 거슬러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서 다시 시작한다. 이렇게 배치한 이유가 있었다. 윤제균 감독은 “관객에게 ‘영웅’은 뮤지컬 영화라고 먼저 소개하는 것”이라며 “그러지 않으면 설희가 노래할 때까지 노래가 안 나온다. 10분 만에 갑자기 노래가 나오면 어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웅’ 주인공은 꼭 정성화
정성화를 캐스팅한 이유를 묻자, 윤제균 감독이 되물었다. “정성화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있으면 썼겠죠.” 중요한 건 실력이었다. 인지도는 그 다음이었다. 정성화보다 노래나 연기가 부족한 배우를 캐스팅했으면 비난이 클 거라 예상했다. 정성화여야 원작 뮤지컬을 본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 세계 시장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 될 것 같았다. 윤 감독은 “제일 실력 있는 배우가 안중근으로 나와야 했다”라며 “정성화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흥행 감독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영웅’
영화 ‘해운대’와 ‘국제시장’. 윤제균 감독은 이미 두 번이나 1000만 관객을 달성했다. 차기작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또 1000만 관객을 목표로 할 수 있었다. 유혹도 있었다. 하지만 윤 감독은 “1000만 관객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제작자로선 상업적인 흥행을 더 많이 고려한다. 하지만 작품을 연출하는 감독은 다르다. 자신이 꽂히는 작품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제작하는 3~4년 동안 지옥이 펼쳐진다고 한다. 윤 감독은 “흥행을 목표로 작품을 하면 행복하지 않다”라며 “잘 만들어서 관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다는 명확한 명분과 동기부여가 있으면 지옥이 아니다. 행복한 시간이다. 영웅을 후자였다”고 설명했다.
‘영웅’을 봤으면 하는 관객
윤제균 감독은 개봉 전 시사회에서 ‘영웅’을 본 관객 반응을 처음으로 봤다. 깜짝 놀랐다. 단지동맹을 하며 부르는 첫 노래부터 박수가 나왔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박수는 5~6번 더 나왔다. 울컥했다. 몸 둘 바를 몰랐다. 감사했다. 좋았다. 상영을 마친 후 한 관객이 윤 감독을 찾아와 “좋은 영화 만들어줘서 고맙다”며 “개봉하면 아이들을 데리고 꼭 다시 보러오겠다”고 했다. 감사한 말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영웅’을 만든 윤 감독의 바람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가족 관객이 많았으면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학생 관객이 많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윤 감독은 “요즘 아이들은 국어, 영어, 수학에 비해 한국사 공부를 많이 안 하더라”라며 “안중근이 누군지 알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은 알지만, 안중근의 직업은 모른다. 학생들이 많이 ‘영웅’을 보러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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