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통계는 죄가 없다
고속성장한 한국의 통계청도 정권 입맛 따라 통계 휘둘려
尹정부 올바른 정책 원한다면 ‘정권의 시녀’로 가둬선 안돼
2007년 2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역사적인 북한 공연 취재차 평양을 방문했다. 베이징을 거쳐 한밤중에 순안공항에 도착, 북측이 제공한 버스를 타고 시내 양각도 호텔로 가는 도로에 진입하자 탄성이 터져나왔다. 곳곳에 가로등이 켜지고 주요 건물에 오색 조명까지 휘황찬란하지 않은가. 7년 전 방문 때 칠흑 같은 도로 사정에다 숙소인 고려호텔의 잦은 정전으로 추위에 떨었던 기억과 대조적이었다. 안내원에게 이유를 물으니 “경제는 그저 돈이 돌아야 제맛이지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열흘 전 미국과 북한 간 2·13 핵사찰 합의로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동결됐던 북한 자금 2500만 달러가 풀린 덕이라는 요지의 설명이었다. 농담이 섞이긴 했지만, 안내원의 야간 불빛 브리핑은 북한의 열악한 경제 사정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기억된다.
미국 학계에선 각 국가의 야간 불빛 세기를 지수로 만들어 국내총생산(GDP) 등 경제 규모를 측정하는 작업을 벌이기도 한다. 그중 2008년 루이스 마르티네스 시카고 대학교수가 발표한 논문이 선도적 역할을 했는데, 미 항공우주국(NASA) 인공위성이 찍은 야간 불빛 사진과 180여개 국가가 발표한 GDP 수치를 비교했다. 불빛 세기가 10% 늘 때 GDP 증가치는 독재국가가 2.9~3.4%로 민주 국가의 2.4%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독재자들의 경제 통계 부풀리기로 결론을 내린다.
논문 결론처럼 독재국가들만 경제 치적을 치장하고픈 걸까. 모든 국가 지도자들의 공통된 욕망이다. 흥미로운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엔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들을 상대로 ‘개발’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욕망을 자극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식민지 개척 노하우가 있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승전국이 장악한 유엔은 구식민지 국가들의 회원국 가입 조건으로 국민 계정체계(SNA)를 제도화하고 성장 지표로 국민총생산(GNP) 개념을 도입해 작성하도록 했다. 지금은 GDP로 측정 지표가 바뀌었지만, 애초 GNP는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에 경제개발을 독려해 그 실적을 평가하고 지원하기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그중에 6·25까지 치른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모범국 중의 모범국이 됐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실행을 위해 설치한 경제기획원에 공보처 소속이던 통계국을 편입시켰다. 현재는 기획재정부 산하 외청인 통계청의 존재 목적이 유엔의 요구에 부응해 경제개발 정책을 옆에서 돕는 통계 작성이었던 셈이다. 경제 장관들은 대통령 보고를 앞두고 통계청이 제공한 경제지표를 달달 외우는 게 일상이 됐던 시절이다. 통계학을 국내에 수입한 이들이 수학자가 아닌 경제학자들이었던 것 역시 통계학에 기반을 둔 계량경제학으로 정책 대응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1962년 국내에서 통계학과를 처음 개설한 고려대가 이공대가 아닌 경제학과가 있는 정경대에 배치하고 이후 연세대, 성균관대, 중앙대 등이 통계학과를 이과가 아닌 문과에 개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산술적인 계산을 넘어 사회과학적 분석과 인문학적 상상력도 요구됐을 것이다.
감사원이 최근 문재인정부 당시 통계청이 발표했던 소득·고용·주택 통계의 조작 의혹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혀 논란이 한창이다. 여권은 조작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국정 사기극이라며 맞장구를 친다. 개발독재 시대부터 통계청 어깨에 지워진 존재 이유를 이해한다면 통계수치에 순결을 요구하는 건 무리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예산권 인사권 입법권을 틀어쥔 기재부의 외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권 입맛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번 조사가 내로남불 논란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면 문재인정부뿐 아니라 그 이전 정부 때 의혹도 함께 다루는 게 형평에 맞는다. 현재 감사원이 조사 중인 2018년 소득 불평등 통계와 2020년 한국부동산원의 집값 통계조작 의혹 외에도 2012년 가계동향 조사 변경을 놓고 이명박정부가 통계청을 압박한 의혹 등 정권마다 팔 비틀기 의혹은 차고 넘친다.
윤석열정부가 올바른 정책을 위한 객관적인 통계를 원한다면 이미 언론에 보도된 ‘올즈’들로 전 정부를 물어뜯기보다 통계청을 정부 손에서 놔주는 게 근본 치유책이다. 세계는 민간 주도로 4차산업의 총아인 빅데이터 개발에 매진하는데 언제까지 통계청을 정권의 시녀로 가둬놓을 셈인가.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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