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읽기] 눈사람의 시간

2022. 12. 28. 00:4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문태준 시인

지난주 제주에도 많은 눈이 내렸다. 육지에 일을 보러 나가려고 했으나 비행기편과 배편이 모두 끊겨 나갈 수가 없었다.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꼬박 사흘을 집에서 살았다. 눈보라와 습설(濕雪)의 사흘이었다. 밭에 숲에 골목에 돌담에 인심(人心)에 눈이 쌓였다. 감귤나무와 동백나무와 대나무와 측백나무의 푸른 잎사귀에도 흰 눈이 소복하게 내렸다. 내 책상 위 한쪽에는 강정효 사진작가가 찍은 제주의 겨울 풍경 사진이 하나 놓여 있는데, 그 사진 속 설경을 내 집 주변에서 고스란히 만났다.

제주 출신의 강정효 작가는 『세한제주(歲寒濟州)』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펴내면서 이렇게 썼다. “제주의 겨울을 담아낸다면 무엇보다도 눈과 어우러진 돌담이 들어가야 제격이다. 제주의 눈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바람결에 옆으로 날아와 돌담에 쌓이기 때문이다. 하얀 눈과 검은 돌담, 그 너머의 푸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 폭의 수묵화다.”

「 거세게 눈보라 치던 폭설의 사흘
야생 생명의 위태로운 발자국 봐
고립의 때에 찾아온 공허감 느껴

아닌 게 아니라 눈보라가 치는 날 돌의 검은 빛과 눈의 흰 빛을 보았고, 측백나무처럼 잎이 지지 않는 나무들의 푸른 빛을 함께 보았다. 거센 바람에 밀리며 휘몰아쳐 가는, 헝클어진 눈보라의 시간이었다.

앞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고, 큰길을 향해 나 있는 올레의 눈을 밀쳤다. 눈을 치우다 말고 그새 뭉툭해진 비를 들고 서서 뒤돌아보면 비로 쓸어낸 길이 다시 흰 눈에 두텁게 덮여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직 쓸지 않은 눈 위에 나 있는 발자국을 보았다. 들개와 꿩과 고라니의 발자국이었다. 한파와 폭설 속에서 살아가는 야생의 생명이 낸 발자국이었다.

‘혹한이 와서 오늘은 큰 산도 앓는 소리를 냅니다/ 털모자를 쓰고 눈 덮인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피난하듯 내려오는 고라니 한 마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고라니의 순정한 눈빛과 내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추운 한 생명이 추운 한 생명을/ 서로 가만히 고요한 쪽으로 놓아주었습니다.’

이 시는 작년 겨울에 쓴 졸시 ‘눈길’인데, 이 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추운 생명들이 피난하듯 마을 가까이 내려와 낸 발자국이었다.

뒷마당으로 오가는 길을 내고 땅속에 묻어둔 김칫독 위에 눈사람을 하나 세워 놓았다. 눈사람은 눈이 오는 내내 있다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녹으면 함께 사라질 것이고, 그러면 그때에는 폭설이 다 지나가서 나는 일상을 회복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눈을 치우다 숨을 돌리는 때에 짧게 어떤 공허감 같은 것이 찾아왔다. 분주하게만 살다가, 바깥으로만 나돌다가 문득 갖게 된 이 고립의 시간에 허기 같은 것이 찾아왔다. 이상야릇한 느낌이었다.

허충순 시인이 쓴 시 가운데 ‘고요한 한낮’이 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화분에 꽃이 마르고/ 의자의 다리 하나는 기울고/ 자유도 뜻이 없다// 아직/ 내 귀는 듣고/ 내 입은 말한다.’ 이 시는 부재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듯하다. 사랑하던 사람이 지금 여기에 없다. 화분에는 꽃이 말랐다. 의자는 그것을 지탱하는 것의 일부를 잃었다. ‘자유도 뜻이 없다’라는 시구에는 큰 상실감이 배어있다. 사랑한 사랑이 없으니 내게 자유가 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뜻으로 이해된다.

‘맞은편’이라는 시에서도 ‘김이 나는 환한 쌀밥을 보며/ 생각한다// 오지 않는 사람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다 있다// 하나 비어 있는 자리에/ 저녁 햇살이 내리면// 밥을 먹는다는 것이/ 미안하다// 비어 있는 자리는 언제나/ 내 맞은편에 있다’라고 시인은 썼다. 모든 것이 다 갖춰진 듯해도 맞은편이 비어 있으니 그 부재를 견디기 어렵고, 시인의 마음은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끝없이 애틋할 뿐이다.

나도 폭설이 지나갈 때 부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먼 곳과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감정의 생겨남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요했지만 허전했다. 마치 어렸을 적에 이처럼 많은 눈이 내려 세상의 일을 잘 모르던 소년의 마음에도 쓸쓸하고 외롭고 슬픈 느낌이 깃들었던 저녁처럼.

내가 사는 동네에는 큰 피해가 없이 폭설이 지나갔지만, 곳곳에서 피해를 보았다는 소식이 들려와 마음이 아프다. 마당에는 잔설이 녹아 없고, 김칫독 위에 세워두었던 눈사람도 사라졌다. 폭설의 시간이, 눈사람의 시간이 지나갔다. 폭설로 보낸 사흘의 시간이 잔금이 많이 생긴, 흰빛의 백자발을 본 것 같다. 이런 폭설은 처음 겪었지만, 눈 위에 찍혀있던 추운 생명들의 발자국과 내게 문득 찾아 왔던 어떤 그리움과 슬픔의 감정은 잊지 못할 것 같다.

문태준 시인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