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서촌으로 시간여행…이상·윤동주·염상섭 만나볼까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어딘가를 응시하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한쪽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거칠게 채색된 이 초상화는 작가 이상을 모델 삼아 그의 친구 구본웅이 1935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그로부터 37년 후 창간된 문예지 ‘문학사상’ 창간호 표지를 장식했다. 문학사상이 만든 ‘이상문학상’에서도 당대 문인들의 유별난 ‘이상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다음 달 16일까지 청와대 춘추관 2층에서 국립한국문학관이 주관하는 특별전시 ‘이상, 염상섭, 현진건, 윤동주, 청와대를 거닐다’가 열린다. 작가 이상의 초상화와 그 초상화를 그대로 가져다 쓴 문학사상 창간호를 만나볼 수 있는 자리다. 1930년대 서촌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문인들을 주제로 책 91점, 작가초상 원화 4점, 사진 자료 1점, 신문 자료 1점 등 총 97점의 전시품을 선보인다.
전시는 문인을 테마로 했지만 책과 글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러 편의 삽화와 타이포그래피(문자 디자인), 문예지, 초상화 등을 통해 당시 문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작가들의 문우(文友) 관계를 드러낸 자료들이 눈에 띈다. 이상이 소설가 박태원을 위해 그린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삽화, 시인 김기림을 위해 직접 디자인한 시집 『기상도』가 대표적이다. 시인으로 알려진 이상이 뛰어난 디자이너이자 화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다.
1세대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과 소설가 염상섭의 관계를 보여주는 전시품도 흥미를 끈다. 염상섭은 당대의 신여성으로 이름을 날린 나혜석의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과 그가 이혼 후 부랑자로 객사하기까지의 일대기를 소설 ‘해바라기’와 ‘추도’로 펴냈다. 전시에서 두 작품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저것이 무엇인고’는 나혜석의 그림 중 백미다. 1920년 여성잡지 ‘신여자’에 실린 이 판화 속에는 짧은 머리를 하고 긴 코트를 입은 이른바 ‘신여성’이 등장한다. 그림 오른편에서는 두루마기를 걸친 두 남자가 손가락질하며, “저것이 무엇이냐” “그 계집애 건방지다”고 쑥덕댄다. 반대편의 젊은 남성은 “고것 참 예쁘다”며 눈을 떼지 못한다. 힐난과 선망이 교차하는 이 그림은 ‘신여성’을 향한 당대 남성들의 이중적인 사고방식을 풍자했다. 세상을 발칵 뒤집은 이 그림을 자신이 창간한 잡지에 실었을 때 나혜석은 불과 24살이었다.
시인 윤동주의 작품도 다수 전시됐다. 윤동주 시인 사망 후 출간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본과 증보판, 문고판을 만나볼 수 있다. 윤동주가 사랑한 백석의 시집 『사슴』도 선보인다. 사슴은 백석 시인이 직접 100부 한정판으로 간행해 문인들 사이에 전설이 된 시집이다.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5부가 남겨진 것으로 전해진다. 윤동주는 『사슴』을 구하지 못하자 필사해 간직했을 만큼 백석의 시를 사랑했다.
지난 22일 전시회 개막 이후 5일 동안 5000명이 넘는 관람객이 춘추관을 찾았다. 전시는 다음 달 16일까지 정기 휴관일인 화요일을 제외하고 예약 없이 무료로 볼 수 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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