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차 평교사가 승진 안 하려는 이유

정혜영 2022. 12. 27.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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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꺾이지 않는 마음] 교사 생활을 지탱하게 해준 이들이 있기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올해의 한 문장을 뽑자면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닐까요? "올해 당신의 '꺾이지 않는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시민기자들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편집자말>

[정혜영 기자]

"누나, 나이가 몇이지?"

모처럼 한자리에 마주한 막냇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동생이 내게 물었다. 동생(남동생)은 조금 늦은 결혼과 자녀 출산으로 인생의 이모작을 열심히 꾸려 가는 중이다. 삼남매 중 누이들도 30살이 넘어서 결혼했으니 남자 나이로 그리 늦은 나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남성 위주의 사회, 문화 속에 성장해 40대를 맞이한 한국 남자이니 생각이 많아지기는 했을 거라 짐작한다. 큰누나 정도의 나이쯤 되면 자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머릿속에 그려보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생의 롤모델을 찾는다. 어릴 적에 본 위인전에서, 학창 시절을 지내온 친구 중에서, 가족 일원이나 직장에서 만난 유능한 선배에게서 발견했을 수도 있겠다. 동생은 그 롤모델을 마지막 경우에서 찾은 듯하다. 

동생의 회사에서 새로 부임한 사장이 내 나이라고 했나, 한 살 더 적다고 했나. 50이 되기도 전에 한 집단의 '장'이 된 그 사람이 동생 눈에는 최고 유능해 보이는 사람이었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누나 나이를 물으며 직접 비교하는 것은 좀 치사한 일이었다. 그런 동생에게 당황스러웠던가, 뿔이 났던가.

"(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선생하고 같아?"

내 대답이 좀 까칠하게 튀어 나갔나 보다. "그럼, 뭐, 곧 교감, 교장 되는 거냐?"는 동생의 추가 질문에 나는 얼른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지치지 않는 나의 동력
 
 선생님
ⓒ 픽사베이
동생은 20년이 넘도록 '평'교사로 남아있는 내가 좀 답답해('무능해'가 더 적당하려나) 보였나 보다. 그래도 나이차가 많이나 업어 키우다시피 한 막냇동생에게 내 삶의 역사가 평가절하 되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이 각광받는 시대여서인지 오랜 세월, 한 자리에 머물며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고지식해 보일 수도 있겠다. 평생 한자리를 지켜내는 사람이 누군가의 눈에는 '고인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이 어찌 고여있을 수만 있겠는가. 살다 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는 것이 삶인 것을.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살아가다 어느 시기, 어느 계기로 새로운 생의 전환점을 맞기도 하지 않던가.

내가 이렇게 오래 이(23년 차 초등 평교사라는) 자리에 지치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는 원동력이 뭘까?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힘은, 한 해를 마칠 때쯤 받게 되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피드백이다. 올해 우리 반 학부모들은 학부모교원만족도평가 '자유서술식 평가'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내 기운을 북돋워 주셨다.
 
선생님이 기다려주시고 기대해주시고 반복적으로 가르쳐 주시니 아이의 성장이 느껴집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친구들과도 조심히 지내야 했던 1학년을 보내니 학교는 긴장해야 하는 곳이었거든요. 2학년 때 너무 좋은 선생님을 만나 학교에 정을 붙이고 주체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자연스럽게 학습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갖출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선생'의 단어가 참으로 멋있게 어울리는 어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3학년 때도 선생님을 만나면 좋겠지만, 안 되겠죠. ㅎㅎ
 
주변인에 영향을 더 많이 받을 거라 생각되는 저학년 시기에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나게 되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건강히 아이들 곁에 계셔 주세요.♡
 
상담 시 질문만 받지 않으시고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해 주시고 아이의 부족한 점을 여쭈었을 때 정확히 말씀해 주신 점에서 아이를 잘 파악해 주신다는 느낌을 받아 좋았습니다. 바라는 점은, '선생님'이란 직업이 너무나 힘든 직업이지만 이런 선생님이 학교에 오래 계셔주시면 좋겠습니다. 학교를 시작하는 출발점에 든든한 선생님 같은 분이 버팀이 되어 주시면 선생님을 거쳐가는 많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안 써도 되는 서술형 평가 문항란에 이런 따뜻한 마음을 남겨 주시는 학부모님들과 "내년에도 선생님과 만나고 싶어요!"라고 해 주는 아이들은 내게 또 다른 한 해를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용기의 원동력이다.

자리를 지키는 게 곧 멈춘 건 아니다

나는 23년째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다. 학생과 학부모는 그런 내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들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그 자리에 계속 있을 수 있겠는가.

누군가 답답할 정도로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해서 그(녀)의 역사가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드글드글 끓던 생을 관통하다 만난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삶은 다채로워지고 풍성해진다. 그 생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어떻게 결실을 맺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한 개인의 삶을 섣불리 재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오래 한 자리를 지키는 동안 더 단단해지고 더 깊어지기를 소망한다. 처음엔 별 볼 일 없던 돌멩이가 세월의 흐름 속에 계속 단단해져 다이아몬드가 되듯이. 만년 초등학교 평교사라도 어제보다는 오늘 조금 더 나은 '선생'이기를, 온갖 번잡한 것들로 시끄러운 세상에서 단단히 중심을 잡고, 느리더라도 끊임없이 정진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나의 교사 생활 23년을 지탱해 준, '꺾이지 않는 마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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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함께 게시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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