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별거 시대 즐기는 60대 남편 관찰 보고서

정경아 2022. 12. 2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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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직하고 '자연인'으로... 우리는 '만나면 좋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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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아 기자]

▲ 켄타우르스 프로판가스 통을 개조해 만든 네 발 달린 화목난로를 켄타우르스로 명명해 산 속 움막에 설치함.
ⓒ 정경아
2021년 초 대과 없는 정년퇴직이란 위업을 달성한 내 남편, 그러나 그는 서울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직장 관계로 대구와 서울에 벌여놓은 두 집 살림 체제가 정리되지 못한 건 당연한 결과.

이유 중 하나는 남편의 어마어마한 살림 규모다. 망원경 20대를 포함,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자재와 공구, 목재 더미들은 서울 32평 아파트의 수용 범위를 넘어섰다. 책 더미를 제외한 건데도 말이다.

퇴직 후 그가 이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서울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던 나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이라는 걸 알아차리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에겐 서울로 돌아올 생각이 아예 없었으므로.

남편의 세상이 열렸다

남편은 공대 출신이다. 기계나 공구에 관심이 많다. 공구 유튜브 채널에 열광한다. 메이드 인 차이나 공구를 자주 사는 터라 통관부호도 갖고 있다. 내가 싫어하건 말건 '에스토니아 도끼'의 효능에 대해 30분 떠들어댄다. 사들이는 것들 중 어떤 물건은 자주 쓰이고 어떤 건 한두 번 쓰고 난 뒤 대체된다.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소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에서 '테스토스테론 자폐' 증세에 대해 썼다.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영향 하에 평생을 살아가는 남성들 중 일부에게 나타난다는 현상. 중년 이후 타인과의 의사소통이나 교감에 어려움을 느끼는 남성들이 기계나 공구에 탐닉하는 경향이란다. 자기몰입형 인간의 한 유형을 판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가설이겠다.

공구 러버인 남편에게 오래 꿈꿔왔던 '호작질(손장난)' 월드가 열린 건 20여 년 전 평광동 골짜기 집으로 이사한 뒤다. 그는 뭐든 만들기 시작했다. 스툴을 만들고 식탁을 만들고 침대를 만들었다. 요거트 제조기를 만들어 처제에게 선물했다. 매제의 의뢰로 병아리 부화기를 만들었다.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목재를 사들였다. 컨테이너 작업방도 세웠다.

단골 고물상에서 프로판 가스통을 사온다. 전기톱으로 절단한 뒤 용접 기술을 뽐내며 난로를 만들 때 그는 싱글벙글 행복해 보였다. 조직 생활 속 부대낌에 대처하는 자기 치유 행위로 꽤 괜찮지 싶었다. 처자식과 떨어져 사는 허전함을 메꾸는 좋은 방식으로도 보였다.

퇴직이 가까워지자 그는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청도에 작은 산을 샀다. 그리고 시작된 간헐적 자연인 놀이. 집이 이미 외따로 떨어진 골짜기에 있거늘 웬 산이 필요해? 가족의 떨떠름한 반응에 그는 평생의 꿈이 산주가 되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경주 시댁 식구들은 "돈 안 되는 산"이라며 반대했다. 나와 아들딸은 그를 말리지 못했다.

산은 아름답지만 위험한 곳. 그는 고로쇠 약수를 채집하던 중 가파른 언덕에서 굴러 발목 골절을 당했다. 수술과 재활치료가 끝나자마자 교통사고가 덮쳤다. 놀란 시어머니가 용한 무당에게 찾아갔다. "그 산과는 인연이 아예 없으니 소유권을 가족 중 누구에게든 이전하라"는 말을 들었다. 청도 산에 아무 관심 없는 나와 딸과 아들은 하나같이 시큰둥. 효자 아들이 소유권 이전에 동의했다. 평생 산주가 꿈이던 남편은 산을 잃었다.

그렇다고 그의 산 사랑이 끝난 건 아니다. 아들의 산에 있는 약초들을 채집하고 자랑한다. 산 속 움막을 고치고 넓히며 태양광 시설로 전기를 사용한다. 프로판 가스통으로 만든, 괴이한 형상의 화목난로를 켄타우르스로 명명하고 설치한다.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말인 그리스 신화 속 캐릭터에서 영감을 얻었다나 어쨌다나.

근처 산 속 '자연인'들과 왕래하며 선배 자연인들의 생존 스킬도 전수받는다. 얼마 전엔 KBSTV <단짝> '해발 600미터 개스토랑'이란 프로그램에 동물 사랑 지극한 자연인을 방문하는 자연인으로 출연하기까지 했다. 

38년 된 '결혼 공조'의 결과

자연인 놀이는 좋아하지만 농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 5월이면 텃밭에 고구마를 심지만 곧장 잊어버린다. 딸기, 토마토, 고추, 가지도 잡초에 파묻혀 버리기 일쑤. 태평 농법이라고 주장하지만 동네 농사 고수들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렵다.

자칭 발명가이기도 한 남편, 한글의 점자화에 관심이 많다. 현재 쓰이는 점자는 배우기 어렵다는 게 그의 소견. 앞으로 한글 공용화를 추진할 세계인들에게 쉽게 익혀 쓸 수 있는 점자를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장착했다. 스마트폰 한글 자음과 모음도 현행보다 더 편리한 배열 방식을 고안해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중국어와 일본어 배열 방식도 새로 만들어 내느라 고심 중인 1인. 그 외에 특허청에서 일부 인정, 일부 반려된 몇 가지 아이템을 갖고 있는 그다. 세상이 인정해주든 안하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 다만 마누라의 인정을 못 받아 가끔 투덜댄다.

38년에 걸친 남편과 나의 결혼 공조는 어느덧 각자 살기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비혼 상태로 딸과 아들이 각각 독립한 후 남편과 내가 고강도에서 저강도 파트너십으로 전환하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 결과는 각자 취향 독립, 노년 독거다.

딸과 아들의 삶에 대해 내가 평소 지켜온 최소한의 개입 원칙, 이젠 남편에게도 확대 적용할 생각이다. 그가 나를 바꾸려 하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그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면 좋은 ♬ 친구'로 명랑한 별거시대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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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https://brunch.co.kr/@chungkyu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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