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개혁으로 시작해 덤프트럭으로 끝낸 '재벌집'의 한계
[이정희 기자]
▲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한 장면 |
ⓒ JTBC |
<'재벌집 막내아들'이 말하는 진짜 연민, 송중기의 선택은?>(http://omn.kr/2245r) 기사 속 한 문장이다. 그런데, 저 리뷰 속 문장이 무색하게, 그다음 회차에서 진도준(송중기 분)은 또 한 번의 덤프트럭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토록 반복되어 등장했던 대사,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복선이 결국 현실이 되고 만다.
아직 마지막 회가 남았는데? 설마 앞서 덤프트럭 사고처럼 또 누군가가 그 트럭을 막아섰다는 걸까? 하지만 그런 기적이 되풀이되지는 않았다. 일어날 일은 '진도준의 사망'이었고, 그에 따라 진도준은 죽었다. 그런데, 뜻밖에 윤현우(송중기 분)가 눈을 뜬다. 머리에 총을 맞고 벼랑 끝에서 떨어진 사람이 일주일 만에 눈을 뜨는 일, 그리고 후유증 하나 없이 뜀박질도 할 수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마지막 16회를 통해 시청률 26.9%(닐슨코리아 유료가구 플랫폼 기준) '대박'을 치고 종영했지만 좀처럼 그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는다. 모든 게 한낱 꿈이었다는 결말로 오래도록 회자되었던 SBS 드라마 <파리의 연인>이 다시 떠오를 정도이다. 윤현우의 정신으로 17년간 살았던 진도준은 실재할까? 한낱 의식불명 상태 속 윤현우의 꿈이었나? 마치 잠시 낮잠에 빠져든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듯이, '나비가 장자가 된 것인가,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라는 말처럼 헷갈린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 웹툰과 다른 결말로 인해 드라마 곳곳에 등장한 설정들, 화분 속 USB에 담겨 있는 녹음본 등에 개연성이 떨어지니 더욱 보는 이들로 하여금 몰입의 어려움을 겪게 한다.
하지만 드라마 속 설정들을 시청자들이 어디 따박따박 따지고 보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부가 방송된 이후 이러저러한 구설들은 그저 개연성 탓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내 마음이 갈 곳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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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에 죽음을 맞이한 윤현우는 1987년 진도준의 몸속에서 깨어난다. 분명 육체는 재벌집 막내아들 진도준이지만, 그의 정신은 윤현우였다. 그리고 윤현우는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고 간 이들이 누군가를 찾기 위해 순양을 손보기 시작한다. 거기에 더해 윤현우의 아버지, 어머니가 처한 상황이 그 에너지원이 되었다.
그런데 제 아무리 '정신'이 윤현우라 하지만, 그의 존재는 순양가 셋째 진윤기(김영재 분)의 둘째 아들이다. 즉 순양가의 일원인 것이다. 진도준이 막대한 자금을 굴리게 된 근원은 현재를 살아낸 윤현우의 경험이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순양 진양철 회장이 막내 손주에게 증여한 분당 땅 5만 평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제 아무리 윤현우라도, 결국 순양가의 일원이라는 존재론적인 한계가 분명한 것이 진도준이었다.
재벌 개혁, 능력 없는 재벌가의 승계에 대한 극명한 징벌적 구도를 구상한 작가 입장에서는 진도준이라는 인물에 의해 순양을 쇄신하는 것은 주제의식에 위배되는 결말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진도준이 가난한 집안 출신, 재벌에 의해 제거된 윤현우의 영혼을 가졌다 하더라도 결국 순양이 순양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결국 윤현우가 깨어나, 가난한 집의 보통 사람으로 진도준의 경험을 살려 순양을 징벌하는 '극적인 결말'이 이루어진 것이다.
▲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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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16부의 드라마에서 시청자들이 몰입했던 인물은 2회에서 15회까지 주인공으로 드라마를 이끈 '진도준'이라는 데 있다. 더구나 진양철 회장(이성민 분)과 진도준의 할아버지-손자 관계를 이 드라마 속 '베스트 커플'로 손꼽는 사람들이 많았을 만큼 이들의 케미스트리에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필자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순양가와 진도준 사이의 각축전을 보며 이 드라마가 흡사 2022년판 <야망의 세월>이나 <용의 눈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모임에도 초대받지 못하는 서자의 아들, 그런데 그 아들이 영특해서 할아버지 눈에 드는 내용이다. 심지어 죽을 위기에 빠진 할아버지의 목숨마저 구한다. 그 일로 할아버지에게서 '상금'을 얻는데 이를 엄청나게 불려 안 그래도 가업을 물려줄만한 인물이 없어 늘 고심하던 할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친구도, 가족도 없다'며 늘 입버릇처럼 되뇌는 할아버지가 "순양을 사겠다"고 당돌하게 나서서 매번 순양가를 물 먹이는 손자가 밉기만 했을까? 심지어 큰아버지는 물론 능력 없는 작은 아버지, 고모까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엎어버리던 막내 손자가 할아버지가 아끼는 기업이라고 '언 발에 오줌누기'인 줄 알면서도 순양자동차를 살리려 애쓴다. 아들도, 손자도, 심지어 부인마저도 자신을 믿지 않고 죽이려까지 하는데 유일하게 막내 손자만이 할아버지, 순양의 진양철 편이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고집하던 '장자 승계'를 물리고 진도준을 차기 회장감으로 낙점한다.
이토록 입지전적의 인물 진도준은 순양 회장 취임식만을 남겨놓고 있는 상황에서 두 번째 덤프트럭 사고를 당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말로 그를 퇴장시키고 죽은 줄 알았던 윤현우를 다시 깨운다니, 개연성은 둘째치고 사람들이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까.
▲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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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리에 연재된 동명의 원작 웹소설을 빌려왔다고 해도, 결국 드라마는 작가의 세계관 속에서 창조해낸 서사다. 그러니 16회 전개 역시 작가의 재량에 달린 문제가 아닐까. 그보다 첫 회부터 일관되게 '재벌 개혁'을 주제의식으로 선명하게 내세운 드라마가 덤프트럭 사고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는 점이 특히 아쉽다. 덤프트럭 사고와 같은 인명이 오가는 사고가 아니고서는 그들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게 아닌가라는 서사적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드라마 속 순양의 아들, 딸들은 경쟁사 대영그룹의 주영일 회장(이병준 분)이 비웃듯 제대로 된 인물이 없다. 재벌이라는 휘황찬란한 포장을 벗기고 나면 하나같이 협잡꾼에, 사기꾼과 다름없고 심지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멀쩡한 진도준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재벌 타도를 하고 싶었는데, 역설적으로 '재벌표 왕좌의 게임'에 사람들을 열광하도록 만든 셈이 됐다. 더구나 진도준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 그 과실이 윤현우에게 툭 떨어졌으니 더욱 여운이 깊다.
흔히 작가들은 말하곤 한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 이야기는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작가는 이야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하게 전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과연 <재벌집 막내아들>은 어땠을까? 적어도 두 번째 덤프트럭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다음이 기다려지는 드라마였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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