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경의 에듀 서치] “수능 없어진다”는 교육 수장의 말… 약속은 지켜질까
“없어진다.” “없애겠다.”
두 말의 차이는 뚜렷합니다. 앞의 말은 확신이 실린 전망이, 뒤의 말은 실행 의지가 담겨 있죠. 하지만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직장 갑질로 사회적 지탄을 받던 회사가 있습니다. 이곳 사장이 직원들을 모아놓고 “우리 회사에서 갑질은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사장은 사내 갑질이 사라진다는 전망을 내놓은 걸까요, 아니면 없애겠다는 근절 의지를 밝힌 걸까요. 직원들은 회사 차원의 대책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할 겁니다.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메시지라면 ‘없어진다’와 ‘없애겠다’는 동의어에 가까울 겁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최근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수능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현재 초등 저학년이 지금의 수능을 그대로 치는 것, 그런 상황에선 미래가 없다. 수능은 없어져야 마땅하고 또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학부모들께) 지금 어린아이들이 대학 갈 때 수능이 없을 거란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교육 행정의 꼭짓점에 있는, 수능 제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최고위 공직자의 발언입니다. 교육부 대입 파트에서는 이 부총리의 ‘없어진다’를 ‘없애겠다’라고 해석하면 펄쩍 뜁니다. 이런 해석을 담은 언론 보도에 “수능 폐지를 논의하지 않고 있다”고 반박 자료를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수장이 한가하게 전망이나 하고 있을 자리는 아니죠. ‘없어져야 마땅하다’ ‘수능은 없을 것’ ‘미래가 없다’ 등 발언에서 강력한 실행 의지가 읽힙니다. 그는 자신을 수능 폐지론자라고 칭합니다. 부총리 지명 전에는 미래 교육의 걸림돌로 수능을 지목하고 없어져야 할 제도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인공지능으로 평소에 학생을 평가하고 평가 결과를 축적하면 수능을 안 봐도 된다는 게 그의 지론입니다.
수능 폐지의 데드라인을 제시한 부분도 눈에 띕니다. 지금 초등 저학년이 대입을 치를 때는 수능이 없어야 미래가 있다고 했죠. 현 초등 2학년은 2014년생이고 이들은 2033학년도 대입을 치릅니다. 수능은 2032년 11월입니다. 먼 미래의 일은 아닙니다. 대입 개편은 4년 전에 발표하도록 법으로 정해놨습니다. 2033학년도라면 2029년 2월에는 발표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2028년 상반기에는 정부가 초안을 내놔야 합니다.
한 세대를 이어온 수능의 막을 내리자면 교육과정 전반에 대한 개편 작업이 수반될 것입니다. 만약 교육과정도 손질한다면 수능 폐지 여부를 정할 시점은 더 빨라집니다. 지난 22일 확정 고시한 고교학점제용 ‘2022 개정 교육과정’은 2019년 논의를 본격화했습니다. 3년 걸린 작업입니다. 이 부총리의 시간표대로 ‘포스트 수능’ 체제를 준비해야 한다면 2025~2026년 무렵에는 논의를 본격화해야 할 겁니다.
이 부총리의 수능 폐지 메시지의 타깃은 현 초등 저학년 이하 학부모입니다. 수능은 반드시 없어질 제도이니 5지 선다형 문제풀이를 위한 공부로 아이들을 몰아넣을 필요 없다는 당부입니다. 수능을 폐지할 수 있는 여건, 폐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후임자나 차기 정부로 바통을 넘겨주겠다는 약속이라고 해석하는 게 타당해 보입니다. 이 부총리의 약속은 지켜질 수 있을까요.
내년 상반기 나오는 대입 제도가 리트머스 시험지로 보입니다. 교육부는 ‘2022 개정 교육과정’의 후속 조치로 대입 개편을 추진 중입니다. 내년 상반기 초안을 내놓고 여론 수렴을 거쳐 2024년 2월 확정합니다. 2025년 고교생이 되는 현 중1부터 적용하는 제도입니다. 2028학년도 대입, 즉 2027년에 수능을 치르는 학생이 대상입니다.
이 부총리는 고교학점제용으로 만들어지는 새 대입제도는 ‘미세조정’일 것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잦은 대입 개편으로 학교 현장이 피곤하고, 특히 문재인정부 초기 발생한 수·정시 비율 논란처럼 학교 현장을 혼란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실제로 미세조정만 하면 수능은 현재의 영향력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러면 이 부총리의 발언은 허언이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새 대입제도가 실행되는 시점과 수능 폐지가 논의되는 시점이 얼추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수능의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한 채, 수능 폐지로의 급선회는 큰 저항을 불러올 겁니다. 저항에 직면하는 건 이 부총리가 아니고 차기 정부의 교육 수장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부총리는 대입 제도보다 학교 수업부터 바꿔보자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수능이 대입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고교 수업이 혁신되기는 어렵다고 일선 교사들은 입을 모읍니다. 서울 주요 16개 대학의 정시 비율이 절반에 육박하고, 수시에서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버티는 상황에서 학교는 수능을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대입은 책상머리의 교육 관료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학생 저마다 가장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적성에 맞는 수업을 듣는 것보다 수능 관련 수업에 몰두하는 걸 탓할 수 없습니다.
지난 정부의 교육 정책이 신뢰를 잃은 이유는 방향성 없이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을 남발했기 때문입니다. 고교학점제가 그럴싸해 보이니 추진하자 해놓고 정시 확대 여론이 높으니까 수능을 강화했습니다(당시 교육부는 강력 반대했으나 대통령이 직접 관철했습니다). 잔뜩 폼만 잡고는 골치 아픈 결정은 죄다 차기 정부로 넘겨버린 겁니다. 학교 현장에선 “도대체 어쩌란 거냐”는 불만과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모순적 정책이란 비판이 컸습니다. 이 부총리는 어떨까요. 수능에 얽매이지 않는 교육현장, 파격적이고 매력적이긴 합니다. 허풍쟁이가 아니라 수능 폐지의 초석의 닦은 장관으로 기록될 수 있을까요.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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