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의 세사필담] 올 한해 행복했나요?

2022. 12. 27.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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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아파트 입구에 놓인 구청 소식지가 그렇게 묻는다. 그랬을까? 언뜻 행복한 순간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행복이란 단어를 잊고 살았던 게다. 집 현관에 들어서는 때까지 그 기억은 아스라하다. 현실의 공격을 방어하는 벽이 너무 높아 행복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았다. 아니면 현실에 대한 면역체계가 너무 활성화돼 행복을 생산하는 마음의 인자가 소멸했을까. 구청 소식지에 실린 그 간단한 질문조차 답을 하지 못한 채 세모(歲暮)를 맞는다.

미국인의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 1985)을 분석한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R. Bellah)는 ‘행복’을 으뜸 항목으로 놓는다. 1장 제목이 ‘행복의 추구’다. 그런데 어쩐지 의구심이 든다. 행복은 추구해서 얻어지는 건 아닐 터. 행복 인지는 주관적, 심리적인데 그 마음결은 정치·경제 같은 객관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TV 인기프로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시련의 연속 끝에 행복하기로 작정했다. 반면 출세한 사람은 대체로 행복하다고 말하겠지만 주관의 창고에서 뒤통수를 잡아당긴다. 너 자신을 잃었는데… 이런 자기 검열.

「 행복한지 물음에 쩔쩔매는 세모
초고속 성장 열차에 사고 정지
출세욕과 생계에 짓눌린 자화상
내려놓고 사회와 가교를 놓을 일

행복은 자기 삶에 대한 총체적 평가, 기대와 좌절, 노력과 보상의 적정성 어느 곳에서 움튼다. 활동적 삶이 계속되는 한 행복은 판정하기 어렵다. 실패와 좌절을 거듭해도 자기 수양이나 최면술을 익혔다면 행복할 수 있겠다. ‘나 자신으로 살기’ 같은 자기계발서가 인기를 끄는 현상이 그렇다. 세상 이치와 자기 수련의 지혜일 텐데 그걸 내면화하기 쉬울까?

객관적 행복도는 경제성장과 역관계로 알려져 있다. 경제성장은 인간관계를 비인격적, 경쟁적으로 만든다. 최빈국 방글라데시의 행복도가 높다. 그런데 ‘선진국에서’ 경쟁에 밀려난 사람,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낄까? 국민소득 일 인당 3만5000달러 시대, 낙오자와 저소득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부업 뛰는 가장이 5년 전 대비 33% 늘었는데 투잡족은 41%나 증가했다. 삶이 헉헉댄다. 압축성장 끝자락에 엄습한 21세기 자본주의는 행복을 무너뜨리는 쪽으로 객관적 요건을 변화시켰다. 그 거센 공세를 이겨낸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은 행복할까? 더러는 그럴 것이지만, 대체로 행복하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서울대에서 유학한 오구라 기조 교수는 한국인이 초고속 성장 열차에 올라타 ‘사고가 정지됐다’고 말한다(『한국의 행동원리』). 설령 마음의 빈 공간을 감지했다 해도 성공 방정식을 바꾸기가 겁난다.

한림대학교 ‘시민행복조사팀’(팀장 박준식 교수)이 지역주민의 행복도를 측정했다. 등산에 비유한다면 춘천시민은 행복산(山) 7부 능선에 올라가 있다. 놀랍게도 서울과 수도권보다 높았다. 지역내 총생산(GRDP)은 전국 꼴찌 근처이니 역비례 법칙에 딱 맞다. 나이가 들수록, 농촌일수록, 의지할 친지가 많을수록 행복도가 높아졌다. 그렇게 그려진 ‘행복 지도’는 좀 딱해 보였다. 시(市) 주변에 거주하는 농민들은 그런대로 행복하다는데, 시내로 진입할수록 불행 비율이 높아졌다. 청장년세대와 전문가가 포진한 도심은 불행한 사람들의 집합지였다. 가구소득이 높고 집값이 비싼 지역이다. 이런 경향은 다른 도시들도 유사할 것이다.

주목할 점은 사회적 관계(親知)다. 농민이 맺은 사회적 관계는 좁지만 신뢰로 뭉쳐진 반면, 도시인의 그것은 넓지만 이해관계로 연결돼 있다. 전자는 강한 고리(strong tie), 후자는 약한 고리(weak tie)다. 허리가 휜 채 노인정을 향하는 행렬에는 평생 희로애락을 나눈 강한 유대가 물씬 풍긴다. 도시인이 맺은 약한 고리는 이익추구적, 실리적이다. 사업 성공과 출세에 유용한 그것을 사회학자 그라노베터(Granovetter)는 ‘약한 고리의 힘(strength of weak tie)’라 근사하게 불렀는데, 왠지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관계다. 출세가 한계에 달하면 그 관계는 소멸한다. 외톨이 위기가 엄습한다. 그렇다고 도시인이 농촌에 갈 수도 없고, 생활고는 여전한데, 어쩌랴?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여유를 애써 찾는 것. 성탄절에 사회적 근심을 하루만이라도 내려놓자고 결심하자 민낯이 드러났다. 거기에 성공과 출세욕, 생계와 각종 근심에 지질린 비아(非我)가 있었다. 초췌했다. 초췌한 자화상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곤, 둘러봤다. 내가 애지중지하는 사회적 영토가 있는지를. 벨라는 앞의 책에서 자기 가치에 맞는 모임과 단체 활동이 행복도를 높이는 요인임을 발견했다. 도시생활의 ‘강한 고리’, 자기와 공동체간의 가교를 놓는 일. 작지만 의미있는 ‘참여’가 시민의 길, 행복의 길을 연다고 했다. 미국만이 아니다. 월급 120만원에 1억원을 기부한 76세 야간 경비원은 행복하게 웃었다. 웃음 속에 자아와 사회 간 연결통로가 보였다.

올 한해 행복했나요? 불행의 책임을 정치와 경제에 전가하는 습관적 해명은 무용하다. 고속주행 사회에 자아를 저당 잡힌 한국, 올 세모는 그 초췌한 자화상과 함께 지내보려 한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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