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뿔 여우

전병선 2022. 12. 2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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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청년이라며 J 여사는 은근히 아들 자랑을 했다. 두 아들이 모두 어디 내놓아도 훌륭한 신랑감이라고 그녀의 친구들도 덩달아 그 댁 아들을 칭찬했다. 딸 가진 엄마들이면 누구나 눈독을 들이지만 어떤 며느리가 들어올는지 기대가 된다는 것이었다. J 여사는 아들도 잘 키웠지만, 인품이 좋아 주변의 선후배와 친구들에게도 평판이 좋은 훌륭한 가문이었다.

드디어 큰아들은 그럴싸한 집안의 규수를 만나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렀다. J 여사는 일 년쯤 아들 내외와 함께 지내면서 며느리 사랑을 키우겠다고 했고, 딸 겸 며느리가 들어온 후 집안이 전보다 더 화기애애하다고도 했다. 마치 쉼표 없는 연애편지를 읽는 듯 며느리 자랑을 하는 J 여사를 바라보면서 나도 덩달아 마음이 뿌듯했다.

그 후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를 찾아온 J 여사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어디 불편하세요?” 조심스럽게 건넨 내 말에 J 여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뜬금없이 “원장님 아들들 잘 키우세요….” 라고 했다. 결혼한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출근한 뒤 며느리는 위층에서 외출 준비에 바쁘고 J 여사가 응접실에서 울려오는 전화를 받았는데 공교롭게 며느리와 동시에 수화기를 들었다고 했다. 안절부절못하고 숨죽이고 있는데 며느리의 친구는 다짜고짜 “너희 집 불여우 나갔니?” 라고 하더란다.

“얘 말조심해 아래층에 계셔.”
“어머! 얘는 너희 시어머니 불여우라고 네가 말했지 내가 했니? 내숭 떨지 말고 빨리 나와.”

전화는 그것으로 끊겼고 J 여사는 수화기를 떨어뜨리며 쓰러졌다. 쓰러지며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많이 다쳤다고 했다. 그런 불상사가 벌어졌으니 가족회의가 열렸고 시아버지는 그날로 집을 구해서 아들 며느리를 내보냈다고 했다. 그 후유증이 J 여사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로 드러났던 것이다.

늘 우아하고 근엄하여 감히 접근하기 어렵게 느껴졌던 J 여사가 그날은 유난히도 소탈해 보였고 내가 비집고 들어갈 만큼 겸손한 모습으로 변했다.

“저 여사님 아직도 며느님과 서먹하세요?”
“글쎄 세월이 약이라지만 내겐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아들과도 시나브로 거리가 멀어지고….”
“왜 아니겠어요. 근데 불여우란 말은 그리 나쁜 말은 아닌데요….”

나는 불여우라는 말이 십 대부터 육십 대까지 보통으로 쓰는 신세대의 애칭이라는 걸 설명하였다. 조화와 적응에 뛰어난 사람, 친절하고 사교적인 사람, 어떤 상황에도 유능하게 대처하는 사람을 일러 요즘 젊은이들은 ‘불여우’라고 한다. 불여우라는 말을 들었다면 J 여사는 일단 며느리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셈이라고 말해 주었다. 아들 둘 잘 키우고 남편에게 사랑받는 시어머님 그 비법이 무엇일까.

그러다 젊은 애들은 ‘너희 시어머니는 불여우인가보다!!’라고 했을 것이다. 정말 그랬을 거다.
“그나저나 전당대회를 한번 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요. 좋은 의견이긴 한데. 이미 저만치 멀어졌는데 어떻게 말을 꺼낼 수 있을까요?”
“일단 시어머니로서의 체면은 잠시 접으시고 선수를 치세요. 가령 ‘야 젊은 여우 이 늙은 불여우하고 협력하는 게 어때?’라고 접근해 보세요.”

J 여사는 의외로 쉽게 내 말에 동의하였다. 나도 의아했다. 만날 때마다 J 여사의 근엄하던 모습이 부드럽게 변한 것이다.

고난이 네게 유익이라는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삶에 여러 모양의 우수사례와 크고 작은 고난은 때때로 사람의 고질적인 자만심과 우월감을 멈추게 한다.

“참고의 말 고마워요. 아들을 잃어버린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지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좋은 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
J 여사는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바로 엊그제였다. J 여사가 웃으면서 들어서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성공했어요” 속삭이듯이 말했다. 시어머니의 권위를 세우지 않고 순수하게 내심을 털어놓았더니 용기를 얻은 며느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다가앉더라고 했다.

“어머님 그 말 나쁜 뜻으로 한 말 아니었어요. 아들들의 존경심을 받으면서 아버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시는 어머님의 비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어요. 그 친구 그만 입이 거칠어서 어머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어요. 어머님, 정말 죄송해요.”

“아니다. 아가 나도 불여우 나쁘지 않다. 그게 애칭이라더라. 내가 너무 몰라서 문제를 만들었었다. 미안하다. 얘야, 우리 두 불여우가 뿔여우 되어 우리 집안을 잘 지켜나가자.”
“어머니, 감사해요.”
“아니다. 오늘 정말 행복하구나.”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일들은 순간에 일어나는 아주 작은 사건들이다. 무심코 내뱉은 하찮은 말 한마디가 우리를 불행하게 혹은 행복하게 한다. 그리고 그중에는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 돌이킬 수 없는 흉터가 되어 남기도 한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것은 타고난 성품이 아니면 누구나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핵가족 시대를 사는 우리 사회, 서로 부대끼면서도 참아내고 이해하며 길들여가는 가정이라는 작은 훈련장이 사라지고 있다. 누구나 사랑받는 데는 불여우 기질을 가진 젊은 여성 세대들이 유행처럼 일어났으면 좋겠다. 집안에 며느리건 딸이건 함께 뿔 여우가 되려는 용기를 가진 여성들이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사랑의 뿔을 든든히 세우는 J 여사의 가정처럼 회복된다면 날마다 수많은 작은 천국이 탄생 될 것이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잠언 31장 10절)

<함께 걸었지>

아들을 만나러 갔다
부산행 기차를 타고
가로수를 스치며 지나가는 봄
녹음방초 산천도 함께 갔다
드높은 해운대의 하늘

하늘 끝 저 너머에서
꽃마차 타고 내려온 보물인지
선물로 받은 따뜻한 며느리
어렵사리 만난 인연인데
아들아, 부디 잘 살아라

세상에 그 어떤 꽃이라도
사람보다 아름다운 꽃이 있을까
만남은 섭리며 은혜라는데
더 머무르고픈 아쉬움에
우리 하루 이틀은 일순간이었다

눈에 아른대는 잔잔한 바다
멸치축제와 공원의 유채꽃
눈을 떠도 감아도
너희들의 환한 미소 안고
비단 같은 하늘 속을 함께 걸었지

깃털처럼 가벼이 하늘 향하고
하늘 저 끝 옥수가 쏟아지면
저 하늘처럼 파랗게 맑아지리
저 하늘처럼 곱디고운 마음이 되리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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