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이상 부엌을 지킨 정말 특별한 남편들
[노정임 기자]
▲ 책 <남편의 레시피> |
ⓒ 사계절 |
시댁에 첫 인사를 갔을 때, 1933년생 시아버지는 부엌에서 요리하던 중이셨단다. 5남매는 아버지가 해준 음식으로 아버지를 기억할 정도로 가족들 먹이는 기쁨을 일찍이 터득하셨던 시대를 앞선 분이셨다. 숭어회, 매운탕, 수육, 수제비 등을 푸짐히 만들어서 가족은 물론 이웃들과도 나누셨다. 작가도 아기 낳고 몸조리할 때 먹은 시아버지의 가물치, 밥 때를 놓쳐 방문했던 시댁에서 먹은 뜨끈한 사골 떡국으로 시아버지를 추억하고 있다.
26년 간 주방을 지킨 남편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작가의 남편은 결혼 후 지금까지 26년 간 자연스럽게 주방에서 가족을 위한 밥상을 차린다. 본인의 생일에도 장조림과 생채를 만들고, 앓고 난 후에도 가족들 밥을 제일 먼저 걱정한다. 대부분의 집에서는 여자들이 주연인 '밥걱정의 노예' 역할을 남편이 맡는다. 아버지에게 배운 '처자식 먹여 살리기'에 충실한 남편은, 바빠서 가족과 긴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 때문에 밥하는 것에 더 정성을 쏟는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 집의 아들은 더 특별하다. 일반고를 다니며 3년 동안 야간 자율학습 대신 가족의 저녁상을 차렸고 매일 1장씩 영어 레시피를 제출했다. 한식, 중식, 일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고 특별한 요리들을 시도하고 실패와 성공을 하며 꿈을 키워나간 이야기를 엄마는 <소년의 레시피>(2017, 웨일북)에 담았다. 그 후 아들은 글로벌 조리학과에 진학하였고 119안전센터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 중에도 주방 이모 부재시에 동료들의 식사를 책임진다.
1장의 가족 소개에 이어 2장부터 4장까지 '밥걱정에 진심'인 남편의 레시피들이다. 하지만 재료나 요리 순서가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 식탁 사진도 한 컷 없다. 누구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닌 평범한 밥상이라며 사진 찍는 걸 허락지 않았단다. 가지나물, 무나물, 문어숙회, 콩나물불고기 등 어느 집 밥상에서든 볼 수 있을 것 같고 나도 할 만한 요리들이다. 요리 순서를 서술하지 않더라도 따라할 수 있을 것 같다. 읽으면서 예상되는 아는 맛! 그러나 그 음식을 만드는 남편을 보며 작가가 느끼고 깨닫고 떠올리는 이야기들은 재밌고 유쾌하다가 어떨 때는 애잔하기도 했다. '단짠'의 조화라고 할까?
제철 재료들로 늘 푸짐하게, 또 힘들이지 않고 척척 밥상을 차리는 남편은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고, 고기보다는 야채를 좋아하고 양이 적은 아내는 매번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밥을 차리고 저녁 약속이 있어도 집에 들러 저녁 밥상을 차리고 나가는 남편이다. 출장이라도 가려면 미리 밑반찬을 넉넉히 만들어 놓고 떠나는데 '철없는 아내 역할'의 작가는 그동안 못 먹은 배달 음식, 튀김, 떡볶이를 시킨다.
아빠가 바쁜 날, 밥, 김치, 달걀프라이, 조미김으로 '한국인의 표준밥상'을 차린 엄마에게 달걀프라이는 김치볶음밥의 데코라며 본인은 아빠 밥으로 자라는 아이라는 늦둥이 막내아들의 성장 이야기도 참 재미있다.
마음이 흐뭇해지는 에세이
유쾌한 문장들로 풀어낸 에피소드를 따라가다 보면 푸짐한 저녁 식탁에 초대받아 함께 앉아 있는 기분이다. 거창하고 생소한 요리가 아니라 따뜻한 집밥이라서 더 좋았다. 읽으면서 입맛이 돌고 배가 고파졌다.
중간중간 이 부부의 사는 법이 부럽고 우리 집 남자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들 시간되는 사람이 하면 되는 일이지 않은가? 가족을 위해 밥상을 차린다는 것은 성스러운 일이다, 오늘 저녁은 내가 솜씨를 발휘해 봐야겠다.
냉장고를 스캔하며 저녁 메뉴를 고민해 본다. 함께 먹으며, 먹는 모습 지켜보며 사는 이야기도 함께 나누리라. 벌써 내 마음이 흐뭇해진다. 작가의 남편, 아들, 시아버지도 이런 마음으로 밥상을 차렸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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