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힘 전대 선관위원장 유흥수의 심상치 않은 과거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김종성 2022. 12. 26.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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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전두환 신군부 버팀목으로 활약...강제징용 해법 '현자'로 등장

[김종성 기자]

 유흥수 한일친선협회중앙회장과 국민의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1월 28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일 국제협력 증진과 관계개선 방안 세미나에 참석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22.11.28
ⓒ 연합뉴스
 
국민의힘 전당대회 선거관리위원장에 유흥수 상임고문이 위촉됐다.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은 25일자 페이스북에 "지난 금요일 전국위원회에서 당 지도부 선출을 위한 당헌 개정안이 91.19%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의결되었습니다"라고 한 뒤 "다가오는 전당대회가 당의 단결과 전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도록 비상대책위원장인 제가 더욱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그 첫 번째 노력으로 전당대회 경선의 공정한 운영을 맡을 선거관리위원장에 유흥수 상임고문님을 추천하고자 합니다"라고 썼다.

26일, 국민의힘 비대위는 만장 일치로 유 상임고문을 선관위원장에 위촉했다.

전두환 정권 초기 치안본부장, 이유는

유흥수 고문은 선거에 정통하다는 평을 들을 만한 인물이다. 전두환 정권 때의 선거치안을 담당한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이었다.

대통령 전두환이 서울시경찰국장이던 그를 지금의 경찰청장인 치안본부장에 임명한 것은 대통령 취임 8일 뒤인 1980년 9월 9일이다. 전두환 정권이 그를 선거치안 책임자에 임명한 배경은 여당인 국민의힘이 그를 전당대회 선관위원장에 위촉한 배경과 맥이 닿는 부분이 있다.

 
정진석 위원장의 페이스북 글에도 나타나듯이, 국민의힘은 당대표 선출을 위한 당헌 개정안을 통과시킨 직후에 유흥수 고문을 위촉했다. 국민 여론을 배제하고 당원 투표 100%로 당대표를 선출하는 새로운 당헌을 내놓은 뒤, 이 당헌에 기초해 선거관리를 책임질 사람으로 그를 위촉했다.

1980년 9월 9일, 전두환 정권은 국민 전체가 아닌 5278명이라는 제한된 숫자의 대통령선거인에게만 대통령선거권을 부여하는 헌법 개정안 시안을 확정했다. 제5공화국 헌법으로도 불리는 데서 느낄 수 있듯이, 이 헌법은 이전과 크게 다른 정부체제를 규정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던 방식을 바꿔 대통령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정부체제를 대대적으로 바꿔야 했으므로, 치러야 할 이벤트도 많았다. 개헌안을 국민투표(A)로 확정해야 했고, 새로운 헌법에 따라 대통령선거인단 선거(B)와 대통령선거(C)를 치러야 했다. 또 신헌법 부칙 제5조 제1항이 기존 국회의 해산을 규정했기 때문에, 국회를 다시 구성하기 위한 총선(D)도 실시해야 했다.

개헌안 시안 확정은 A·B·C·D 네 가지를 신속히 치를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네 가지를 잘 치러내지 못하면 전두환 정권이 확립될 수 없었다. 그래서 네 이벤트를 치를 치안 관리자의 역할에도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전두환 정권이 당시 시안 확정일이던 9월 9일에 유흥수 서울시경국장을 치안본부장으로 임명한 배경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달 10일자 <조선일보> 1면 톱기사는 "정부는 9일 오전 중앙청에서 남덕우 국무총리서리 주재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 제11차 전체회의를 열어 제5공화국의 기틀이 될 헌법개정안 시안을 확정했다"라고 한 뒤 유흥수 서울시경국장을 치안본부장으로 승진시키는 등의 인사조치를 보도했다. 이 인사조치가 제5공화국 확립을 위한 일련의 선거 및 국민투표와 연관돼 있음을 시사하는 기사다.
 
 1980년 9월 10일자 <조선일보> 1면 '새 憲法試案(헌법시안) 확정 改憲審委(개헌심위) 의결 모두 10章(장) 131條(조)' 기사 중 화면 갈무리. 왼쪽 아래 당시 치안본부장 유흥수(柳興洙)씨 인사 소식.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유흥수 치안본부장은 재임 중인 1980년 10월 22일에 헌법개정 국민투표, 1981년 2월 11일에 대통령선거인단 선거, 2월 25일에 대통령선거, 3월 25일에 제11대 총선을 치렀다. 그는 전두환 정권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방법으로 선거치안을 관리했다. 전두환 정권이 국민적 지지 없이 친여세력의 지지만으로 정권 구축에 성공하는 데 기여했다.

그가 전두환 정권을 만족시켰다는 점은 그 뒤 일어난 일들에서 확인된다. 그는 네 가지 일을 다 치른 뒤인 1982년에 충남지사가 되고 1984년에 정무제2수석비서관이 되고 1985년에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출신 국회의원이 됐다. 이벤트들을 정권의 필요에 맞게 치러내지 못했다면, 이런 '경사'들이 연이어 생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필요에 맞게 4대 이벤트를 치른 사실이 함축하는 의미가 있다. 2007년 11월에 경찰청이 발간한 <경찰청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백서>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백서에 따르면, 경찰은 1981년 2월 25일 대통령선거인단 선거 때 "금품 매수, 투·개표 간섭, 후보자 매수, 허위 투표, 사전운동 등 부정선거운동" 등의 방법으로 개입했다. 3월 25일 총선 때는 "허위 투표, 각종 제한규정 위반, 허위사실 공표, 기부행위의 금지 등 위반, 후보자 비방, 득표수 조작, 사전운동 등 부정선거운동"을 저질렀다.
 
 경찰청의 <경찰청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백서(2007.11)> 중 '시대별 선거개입 양상과 경찰 및 일반공무원의 개입 유형' 표(34쪽). 전두환 정부 당시의 선거개입유형을 정리한 것.
ⓒ 경찰청
 
그런데 경찰이 그런 일을 저지를 당시의 경찰 총수가 유흥수였다. "전당대회 경선의 공정한 운영을 맡을 선거관리위원장에 유흥수 상임고문님을 추천하고자 합니다"라는 정진석 위원장의 문장을 곱씹어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유흥수 고문이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부터 전두환 신군부를 지탱하는 버팀목 중 하나로 활약했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이 1980년 5·17 쿠데타로 행정부까지 추가로 장악하는 단계에서 그는 서울시경국장으로 등장했다.

전두환 신군부 지탱 버팀목으로 활약 

1980년 5월 28일자 보도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가 시경국장에 임명된 날은 5월 27일이다. 5·17 쿠데타를 감행한 신군부가 그해 5월 18일부터 광주에서 예상치 못한 도전에 직면하고 그 도전을 겨우겨우 짓밟는 데 성공한 5월 27일에 그가 시경국장에 올랐다.

그날 신군부는 비상정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령을 의결하면서 유흥수 등에 대한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신군부가 비상정부 설치를 의결한 날에 시경국장이 됐다는 것은, 그가 전두환의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그가 경기고·서울법대 출신의 행정고시 합격자라는 점뿐만 아니라 6년 연하의 고향 후배(경남 합천)라는 점도 고려할 만한 요인이었으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유흥수 상임고문은 5·17 쿠데타 직후부터 부각돼 전두환 정권 태생기의 국민투표 혹은 선거에서 전두환 정권을 위해 활약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과 거리가 먼 인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유흥수 고문을 윤석열 정권이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은 그가 '국가 지정 현자'가 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지난 6일 외교부가 개최한 강제징용 현인회의에 유흥수 고문도 초청됐다.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 문희상 전 국회의장, 최상용 전 주일대사 겸 고려대 명예교수와 더불어 유흥수 고문도 강제징용 해법을 제시할 '현자'들로 선정됐다.
 
 6일 서울 시내 호텔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 주재로 첫 모임을 가진 현인회의에는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 문희상 전 국회의장, 최상용 전 주일대사 겸 고려대 명예교수, 유흥수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이 참석했다.
ⓒ 외교부
 
윤 정부가 고문회의나 자문회의 같은 표현 대신에 현인회의라는 일본식 표현까지 써가며 이 회의를 연 목적은 기시다 후미오 내각과 조율해 문제를 봉합하기 위해서다. 현인회의 참가자들은 전범기업의 사과·배상을 통한 문제해결 방식에 소극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이들은 전범기업의 책임을 최소화시키는 쪽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유흥수 상임고문은 지난 6월 15일자 <문화일보> 인터뷰 기사에서 강제징용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이미 끝났다고 주장했다. "징용 피해자 판결은 한·일 협정으로 배상받음으로써 국가 간 종결된 사안"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청구권 협정은 일제강점기의 민사채권관계를 다루는 것이었고, 이 협정을 통해 주고받은 것은 유·무상의 경제협력자금이지 식민지배 배상금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유흥수 고문은 다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일의원연맹 간사장과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을 역임한 경력을 발판으로 해, 가해자들을 설득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비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윤 정권은 한일 관계를 해결하기보다는 꼬이게 만드는 의견을 피력하는 유흥수 고문을 현인회의 구성원으로 초빙했을 뿐 아니라, "부정선거운동" 등 개입의혹이 불거진 당시 경찰의 총수였던 그에게 여당의 전당대회 선거관리까지 맡기려 하고 있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가 공정하게 진행될 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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