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촌 발레소년 꿈에 노조-성소수자 이야기 담았다

양형석 2022. 12. 2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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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11살 발레리노 지망생의 이야기 <빌리 엘리어트>

[양형석 기자]

지난 2013년 8월 봉준호 감독의 5번째 장편영화 <설국열차>가 개봉했을 때 영화 팬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지간한 할리우드 영화를 능가하는 화려한 캐스팅 때문이었다. <설국열차>에는 봉준호 감독의 첫 번째 천만 영화 <괴물>에 이어 송강호와 고아성이 다시 한 번 부녀지간으로 출연했고 마블 히어로 캡틴 아메리카를 연기하고 있는 크리스 에반스가 꼬리칸의 리더 커티스 역을 맡았다.

여기에 <설국열차>의 설계자이자 '최종빌런' 윌포드 역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상자이자 <더 록>의 험멜장군, <트루먼쇼>의 크리스토프 국장으로 유명한 에드 헤리스가 연기했다. 또한 <설국열차>에는 2008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빛나는 틸다 스윈튼과 2012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 옥타비아 스펜서가 조연으로 출연했다. 이들 대부분은 봉준호 감독에 대한 '신뢰'로 <설국열차> 출연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설국열차>에는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은 또 한 명의 유명배우가 등장했다. 바로 커티스를 형, 또는 아버지처럼 따르는 꼬리칸의 반항아 에드가 역의 제이미 벨이었다. 물론 <설국열차>에서는 영화 중반 진압군에 의해 목숨을 잃지만 벨은 데뷔작이었던 이 영화에서 작품 전체를 혼자 이끌었던 배우였다. 바로 발레리노를 꿈꾸는 가난한 소년의 성장스토리를 담았던 영화 <빌리 엘리어트>였다.
 
 <빌리 엘리어트>는 단 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1억 달러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주인공 이름이 제목인 영화가 가진 우직한 힘

감독이나 제작사에서는 영화 촬영이 모두 끝난 후에도 제목에 대해서는 끝까지 고민을 거듭한다. 때로는 영화의 제목이 흥행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복잡한 고민 없이 주인공 이름을 영화의 제목으로 짓는 경우도 있다. 주인공 이름을 영화의 제목으로 지으면 제목선정에 고민을 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관객들에게 직관적이고 우직하게 영화의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199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 등 무려 6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톰 행크스 주연의 <포레스트 검프>였다. <포레스트 검프>는 경계선 지능을 가졌지만 열정 넘치고 순수한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가 성장하면서 미국의 역사적 사건들을 경험하는 내용으로 진행되는 영화다. 따라서 캐릭터 이름인 <포레스트 검프> 만큼 적절한 제목을 찾기는 힘들다.

자식처럼 키우던 강아지가 살해 당하면서 피의 복수를 시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액션 스릴러 <존 윅>도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제목과 내용이 찰떡 같이 어울리는 작품이 됐다. 맷 데이먼의 첩보 영화 시리즈 역시 <본 아이덴티티>,<본 슈프리머시>,<본 얼티메이텀>이란 제목으로 개봉했다가 2016년 맷 데이먼이 9년 만에 컴백한 작품에서는 주인공 이름인 <제이슨 본>이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프랑스의 뤽 베송 감독은 유난히 주인공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자주 정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뤽 베송 감독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레옹>을 비롯해 <레옹>이 나오기 전 뤽 베송 감독의 대표작이었던 <니키타>, 한국배우 최민식이 악역 미스터 장을 연기했던 <루시> 등이 대표적이다. 뤽 베송 감독의 최신작 <안나> 역시 사샤 루스가 연기한 킬러의 이름에서 따온 제목이다.

한국 영화 중에서도 종종 캐릭터 이름을 제목으로 한 영화들이 있었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와 <박열>, 송해성 감독의 <역도산>처럼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실존인물이 주인공인 작품에서 캐릭터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사용했다(물론 역도산의 본명은 김신락이다). 2008년에 개봉했던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 1-1> 역시 관객들에게 깊이 각인된 강철중이라는 주인공 이름을 부제로 사용하면서 영화가 주는 강렬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소년의 꿈과 노력, 정치적 메시지까지 담은 영화
 
 제이미 벨은 데뷔작으로 할리우드의 쟁쟁한 배우들을 제치고 영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물론 지금도 그리 흔한 직업은 아니지만 현재는 '발레리노'로 불리는 남자무용수들이 제법 많아졌다. 특히 러시아 출신의 고 비츨라프 니진스키는 세계적으로 높은 명성을 누렸던 전설적인 발레리노였다. 하지만 영국 북부의 탄광촌에 살면서 남학생들은 축구나 복싱을 하는 게 당연했던 1980년대 중반, 발레에 흥미를 느낀 빌리(제이미 벨 분)가 아버지 재키(게리 루이스 분)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인 것은 사실 자연스런 일이었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 역사상 가장 긴 파업으로 기록돼 있는 1980년대 중반 '광부 대파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빌리 엘리어트>의 각본가 리 홀은 실제로 영국 북부 탄광촌 출신으로 마가렛 대처 정부의 석탄산업 민영화 정책 때문에 고향이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 봤다. 따라서 영화 곳곳에는 영국의 노동자들이 대처 정부 속에서 고통을 겪는 장면과 보수당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등이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역사 및 정치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빌리의 발레에 대한 노력과 성장, 그리고 가족 및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과 화해에 집중해서 감상해도 <빌리 엘리어트>는 충분히 감동적인 휴먼 가족 드라마다. 단 500만 달러라는 적은 제작비로 만든 <빌리 엘리어트>는 세계 각지에서 장기 흥행하면서 제작비의 20배가 넘는 1억900달러라는 눈부신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많은 관객들이 <빌리 엘리어트>의 최고 명장면으로 로얄 발레 스쿨에서 청년 발레리노로 성장한 빌리가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멋지게 점프하며 영화가 마무리되는 장면을 꼽는다. 하지만 빌리가 늦은 밤 마이클(스튜어트 웰즈 분)과 춤을 추다가 아버지에게 걸렸을 때 예전처럼 도망가거나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독무를 보여주는 장면 역시 상당히 인상적이다(아버지는 그 길로 코치를 찾아가 빌리에게 발레를 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화가 흥행하자 2001년 영국의 아동문학가 멜빈 버지스에 의해 소설판이 출간됐다. 그리고 2005년에는 영국의 유명 뮤지션 엘튼 존이 작곡에 참여한 뮤지컬이 제작돼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됐다. 2008년에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며 2009년 토니상 뮤지컬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버전은 2010년과 2017년,그리고 작년 국내에서도 공연됐다.

절친을 통해 등장한 성소수자의 이야기
 
 빌리의 아버지 재키는 아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료들을 배신하고 일터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어린 시절 누나를 따라서 발레를 배웠던 제이미 벨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빌리 엘리어트> 오디션에서 2000: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 빌리 역에 낙점됐다. 그리고 2001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제이미 벨의 경쟁자는 무려 <글래디에이터>의 러셀 크로우와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 <원더 보이즈>의 마이클 더글라스, <퀼스>의 제프리 러시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화려하게 데뷔했던 제이미 벨은 안타깝게도 <레옹>의 나탈리 포트만이나 <어바웃 어 보이>의 니콜라스 홀트처럼 스타배우로 대성하진 못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이 준수한 흥행성적에도 속편이 제작되지 못했고 2015년 졸작으로 평가 받은 <판타스틱4> 리부트에 출연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제이미 벨은 작년 프라임 비디오 채널에 독점 공개된 영화 <위드아웃 리모스>에 출연했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아버지와 형 토니(제이미 드레이븐 분)를 통해 탄광노조의 이야기를 보여줬다면 빌리의 절친 마이클을 통해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 초반 마이클이 빌리에게 누나 옷을 권하고 화장을 시켜줬을 땐 빌리가 거부감을 보이지만 마이클의 입장을 이해한 후에는 오히려 빌리가 마이클에게 발레 스커트를 입어보라고 권한다. 그리고 영화 후반 마이클은 청년으로 성장해 빌리의 공연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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