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의 싸움이 곧 나의 싸움인 까닭
[김성호 기자]
사람이 식물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들판과 계곡, 산과 사막, 자갈밭과 비닐하우스, 방 안에 놓인 화분에 흩뿌려진 씨앗들을 생각해보라. 그 식물들은 제가 뿌려진 땅과 당면한 환경에 적응하며 평생을 살아간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은가. 나고 자란 나라와 도시에서, 그곳의 문화와 사람들에 적응해 살아간다. 제가 겪고 배운 것을 기초로 새로 만나는 것들을 판단한다.
삶은 연속적이다. 누구나 처음부터 지금 이 모습이진 않았을 것이다. 글을 쓰는 나도, 글을 읽는 당신도, 책을 쓴 작가 홍은전씨도 말이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면 그중 상당부분은 우리가 뿌리를 내린 땅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 겪어야 했던 사건들의 영향이 클 것이다.
▲ 그냥, 사람 책 표지 |
ⓒ 봄날의 책 |
다르다고 생각했던 홍은전 작가와 나는, 그러나 생각보다 가까울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 건 단 한 권의 책 <그냥, 사람>을 읽고 나서였다. 홍은전이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50여편 칼럼을 엮은 책으로, 노들장애인야학과 그곳 밖에서 그녀가 만난 사람과 사건을 담았다.
실린 글 한 편 한 편이 짤막한 에세이인데, 담긴 내용마다 책 한권으로 들어내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려운 묵직한 사연이 느껴졌다. 요컨대 실린 글 모두가 어느 하나의 세상으로 독자를 이끄는 표지 같았다. 나는 홍은전을 만나 각각의 세계로 돌입하는 문고리를 잡았다.
온갖 소외된 인권문제에 불현듯 나타나는 인간
책에서 적고 있듯 홍은전은 한 명의 연대자다. 야학에서 공부하고 사회에 제 숨 쉴 곳을 마련하려는 장애인들에게 곁을 내주며 활동했다. 처음은 그리 대단치 않았다. 2001년, 임용시험을 준비하던 젊은 홍은전이 노들장애인야학의 문을 두드렸다. 스스로 장애인의 '장'자도 몰랐다고 적은 건 사실 그대로였던 듯 보인다. 장애인이 버스를 타지 못해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교사의 말에 "그럼... 지하철을 타면 되잖아요" 하고 답했다는 그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홍은전은 장애인 문제를 넘어 사회의 온갖 소외된 인권문제마다 얼굴을 비춘다. 작은 목소리들에 확성기를 대어주고 글로 정리해 읽기 쉽게 풀어낸다. 이 책에 담긴 사건만도 장애인 문제를 넘어 세월호 침몰참사와 제천 화재참사, 용산참사, 대추리 강제철거 사태 등 여럿이다. 직접 참여하지 않은 문제더라도 그들이 겪은 문제를 공부해 알기 쉽게 풀어내는 게 그의 일이다.
이 모든 사건 가운데 녹아 있는 자본의 비인간성과 인권말살, 국가책임 방기, 소수자 소외 등의 문제를 잡아채는 홍은전의 펜 끝이 날카롭다. 20년의 시간이 그를 투철한 활동가로 빚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책이 적고 있는 수많은 사건에서 연대자들은 절망하고 좌절하며 낙오하기까지 한다. '집 없는 이들에게 주거비를 지원하는 데엔 고작 26억을 쓰면서 이들을 추방해 격리하는 수용시설에는 237억의 예산을 쓰는 이 현실'에서, 수급대상 장애인이 일을 하고 돈을 모으면 복지지원을 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상황에서, 자식이 성인이 되면 장애인활동지원 서비스를 절반까지 줄여버리는 국가의 태도에서 활동가들은 절망한다.
연대자들의 좌절과 희망에 관하여
그러나 그 모든 문제와 맞닥뜨려 패배하지 않고 살아남은 홍은전은 전보다 더 유능하고 매서워진 활동가가 되어 사람들의 손을 붙들어준다.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소외되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문제들로 이끌어간다.
그 문제들은 어떤 것들이었나.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오지 않는 문제, 있는 줄도 모르고 불편해하지도 않았던 문제, 유서를 쓰고 살아갈 만큼 당사자들에겐 처절한 문제, 거부당하고 도처에서 엄마들의 무릎을 꿇리는 문제, 너무나 쉽게 추방되고 격리되는 문제, 개인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점점 더 문제를 쥐고 질문하며 싸우는 이들이 사라져가는 문제들이다.
홍은전은 그 문제들을 겪어내며 순간순간 수많은 깨달음과 마주한다. '오랜 시간 절박한 이들과 함께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디까지나 연대하는 사람이었을 뿐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걸, 둘의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며 '손 벌리는 자의 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손 잡아주는 자의 자부심으로 살아왔던 시간이 부끄러워서 펑펑 울었다'는 글귀를 읽을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독자가 얼마나 있을 것인가. 홍은전의 깨달음은 곧 독자의 반성으로 이어진다.
연대자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감을 인지하면서도 그 연대자로부터 희망을 구하는 홍은전의 모습은 그가 그레타 툰베리 같은 환경운동가를 묘사하는 것처럼 '위풍당당하다'.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 <공동정범>을 보며 희생자와 구속자 가운데 용산 재개발 지역 철거민이 아닌 연대자가 많았다는 사실을 보고 놀란 홍은전은 그로부터 또 다른 희망을 보았다고 한다. 연대자들이 서로에게 던진 희망이 얼마나 컸던지 그들은 서로에게 신이 되어준 것 같았다고 적었다. 그리고 홍은전은 자기 몫의 싸움을 고민하기에 이른다.
사람을 키우는 모든 왈칵거림에 대하여
홍은전은 그와 같은 연대자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아까웠는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몸을 사리며 적당히 비겁하게 내 곁에서 오래 살아주길 바란다'고 고백한다. 이 책을 읽은 모두가 홍은전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생각할 것이다. '되도록 몸을 사리며 적당히 비겁하게 오래 살아주길 바란다'고 말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한때는 사람이 식물 같다고 생각했다. 뿌려진 땅에서 적응하고 그에 맞춰 살아가는 식물 말이다. 책을 읽고 나서 보니 사람은 식물이 아니다. 임용시험을 준비하며 마음이 황폐화됐던 이십대 홍은전은 스스로 노들장애인야학의 문을 두드려 오늘의 그가 됐다. 제가 알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진출이며 도전이었다. 그로부터 보통의 사람들이 겪지 못하는 세상을 겪고 남에게도 제가 보는 세상을 보라며 위풍당당하게 외치고 있다.
그가 쓴 글 하나하나가 어찌나 버거웠는지 그가 승리라고 한 사건들조차 마음껏 즐기고 박수치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손을 들어주며 응원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나의 자리에서 나의 싸움을 고민하기로 결심한다. '싸우는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건 좋은 사회의 증거가 아니라 그 사회의 수명이 다했다는 징조'이므로.
사람은 매순간 꾸준히 성장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왈칵 하고 성장한다. 노들장애인야학의 문을 두드린 홍은전이 그랬듯, 이 책을 읽고 난 뒤 고민하는 내가 그렇듯, 앞으로 이 책을 집어들 많은 이들이 그렇듯. 그 모든 왈칵거림이 우리 사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들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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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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