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발견... 제2차 언양격문사건과 언양-울산 소년동맹
[이병길 기자]
언양지역소년소년연맹이 언양소년동맹으로 개칭된 것은 분명하나 그 시기는 불명확하다. 양산의 경우, 양산불교소년부와 양산청년소년부는 1927년 10월 29일 연합총회를 개최하고 양산소년동맹을 조직하기 위해 해체하였고, 1927년 12월 12일 양산청년동맹회관에서 창립하였다. 1928년 7월 이동개는 밀양에서 열린 조선소년총연맹 경남소년도연맹 결성대회에 참석하였다. 당시 소년총연맹의 정홍교가 참석하였다. 언양의 김흥수가 중앙집행위원, 김영조가 중앙검사위원에 당선되었다.
▲ 언양청년동맹집행위원(1928.6.3.) 1920년대 후반 언양지역 항일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청년운동가들. 3열 왼쪽 첫번째가 항일독립운동가 이동개이다. (출처 : 이건욱) |
ⓒ 이건욱 |
울산소년동맹간부 이동개가 1931년 6월 15일 울산 경찰에 체포되어 구류 15일을 살았다. 양산농민소년 폭행사건 연루자 이영건에게 편지한 것이 불온하다는 이유였다. 이영건은 언양의 이동개와 같이 양산의 소년운동가에서 청년운동가로 성장한 인물이다. 1929년 7월 양산소년동맹의 소년부를 담당하였고, 1930년 9월 양산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 4월 양산농민조합의 소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양산 지주 배영복의 사위 최지택과 농민조합 소년부원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이영건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양산지역의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계급대립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양산농민조합원의 양산경찰서 습격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언양에서 활동하는 신영업, 신학업, 김기오 등이 양산지역에서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에 가담하던 시점이었다. 1930년대가 되자 일제는 노골적으로 탄압 국면에 들어갔다. 야학을 불온사상의 소굴로 보고 탄압하고 1931년 10월 25일 언양농민야학은 폐쇄되었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원들이 소작료 인하를 주장하다가 검거된 농민을 석방하기 위한 양산경찰서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하고 140여 명이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사건에는 신영업, 신학업도 연관되어 언양에도 알려졌다.
1932년 5월 1일 제2차 언양격문사건이 발생했다. 메이데이를 맞이하여 아침에 언양 여러 곳에서 과격한 격문이 붙어 있는 것을 언양주재소 경찰들이 발견하였다. 고등계 목촌형사는 요주의 인물이었던 언양 청년회 신주극, 박성우, 이동개를 격문사건 혐의로 검거하였다. 진범은 홍정수(洪正守, 18세)였다. 사건의 전말은 알려지지 않았다. 경찰은 5월 8일 홍정수를 구류 25일, 박성우 이동개 신학업은 각 구류 7일을 처분하였다. 신학업 등은 5월 14일 귀가하였다.
신학업은 양산농민의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에 의해 '경남적색농민조합동부위원회'사건으로 구속된다. 이 사건의 여파로 양산, 김해, 언양지역의 저항적 청년운동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청년회와 소년회,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 각종 단체들이 해산되면서 지역에서 사회운동을 선도할 수 있는 조직이 사라지게 되었고, 지역민들은 민족적, 계급적 차원에서 자신의 욕구를 표출할 창구를 잃어버렸다. 이런 변화는 언양 지역 사회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언양 지역민들의 관심은 지역개발 및 발전에 관한 내용에 집중되었다. 이 시기 지역에서 중요한 사안으로 부각된 것은 도로 부설, 시장 이전, 공의(公醫) 설치, 학교 설치 및 학급 증설 등이었다. 도로를 새로 놓고, 시구개정을 하고, 학교를 설치하는 것은 모든 지역민이 혜택을 보기도 했지만, 때때로 혜택을 보는 지역과 혜택을 덜 보는 지역, 손해를 입는 지역을 발생시키게 된다. 그 격차가 커지게 되면 지역민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언양에서도 개발의 문제를 둘러싸고 마을 단위, 면 단위의 갈등이 발생했고, 식민 당국과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울산소년동맹 창립(1930)과 소년운동의 퇴조
1928년 7월 8일 오전 11시 조선소년총연맹경남도연맹설립대회가 밀양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언양의 김흥수는 중앙집행위원, 김영조는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안건 중에 "일면일소년회조직촉성(一面一少年會組織促成)의 건"이 있었다.
1930년 3월 16일 오후 2시 마침내 울산청년동맹 제1회 정기대회를 박두정 집행위원장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지역이재민 구제, 각 지부 설치, 울산청년동맹 조직 등을 토의하고 집행위원장으로 박두정을 선출하였다. 5월 5일 울산청년동맹 병영지부 설치대회를 하여 권우락 지부장을 선출하고, 8월 18일 서생지부 설치대회를 하여 이미동 위원장을 선출하였다.
정세 변화에 따라 울산지역에서도 소년회를 해산하고 소년동맹을 창립하려고 노력하였다. 소년운동단체가 소년연맹과 천도교소년으로 분열되었지만 어린이날 행사를 울산신간지회와 11개 단체가 축병, 축등, 축기 등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울산지역은 금지당했다. 또 1929년 5월 9일 경찰은 울산소년동맹 창립대회를 금지하였다. "대정 12년도 당국에서 절대로 소년단체의 집회를 금지하라는 지령을 소화 2년부터 실시"한다는 구실로 절대로 허가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1930년 5월 어린이날 행사를 울산청년동맹 울산지부에서 위원회를 열고 준비와 병영과 울산을 잇는 야학과 소년회 기타 각 단체를 연합하여 행사하기로 하였다. 준비 교섭위원으로 김유성, 박두정, 전석우를 선출하였다. 울산신간지회에서도 후원하기로 하였다. 5월 4일 11시 울산청년동맹에 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이규정의 사회로 식을 마치고 기 행렬을 하였다. 병영청년회관에서고 어린이날 기념식을 하였다.
울산소년동맹은 1930년 6월 21일 동맹원 80여 명을 모집하여 대성황을 예상하고 창립대회를 하려 하였으나, 우천 관계로 연기되었다. 마침내 6월 29일 오후 2시 울산청년동맹회관에서 창립하였다. 준비위원 전석우(田錫佑)의 사회로 서가에 홍만수, 박상선을 선출하여 창립회의를 하였다. 교양, 재정, 동맹원 증모, 지부조직, 사업에 관한 건을 논의하고 임원을 선출하였다. 집행위원장 정진수, 서무부장 박상선, 부원 김임룡, 재정부장 손보영 부원 이문조, 조직선전부장 이동개 천기봉, 교양부장 한활수 김정학, 체육부장 김주석 박두복, 조사부장 이율근 오덕환, 검사위원 김인수 김봉은이었다.
1930년 7월 27일 울산소년동맹 동면지부 설치대회가 천기봉의 사회로 열렸다. 축구대회 개최의 건, 7월 폭풍우 이재민구제의 건, 회 세력 확장의 건, 자체교양의 건을 토의하고 임원을 선출하였다. 집행위원 박두복, 서무부장 천기봉, 재정부장 천경록, 선전조직부장 박두진, 조사부장 정근도, 교양부장 이종윤, 체육부장 장두일을 선출하였다. 동면지부에서는 설치 기념으로 행상대(行商隊)를 조직하여 7월 폭풍우 이재민 돕기를 하려 하였으나, 경찰관 주재소에서 지부집행위원장 박두복과 서무부장 천기봉을 불러 행상은 여러 폐해가 많다는 막연한 이유로 금지시켰다.
1930년 9월 24일 오전 11시 울산소년동맹 울산지부가 소년동맹 위원장 정진수(鄭進守)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토의사항은 교양에 관한 건, 회원 증모의 건, 재정에 관한 건, 사업에 관한 것이었다. 임원은 집행위원장 박상선, 집행위원 이문조・이학출・박성업・김리용・김임용・손진영을 선출하였다. 12월 14일 오전 10시 울산청년동맹회관에서 제1회 정기대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11월 16일 마산에서 열린 경남소년연맹 제3기 제1회 상무위원회에서 울산지역의 가맹을 촉구하는 회의를 하였다. 1931년 울산소년동맹동면지부에서는 3월 22일 제2회 정기대회를 열고 회세확장과 교양문제를 논의하고 위원장 박두복 등을 선출하였다.
1930년대초 울산소년동맹이 결성된 후 가장 소년운동의 명맥을 이어간 곳은 동면소년회, 적호소년회를 계승한 울산소년동맹동면지부였다. 그리고 언양의 소년회였다. 하지만 1931년 전국적으로 해소운동의 바람이 일어나 소년동맹도 결국 해소되었다.
▲ 1931년 울산 어린이날 행사 울산에서는 처음으로 1천여 명이 모인 대규모 행사를 울산읍, 병영, 학성공원에서 하였다. 아이들은 깃발을 들고 행진을 하고 근우회원들은 복떡을 나누어 주었다.(출처 : 조선일보, 1931.05.08.) |
ⓒ 조선일보 |
1931년 5월 1일 오전 10시 첫 공휴일에 울산청년동맹 회관에 1천여 명의 아동이 모여 오덕상의 사회로 울산 어린이날 행사를 하였다. 개회식을 마친 후 30-40개의 어린이 표어를 쓴 큰 기와 천여 개의 작은 기를 들고 울산읍을 한바퀴 돈 후에 다시 돌아와 기념과자와 복떡을 분배받았다. 이 날 참가한 어린이는 전부 농민 야학생으로 약 5백여 명이 되었다. 행사 후 안태로 야학선생이 어린이 만세 삼창을 한 후에 행사를 마쳤다.
1934년 5월 5일 어린이날 기념을 위하여 오전 10시 울산청년동맹회관에 울산읍 야학생을 중심으로 한 어린이 4백여 명이 참석하였다. 야학교사 안태로의 사회로 개회식을 마친 후 노래를 높이 부르며 기(旗)행렬로 시내를 일주하고 복떡을 나눈 후에 무사히 폐회하였다.
1935년 울산병영 야학교가 주동이 되어 예년과 같이 어린이날 준비을 대규모로 하였다. 참석할 단체는 병영야학생 230명, 산전야학생 30명, 진장야학생 50명, 약사야학생 30명, 기타 무산아동 3백여 명으로 총 700여 명이 예정이었다. 참가 아동들에게 복떡을 나눠주려고 박영하 등 강사들의 활동으로 흰쌀 80여 승(升)이 모집되었다. 이 신문보도 이후로 언양, 울산지역의 어린이 행사 및 소년운동에 관한 기사는 더 이상 보도되지 않았다. 즉 소년의 주체적 성장을 도모하며 소년들의 주체적 활동인 소년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퇴조기를 맞이하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윤현진 평전>. 오마이뉴스에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을 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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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울산저널>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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