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표직 내려놓고 결백을 입증해야 [이진곤의 그건 아니지요]
덩치가 커진 대신에 뇌는 작아졌나
수사 저항할수록 의심은 커지는데
문재인 정권 사람들은 ‘집단지성’을 좋아한다는 인상을 줬다. 문 전 대통령부터 즐겨 이 용어를 구사했다. 아마도 그가 대통령이 되게 한 바탕이, 그냥 시위대로서의 광화문 촛불 군중이 아니라 ‘집단지성’ 주체로서의 국민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래야 말 그대로 ‘폼 나는’ 대통령 및 정부가 된다고 여겨서? 20대 대통령선거 전날이었던 지난 3월 8일 국무회의에서 그는 사전투표가 지난총선과 대선보다 10%포인트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것에 고무되었던지 이런 말을 했다.
반지성 비이성 비합리의 정치행태
“내일 본 투표에서도 적극적인 참여로 우리 국민의 집단지성을 보여 달라.”
투표는 개별 유권자의 심판 및 선택 행위다. 그 결과를 ‘집단지성’의 표출이라고 말하면, 그것도 아주 이상하지만 그나마 말은 된다. 그런데 투표에서 그걸 보여 달라니? 집단반지성의 결과라도 나올까봐서? 선거와 ‘집단지성’을 엮는 것은 억지다. 그렇지만 그가 워낙 그 표현을 좋아해서 아무데나, 말이 되던 안 되든 끼워 넣었다고 이해하기로 하자. 다만 이런 질문은 해야 하겠다. 더불어민주당을 패배시킨 것은 집단지성이었을까, 집단반지성이었을까?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이 말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는 지난 2020년 7월 21일 <신동아>와의 회견에서 차기 대선 출마 여부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결국 대통령은 하늘이,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국민이 정하는 것이다. 집단지성체로 발전한 국민, 대중이 정하는 대로 가는 거다. 국민 대중은 흩어진 모래알 같은 존재가 아니고 1억 개의 눈과 귀, 5000만개의 입을 가진 하나의 단일한 인격체다. 정말 무서워해야 한다.”
지난 3월 3일 부산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BPEX)에서 열린 민주당의 부산‧울산·경남 후보 경선 직후 취재진에게 또 집단지성을 설파했다.
“국민들께서는 눈 2개, 귀 2개 가진 정치인들과 달리 1억 개의 눈과 귀, 5000만개 입으로 소통하는 그야말로 집단지성체이다. 개발에 참여한 민간 영역의 투자가 어떻게 되는지, 개발 이익이 어떻게 나뉘었는지 하는 부분은 제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상식을 가진 국민 들은 모두 알고 있다.”
측근으로 알려졌던(그 자신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지만) 유동규 전 성남시 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에 대해 검찰이 전날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과 관련해 한 말이다.
다시 묻고 싶어진다. 이 대표 생각에 자신을 대선에서 패배시킨 국민은 집단지성체였을까, 집단반지성체였을까?
그가 당 대표를 맡고 있는 민주당은 21대 총선에서 압도적 다수의석을 확보한 이래 지금까지 지성 대신 덩치로 의회정치 과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성정치’가 아니라 ‘덩치정치’다. 지성·이성·합리성이 발휘되어야 할 입법 및 예산심의 과정에서 민주당은 반지성·비이성·비합리의 화신이라도 되는 양 무리를 저질렀다. 덩치가 커진 대신 뇌는 작아진 것일까? 근육이 이상 발달한 것과 반대로 뇌의 역할이 줄어든 것으로 봐야 할까?
덩치가 커진 대신에 뇌는 작아졌나
그 민주당이 지난 23일 이 대표에 대한 검찰 소환 통보 이후, 그가 연루된 사건을 수사 중인 검사들의 인적사항을 정리한 자료를 만들어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배포했다. ‘이 대표 관련 수사 서울중앙지검·수원지검 8개 부(검사 60명)’라는 제목의 웹자보(대자보의 인터넷판)에 검사 16명의 실명과 사진, 지휘 계통 정보 등을 담았다.
민주당 측은 “평소에도 당 최고위 발언 등을 자료로 만들어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배포해 왔던 통상적 활동”이라고 주장한 모양이다. “봐라, 이게 바로 우리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야당과 법조계에선 ‘민주당의 좌표찍기’라고 비난했다. 그간의 예로 미루어 한번 찍히면 수천 건의 문자폭탄을 각오해야 한다. 그게 민주당의 통상적 활동이라니 질겁할 일 아닌가.
누가 보기에도 이는 국가 주요 기관의 업무 집행에 대한 방해 책동이다. “자, 다 같이 문자폭탄이든 집단행동이든 검찰에 압력을 가해서 기를 죽이자”고 선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검찰 수사에 대한 거대정당의 이런 행태는 법질서 수호 임무를 포기하라는 요구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이 대표를 위해서라면 국가기관의 정상적 작동 따위는 언제라도 정지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복심인 정진상 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당시)이 지난 9일 기소되자 이 대표는 페이스북에 을 통해 “이미 예견했던 일이다. 법정에서 무고를 증명해 돌아올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이런 말도 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 이재명은 단 1원의 사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 공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형사 피의자가 하필이면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흉내 내다니. ‘지성’을 강조하는 사람이 이런 무례를 저지르는 게 황당하다. 어쨌든 ‘하늘을 우러러’라고까지 했으니 검찰 수사에 겁낼 까닭이 없겠다. 하긴 아무리 결백해도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는 게 성가시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거대 공당의 대표로서 국가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그 정도의 수고는 기꺼이 해줘야 하지 않을까.
수사 저항할수록 의심은 커지는데
민주당이 검사 명단 공개와 함께 이들이 담당한 수사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줬던데 그 점에서는 아주 의미가 없지도 않다. ‘공직선거법 위반 수사’, ‘대장동·위례 개발사업 수사’, ‘쌍방울 변호사비 대납 수사’, ‘李 자제 불법도박 수사’, ‘법인카드 유용 수사’, ‘성남FC 수사’. 정치인으로서, 특히 원내 제1정당의 대표로서 이만큼 많은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 ‘한 점 부끄럼’이 없고 ‘상식을 가진’ 국민 모두가 그의 결백을 믿는다(그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면 당의 방패 역할을 자제시킬 일이다.
“이러지 말라. 이럴수록 나의 이미지가 훼손된다. 뿐만 아니라 국민은 오히려 나를 의심할 수 있다. 나는 일단 대표직을 내려놓겠다. 당당히 무고함을 입증하고 돌아올 테니 당은 민생문제에 전념하라.”
이렇게 당부한다면 분위기는 그에 대해 훨씬 호의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는 못하면서 되레 윤석열 대통령, 그리고 검찰과 전선을 형성하면서 독전(督戰: 싸움을 감독하고 사기를 북돋워 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뭔가 찔리는 데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국민은 집단지성체이고, 그 국민이 자신이 무고함을 믿고 있다고 자신이 말했다(개인의 유무죄까지 집단지성체의 판단 영역에 드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대정당의 대표가 하는 말이니 일단 그렇다고 하자). 국민의 집단지성에 대해 회의가 생긴 게 아니라면 이 대표나 민주당이나 ‘정치탄압’ ‘정치보복’이라고 소리 지르며 버티는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한다. 보기에 흉해서 하는 말이다.
설령 검찰이 정치탄압을 위해 혐의를 씌우려 한다고 하더라도 ‘집단지성’이 이를 가려내지 못할 리 없다. 윤 대통령이나 검찰이 아무리 힘이 세다한들 집단지성에 맞설 엄두를 내겠는가. 보기에 따라서는 이 대표 측이 대선 패배에 대한 보복심리로 윤 대통령을 궁지로 모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대선불복심리’다. 자신을 패배시킨 유권자는 ‘집단반지성체’였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면 검찰수사를 둘러싸고 벌이는 소동을 진정시켜야 옳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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